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린 공, 얕보면 다친다 | |||
스포츠2.0 | 기사입력 2007-06-22 04:56 | |||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가슴 속에는 모두 다른 마음, 각자 걸어가고 있는 거야.” 그룹 넥스트의 보컬 신해철은 1992년 대중가요 <도시인>을 통해 아무 생각 없이 시시각각 돌아가는 빠른 사회를 풍자했다. 그러나 같은 해 삼성 투수 성준(현 롯데 코치)은 시대상과는 무관하게 느린 공을 던지며 다른 마음을 품고 걸어가고 있었다. 1992년은 성준이 30살이 되던 해다. 본격적으로 느린 공을 던지기 시작한 때다.
1986년 데뷔 시즌 15승(5패)을 거둘 때만 해도 성준이 느린 공을 던진 것은 아니다. 20대를 뒤로 한 성준은 변화가 필요했다. 이후 그는 느린 공을 무기로 삼았고 1993,1994시즌에는 26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누렸다. '느린 공' 성준의 계보는 2000년대 들어 전병호(삼성)와 최원호(LG)로 이어지고 있다. 느린 공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박사학위 ‘타자학’
느린 공으로 승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자는 공을 보고 배트를 휘두른다. 눈에 보이면 공략 당할 수밖에 없다. SBS 이광권 해설위원은 “1980년대 사이드암 투수들이 성준처럼 느리게 공을 던지곤 했다. 그러나 투수가 볼 카운트에 여유가 없거나 승부처일 때 느린 공을 결정구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느린 공 승부가 가능하려면 타자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타자학’이라는 비공인 박사학위를 취득할 각오로 철저하게 상대 타자를 파고들어야 한다.
성코치는 “핵심은 상대에 맞는 투구패턴을 빨리 만드는 것이다. 경기흐름은 물론 타자의 습성과 심리까지도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코치는 느린 공의 완급피칭을 ‘하드웨어로 안 되는 것을 소프트웨어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인터벌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성코치는 현역 시절 투구간격을 길게 하며 타자와 타이밍 싸움을 했다. 모자나 송진주머니를 만지는 것도 모두 계산에 넣었다.
전병호 역시 비슷하다. 전병호는 국내 프로야구 최고의 ‘손장난 마술사’로 불린다. 마운드 위에서 행동이나 느린 공 승부패턴 모두 성코치를 닮았다. “내가 그렇게 던지지 말라고 했는데 (전)병호 그 녀석이 나처럼 그 짓을 하고 있다.” 웃음을 보이며 성코치가 꼽은 전병호의 강점은 마운드 위에서 절대 조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병호는 완전히 느린 공을 던진다. 직구최고 시속이 135km다. 병호는 마운드에서 절대로 평상심을 잃지 않는다.”
최원호는 전병호보다는 직구 구속이 시속 3~4km 정도 빠르지만 느린 공을 활용하기 위한 노력은 전병호에 뒤지지 않는다. 팀 동료 박명환은 “(최)원호형은 타자 분석에 많은 시간을 낸다. 경기운영과 볼배합 등을 늘 연구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박명환은 "올시즌 좋은 투구를 하는데 원호형의 도움이 컸다. 강속구 투수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내용을 많이 알려줬다"고 덧붙였다.
사과상자 외곽선
느린 공은 목표지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스크라이크 존에 사과를 세워놓으면 9개 정도가 들어간다. 그러나 성코치는 현역시절 사과 11개를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넣었다. 비결은 외곽선이다. 성코치는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에 또 하나의 선을 직접 노트에 그린 뒤 원래 스트라이크 존과 외곽선 사이의 공간에 공을 집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스트라이크존 외곽선을 들락날락하며 걸치듯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정확한 제구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 현역 시절 성코치의 공을 포수 뒤에서 직접 본 문승훈 심판은 “성준은 코너워크가 완벽했다. 계산적으로 느리게 행동하며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빼앗았다”고 떠올렸다.
전병호와 최원호는 각각 포크볼과 느린 커브의 제구력이 뛰어나다. 포크볼은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에서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병호의 포크볼은 바깔쪽 몸 쪽 모두 외곽으로 떨어지면서도 스크라이크 존을 통과한다. 최원호는 시속 120km대 후반의 슬라이더와 시속 100km대의 커브를 자유자재로 던진다. 간혹 들어오는 시속 140km의 직구가 미끼다. 느린 공 투수들에게는 리듬감도 필요하다. 슬로-슬로-퀵 또는 퀵-퀵-슬로 두 가지 형태가 기본이다. 강속구 투수에서 현역생활 막바지에 완급피칭을 했던 SK 김상진 투수코치는 “느린 공으로 승부하면 투구수 조절이 용이하다. 투구 완급을 이용하면 어느 순간 타자들을 맞춰 잡는 게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밝혔다.
예측불가
느린 공은 타자를 춤추게 한다. 성코치는 “빠른 볼 투수는 강속구를 포수 미트에 꽂아 넣고 삼진을 잡을 때 기분이 좋지만 느린 공 투수는 내가 던진 타이밍에 타자들의 배트가 출렁거리고 허우적거릴 때 쾌감을 느낀다고”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제 타자들은 느린 공 투수들의 공을 어떻게 생각할까. 답변은 대체적으로 “생각만큼 쉽지 않다”이다. 현역 시절 성코치와 대결한 SK 김경기 타격코치는 “성준 코치의 공은 예측하기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느린 공을 공략하려면 공을 그만큼 오래 봐야 하는데 하체 밸런스가 뒷받침 돼야 끝까지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SK 이호준은 전병호의 공에 대해 한마디로 어렵다고 말한다. “체인지업과 커브가 좋다. 특히 느리게 던지다가 갑자기 들어오는 몸 쪽 직구가 빠르게 느껴진다”고 했다. 삼성에서 전병호와 한솥밥을 먹었던 SK 정경배 역시 “전병호는 처음에는 포크볼을 많이 던지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노력을 기울여 포크볼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포크볼 컨트롤이 참 좋다”고 평가했다. 정경배는 인천고 동창인 최원호에 대해서도 “고교 때부터 두뇌회전이 빠른 친구로 유명했다. 완급 조절이 절묘해 타격 타이밍를 잡기가 정말 어렵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까다롭다고 느끼는 선수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LG 최동수는 “전병호의 공은 스트라이크 존에 걸쳐 들어오는데 배트가 나가면 배팅 포인트는 다른 곳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같은 팀의 김상현 또한 “전병호 선배의 공을 만만하게 보다가는 큰코다친다. 스트라이크 존의 내외곽을 모두 활용한다”고 밝혔다.
전병호나 최원호 같은 투수가 선발투수로 예고되면 타자들의 머리는 복잡해 진다. 타율을 올리겠다고 달려들면 4타수 무안타로 돌아서게 마련이다. LG 송구홍 코치는 “전병호가 선발이면 만만치 않은 투수를 만났다는 분위기가 더그아웃에 흐른다. 느린 공은 움직임이 심하다. 공을 몸 쪽에 더 붙여 놓고 쳐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가볍게 밀어치듯 맞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공략법을 소개했다.
성코치는 느린 공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 시기를 34,35살로 기억했다. “처음에는 나도 직구와 슬라이더만 던졌다. 그러다 체인지업과 커브를 차례로 익히고 나중에는 인터벌까지 이용했다. 투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변화와 생존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SPORTS2.0 제 55호(발행일 6월 11일) 기사
심현석 기자
ⓒmedia2.0 Inc.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