마음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다
여러 해 전, 한 단체 카톡방에 뮤지컬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릴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지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답글을 썼습니다. “20여 년 전 명성황후나 레 미제라블 공연을 보면서도 눈물을 마구 흘렸으니 나이와는 관계없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랬는데 요즘 감동이 줄어드는 현상을 의식합니다. 감정이 말라가는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장르를 막론하고 좋았던 음악을 다시 들을 때 자주 느낌이 없이 덤덤한 것이 한 예입니다.
학생 시절부터 나이 들도록 음악을 찾아 들은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영미계의 팝송 중 몇몇 가수의 노래는 좋았습니다. 귀동냥으로 들은 카펜터스나 짐 리브스 등 여러 가수를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 길가에 흔했던 전파사의 스피커를 통해 들었습니다.
30살 전후에는 값싼 오디오를 구입해서 서양 클래식 음악을 듣기도 했습니다. 마련한 기기로 음악을 들을 때는 ‘음악이 좋다’고 생각했을 뿐, 특별한 곡이 어떻게 좋다고 여긴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외는 있습니다. 라디오로 들은 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심볼 곡으로 사용했던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합창곡으로 먼저 들었던 막스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 난로 피운 다방에서 처음 들었던 브루흐의 ‘스코틀란드 환상곡’ 등은 나를 사로잡은 곡이었습니다.
여러 곡을 오랫동안 즐겨 들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잠시 멈춰서 듣기도 했고, 클래식 곡은 구입한 음반으로 듣기도 했습니다. 2년간 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지낼 때는 좋아하는 곡들을 컴퓨터에 저장해 가서 주말 아침마다 듣곤 했습니다.
문제는 앞에서 말한 대로 근래에 그런 곡들을 들어도 무심해지는 때가 많은 일이었습니다. 생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면서 꿈이 적어진 것에 대한 서운함과도 비슷합니다. 감정이 메말라 가는 신호라고 여겼습니다. 상실감이 컸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어떤 이가 토스티의 ‘기도(Preghiera)’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토스티의 기도는 고교 시절 처음 들었습니다. 라디오나 전파사에서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고교생이 부르는 걸 들었습니다.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피아노 반주까지 하면서 불렀습니다. 다만 남학생인데 ‘여성(女聲)’을 내는 것은 불편하다고 여겼습니다. 카운터 테너라는 걸 세월이 훨씬 지난 뒤에 알았습니다.
몇 해 뒤 기도의 악보가 내 손에 들려졌을 때 직접 불러보았습니다. 후반부의 고음이 내가 낼 수 있는 음역을 넘어서서 힘들기도 했지만 가끔씩 불렀습니다. 몇 차례 부르다가 피아노 반주 부분은 쉬워 보여서 연습한 끝에 거의 제대로 치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고등학생 외에는 남이 부르는 ‘기도’를 들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생각난 김에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여러 사람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가수는 찾지 못했습니다. 전문 가수들의 소리는 그럴싸해도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음표를 기계적으로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아노 반주도 대체로 두들기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섭섭했습니다. 감정이 메말라서 마음에 드는 연주를 발견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기대한 표현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기도는 고교 시절의 한 학생 외에는 다른 사람이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부르는 걸 기대했을까, 왜 만족하지 못하고 실망만 했을까?’ 이렇게 의문이 들다가 문득 내가 마음속으로 ‘기도’에 대한 나만의 악상(樂想)을 지니고 있었구나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 악상대로 부르는 가수를 못 만난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생각은 비약했습니다. 베토벤이 귀로 듣지 못하면서 훌륭한 곡들을 작곡할 때 마음속으로 들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나도 마음속에 곡의 이미지를 오래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베토벤만이 아니라 작곡가들이 중주 곡이나 오케스트라 곡, 또는 합창곡을 만들 때 귀가 아닌 마음속으로 들으면서 작곡할 수밖에 없지요.
악보를 보면서, 그리고 부르면서 마음속으로 들은 ‘기도’가 내게 있었고 지금도 그 이미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정이 메마른 게 아니고 기대하는 악상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공감할 겁니다. 걱정했던 마음이 상당히 위로받습니다. 비록 소품(小品)인 노래 하나로 말미암은 일이지만 내가 몰랐던 마음속 사실을 발견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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