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준비됐더라도 놀라움은 여전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된 여인의 증손녀인 영국 BBC의 에이미 리보비츠가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실어 나르는 열차를 운전했던 남자의 손녀를 만났는데 할 말을 잃었다고 25일 털어놓았다. 리보비츠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일인칭 서술로 옮긴다.
난 홀로코스트를 살아 나온 우리 할아버지 루드비히와 그의 어머니 레이철을 결코 만나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은 1944년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에 소달구지에 실려 들어갔다. 루드비히는 당시 열다섯 살쯤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다른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레이철은 고문 끝에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난 자라며 그들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우리 가족은 다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만날 기회가 적지 않았다. 독일에서 코르넬리아 스틸레르를 인터뷰했을 때 난 이미 마음 속에 그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코르넬리아의 할아버지는 변변찮은 수입으로 꾸려가는 한 가정의 기둥이었다. 이틀째 탄광에 갇혀 생사를 넘나든 뒤 그는 다른 일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도이치 제국철도의 열차 조종사 일을 하게 됐다. 처음엔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운반했는데 더 사악한 일들로 바뀌었다.
"난 우리 할아버지가 열차 조종사로 일했으며, 죽음의 수용소들에 출퇴근했다고 믿는다. 그는 가족과 떨어져 리그니츠(Liegnitz, 현재 레그니차 Legnica) 기숙학교에 묵었는데 죽음의 수용소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코르넬리아는 또 할아버지가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난 우리 할아버지가 엄청 끔찍한 일들을 봤으며 어떻게 하면 그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가족 상담의로 훈련한 뒤 그녀는 과거를 떠올리며 그를 더 잘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는 "어떤 지점에서 그는 하수인이었을까? 그는 하수인들에게 액세서리였을까? 언제 그는 이 일을 그만 뒀을까?" 묻기 시작했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순간, 내 입이 바싹 말랐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유체 이탈을 경험하는 것처럼 이 모든 일이 들렸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곤 어떻게 그녀의 할아버지가 열차들을 아우슈비츠까지 운전했으며, 우리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는 그곳에서 어떻게 생을 마쳤을까 하는 것이었다. 난 아우슈비츠에서 마찬가지로 살해된 모든 다른 친척들, 존재했다는 것만 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촌들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난 눈물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내가 조금이라도 젊었더라면, 당신에게 강한 증오의 감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을 인정하기가 정녕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코르넬리아는 "손 좀 내밀어 봐요"라고 말한 뒤 "이게 중요하다. 당신 눈물과 내 손길이 날 감동시킨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우슈비츠의 열차 조종사였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없다"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사과할 수도 없다.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 뒤 그만큼 범죄가 위중하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주아주 죄스러움을 느꼈으며 죄책감 속에 죽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너그러이 받아줘 고맙다고 했으며 역사를 철저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여러분도 예상하지 못했을 얘기를 꺼냈다. 그녀 가족이 살아온 쇤발트(Schönwald)의 일부 독일인들이 자신의 역사 연구에 화를 낸다는 것이었다. 크라쿠프에서 100km쯤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최근 폴란드식 이름 Bojków로 바뀌었는데 과거 나치의 지배를 받지도 않았던 곳이다.
코르넬리아는 원래 이 마을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반대했으나 갈수록 잠식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쇤발트를 슬라브 땅의 이상적인 아리얀 마을로 봤다. 그는 정통 독일의 "다섯 번째 기둥"이 돼 군대에 쓸모있는 도움을 제공했으면 하고 바랐다.
글라이비츠(Gleiwitz) 사건이 터진 곳이기도 한데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치 독일이 1939년 잘못된 국기를 내걸어 2차 세계대전을 촉발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1945년 종전을 앞두고 소비에트 군의 공격을 처음 받은 독일 마을이 됐다. 물론 그 직전, 나치가 자행한 이른바 '죽음의 행진'이 벌어진 곳이었다.
소비에트 군이 아우슈비츠로 진격하자 나치 친위대(SS)는 유대인들이 주종을 이루는 6만명가량의 수감자들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1945년 1월 19일과 21일 사이 이들 중 일부가 쇤발트를 통과하게 됐다. 영하의 추위가 몰아치는데 수감자들은 얇은 줄무늬 셔츠만 걸친 채 나무로 만든 신발에 의지해 행진했다. 굶주리거나 탈진해 낙오하면 그대로 총을 쐈다.
살아남은 이들은 덮개도 없는 소달구지 위에 태워져 더 서쪽으로 이동, 부헨발트(Buchenwald) 같은 다른 수용소들로 보내졌다. 나치는 이들을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 붙들고 있었는데 심지어 (전세가 기울어진 것이 너무 분명해 보이는) 이 때도 제3제국이 끝내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향토 사학자이며 종교 교사인 크지스토프 크루친스키는 죽음의 행진이 지나갔던 메인 스트리트로 날 데려갔다. 사람들이 독일 시절 바우어 스트라세로 알려진 롤니코우(Rolnikow) 스트리트의 교회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는 손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수감자들이 걸어야 했던 길에는 원래 자갈이 깔려 있었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그 길이 "죽음의 행진을 말없이 지켜본 증인"이라면서도 "자갈들은 말하지 못한다"고 씁쓸해했다.
이런 역사는 지금까지 묻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쇤발트 출신 독일인들이 소비에트 공격 이후 탈출했다가 폴란드인들이 다시 정착하면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80대 독일계 폴란드 여인 루타 카수벡은 술 취한 소비에트 병사들이 집에 쳐들어와 아버지를 살해한 일을 내게 들려줬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데 과거를 묻지 말자는 속내다.
몇몇 독일인들이 코르넬리아의 연구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더라는 얘기에 난 놀라지 않았다. 독일인 스스로는 Erinnerungskultur(기억의 문화)를 자랑삼아 얘기하는데 홀로코스트 교육 의무화, 박물관, 기억 따위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국가와 정부의 일로만 본다. 유대인 학생 지도자였으며 정치 컨설턴트인 베냐민 피셔는 독일인들은 추상으로 과거를 만나며 흡족해 하는데 자신의 가족사를 다루는 데 한층 어려움을 토로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의 탈개인화'라고 정리한다.
비엘레펠트 대학(Bielefeld University) 연구에 따르면 독일인 셋 중에 한 명은 가족 중 누군가 홀로코스트 시기에 유대인들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믿는다. 베냐민은 "어처구니가 없으며 통계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죽음의 행진이 Bojków의 거리를 지나간 지 80년이 흘렀다.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지난주 독일인과 유대인, 폴란드인 대표단이 지방 관서들, 학교들, 응급 서비스까지 이 마을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
코르넬리아와 크지스토프도 그곳에 있었다. 코르넬리아에게 역사는 깊이있게 개인적인 것이다. 그는 공부하고 기억하는 일이 어떻게 사회가 그렇게 급격하게 바뀔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그리고 난 그것이 감사한 일이었다. 그들의 작업과 열정이 내게 점증하는 반유대주의에 맞설 희망이 된다. 나도 우리 가족이 어떻게 이곳에 산 채로 끌려와 살해됐는지 기억을 간직하려 한다.
쇤발트 사람들은 높은 문화와 정신성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코르넬리아의 마지막 말이다. "사람들은 그저 선과 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선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아주 빠르게 어떤 일들에 얽혀들어 잘못 된 쪽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시간을 되돌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얘기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며, 인간이 서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