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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신앙,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05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만주가 소련에 점령당하자 만주군 소좌였던 정일권 씨는 소련군 포로로 시베리아 호송 중에 탈주를 시도해 하얼빈역에서 필사의 도주를 하여 옥수수 밭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총격을 가하며 쫓아오던 소련군들은 정일권 씨가 옥수수 더미 속으로 숨자, 그를 찾기 위해 무시무시한 대검으로 옥수수 더미를 사정없이 찔렀다. 이때 정일권 씨는 옥수수 더미 안에서 살려달라고 수없이 하나님을 찾았다고 한다.
다행히 소련군들이 찾는 것을 포기하고 떠나자, 정일권 씨는 그곳에서 나와 하얼빈 시내로 잠입했다. 그는 노동자로 변장하고 우리가 탄 기차로 함께 귀국하다 동계관산역 사건으로 나를 만난 것이었다.
“무기를 내어 놓으라.” 신의주에서 권총을 빼앗기다
동계관산역의 사건 이후 우리는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신의주까지 큰 어려움 없이 도착했다.
그러나 신의주는 상당히 경직된 분위기였다. 만주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만주는 우리가 떠날 때까지 소련군 점령에 이어 중국 공산당의 선무공작이 막 시작되고 있어서 어수선했는데, 북조선은 이미 공산당에 의해 확실히 장악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인민위원회라는 간판이 곳곳에 보였으며, 완장을 두른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들이 피난민들의 행색을 살피곤 했다.
그래도 우리 일행은 고국에 도착했다는 기쁨과 긴 여행을 마쳤다는 뿌듯함으로 여관에 투숙하여 저녁을 먹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복 네다섯 명이 우리를 덮쳤다.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 나왔다. 무기를 내어 놓으라.”
우리를 수색하던 그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모젤 6연발 권총들을 찾아내었다.
“이것들은 압수한다. 북조선에서는 무기 휴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만주부터 소련군이 발행한 무기 허가증을 가지고 나온 무기다.’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권총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지만 그 많은 피난민 일행 중 우리를 주목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것은 북조선이 이미 그때부터 공산당의 철저한 감시 하에 주민들의 생활을 극도로 통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예일 것이다.
다음 날 평양까지 기차로 와서 38선을 넘어야 했는데, 이미 이때는 38선을 넘기가 쉽지 않았던 때였다. 사리원에서 해주까지 협궤열차를 타고 가다 청단역이라는 조그마한 역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묵으면서 38선을 넘는 안내꾼을 만나야 했다.
이들에게 돈을 주고 안내를 맡겼다. 밤늦은 시각에 산길을 따라 걷는데 어디인 줄도 모르고 따라가다가 다음 날 새벽녁에 도착한 곳은 개성이었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와도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성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당도하여 내려 보니, 우선 눈에 띤 것은 거리를 활보하는 많은 미군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내가 만주에서 보았던 소련군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무엇보다 청결했으며 행동 등이 신사적이고 자유스러웠고 미군의 많은 자동차와 중장비들이 서울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본 고국 서울의 첫 모습이었다.
거리는 활기에 차 있었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해방이라는 감격을 느꼈다. 북조선과는 판이하게 다른 활기찬 모습! 바야흐로 조국은 새로운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피끓는 젊은이였다.
나는 만주에서 키웠던 크나큰 꿈들을 이제 새로 탄생하는 조국의 앞길에 남김없이 바치고 싶었다.
나를 믿고 따라온 고려 자위단원들, 광복군에 입대하다
귀국 후 나는 학문이냐, 아니면 군인으로서의 길이냐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이때 내 자신의 진로도 중요했지만, 나를 믿고 부모형제까지 다 버리고 무턱대고 따라 나온 40여 명의 자위단 대원들의 진로가 더 큰 문제였다.
나만 믿고 따라온 친구, 후배들이었다.
그때 나는 하얼빈 시절부터 나와는 잘 아는 사이인, 하얼빈에서 의사를 했던 채택현이라는 분을 만났다. 그런데 마침 그 분의 친형인 채택용 씨가 광복군 지대장이었다. 그 분은 나를 채택용 씨와 만나게 해 주었다.
채택용 씨를 만난 나는 그 동안 만주에서 고려 자위단의 활약상을 이야기하고, 나를 따라온 대원들의 일을 상의했다.
“그런 훌륭한 일을 한 청년들이 있었느냐? 좋다, 전부 입대시키겠다.”
그리하여 나를 따라온 대원들은 모두 광복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광복군은 경교장의 김구 주석과 돈암장의 이승만 박사를 경호하고 경비하는 일을 맡았는데 숙식은 각자 해결해야 했다.
이렇게 나를 따라 내려온 고려 자위단 대원들의 길은 일단 정해졌다. 하지만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사설군대였기에 우리의 앞길은 불투명했다.
더군다나 사회정국은 더욱 불안해져 갔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국가에 대한 꿈을 각자의 방식대로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당시 미군정 장관 하지 장군이 ‘남조선은 들끓는 용광로다. 마치 화산이 터지기 전에 들끓는 용암을 보는 듯하다.’라고 했을까.
정말로 그랬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민족 진영과 공산당과의 끊임없는 세력 다툼으로 수도 서울의 하루하루는 모임으로 날이 새고 모임으로 날이 졌다.
해외에서 돌아온 수많은 애국지사들, 그리고 그 동안 국내에서 활약하던 국내파 애국지사들. 그들 모두는 이 나라를 건설하는 데 꿈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는 모두가 실패했다.
바야흐로 혼돈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개인 자격으로 김포공항에 환국하여 경교장에 머물면서 뜻을 펼칠 준비를 했고, 이승만 박사는 김구 주석에 앞서 먼저 미국에서 환국, 돈암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여운형의 주도로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남한 각지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조선 공산당의 박헌영, 허헌, 이강국 등이 소련의 사주로 붉은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군사조직으로는 건준 산하에 일본군, 만주군 경력자들을 위주로 조직된 국군준비대가 있었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이 있었다. 그러나 광복군은 중국에서 귀국할 때 미 군정청의 방침으로 일단 해산하여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다시 국내에서 광복군 국내지대로 그 세력을 모으게 되었다.
대외 항일 군사조직이었던 광복군의 당당한 귀국을 기대했던 우리 민족에게는 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정치의 굴레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약소민족의 한이었다.
시작되는 민족의 비극, 공산주의의 발호
해방 정국의 사회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인들이 물러가면서 엄청난 행정의 공백이 생겼다. 그것은 식민지 수탈 정책상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주요한 기술부문 등은 모두 일본인들이 담당하고 우리에게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빠져나가자 많은 부분에서 혼란이 생겼다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곳은 학교와 국가의 행정기관이었다.
언젠가 홍일식(고려대 총장 역임)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해방 직후 서울에서 시골로 전보를 치려고 전신국에 갔는데 아무도 전보를 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스 부호를 일본인 기술자가 담당했는데, 그들이 모두 일본으로 가버려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화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은행권을 제조할 기술자가 없었고, 달러나 엔화 등을 환전하여 사용하는 것도 익숙하지 못했다.
교육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한글로 된 교과서가 없었고, 무엇보다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초등학교 교사 중 80%를 차지하며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는 데 하수인 역할을 했던 일본인(교장과 교감은 전부 일본인) 교사들이 갑자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교과 과목의 경우도 수학 같은 것은 가르칠 수 있었지만 국어나 국사 같은 과목은 교사들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과목이었다. 일제 하에서 국사는 일본사였고, 국어는 일본어였다. 한국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조선어라는 과목으로 배우고 그것도 2학년부터는 아예 없어져 버렸다. 나도 해방 이후 접했던 국어가 너무 생소했고, 역사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이렇게 학교 건물은 있었지만 교육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교육, 화폐, 체신, 교통 등 우리나라의 주요 부분이 모두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듯, 국가의 모든 부분이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더욱 무서웠던 것은 바로 사상 대립이었다.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민족도, 가족도 붕괴되는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서곡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민족이라는 허무맹랑한 논리로 가장한 공산주의의 마수는 아직도 식민지 수탈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난하고 힘든 우리 민족의 가슴을 할퀴어 무서운 대립의 각을 세우게 만들었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못 사는 자가 나누어 가진다.’라는 공산주의의 달콤한 허구와 기만으로 가득찬 약속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와는 별도로 가난한 자의 가슴을 채워갔다. 그러나 만주에서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모든 것을 알고 환멸을 느꼈던 나는 이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군인으로의 입문에 이어 해병대 창설로 나는 평생 싸워 왔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2부
해병대 창설, “반공의 파수꾼으로 서다” 해방정국과 해병대 창설 군인의 길, 정일권 씨를 만나다 어느 날 하얼빈 농대 후배인 최경남 씨가 나를 찾아왔다 “형님, 동계관산역에서 만났던 정일권 씨 아시죠? 그 분이 형님을 찾고 있습니다.” “정일권 씨가? 왜?” “미 군정청에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는데 1중대장은 채병덕(후에 육군 참모총장, 하동 전선에서 전사), 2중대장으로 정일권 씨가 임명되었답니다. 그래서 정일권 씨가 형님을 찾고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나도 반가운 생각에 함께 태능으로 정일권 씨를 만나러 갔다. 정일권 씨는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나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만주 동계관산역에서 겪었던 이야기와 나와 함께 내려온 자위단들이 지금 광복군에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됐다, 지금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는데 그런 인재들이 필요하다. 내가 2중대를 맡았는데 당신이 소대장을 맡아 달라.” 무조건 나를 믿고 따라온 하얼빈 자위단 동료들의 앞길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현재 몸담고 있는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사설부대라 장래성도 불투명했고, 숙식을 스스로 해결해야 해서 그 부담 또한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면 이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 수립이 되면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국군이 되므로 군인으로서의 매력도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대원들의 동반 입대를 원했다. 그러자 정일권 씨도 흔쾌히 승낙하여 모든 자위대 대원들의 국방경비대 입대 약속을 받았다. 다음 날 나는 임명 면접을 위해 정일권 씨를 따라 중앙청 2층 어느 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 방에는 미 군정청 고문인 프라이즈 대령과 키가 작고 박박 민 머리에 체구가 단단해 보이는 한국인 군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응준 장군(일본군 대좌 출신)이었다. 정일권 씨는 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응준 장군이 나에게 물었다. “학교는 어디 마쳤느냐?” “만주 하얼빈 농대입니다.” 이응준 장군은 몇 마디를 더 묻고는 정일권 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프라이즈 대령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다음 국방경비대 참위(소위)라는 임명장을 나에게 주었다. 임명장 밑에는 ‘국방경비대 고문 이응준’이라는 직인과 프라이즈 대령의 사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로써 나는 정식 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얼빈 농대에 입학할 때 내가 꿈꾸었던 것은 농업관료나 학자였지만 이 참위 임명장은 나의 길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일은 바로 이때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게 되는 분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임명장을 받아 가지고 나오는데 흑감색 상의에 흰 바지, 그리고 상의에는 번쩍이는 금단추가 달려 있는 멋진 마도로스 복을 입은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한 사나이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는 정일권 씨와 아주 친밀한 듯했다. “정형, 큰일났어! 해안경비대에도 사람 좀 보내 줘.” 그러면서 그는 옆에 서 있던 나를 보며 말했다. “좋은 청년들을 몽땅 육군으로만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해?” 나는 순간 해안경비대라는 생소한 이름에 이상한 친근감을 느꼈다.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결정될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분이 바로 다음에 했던 말이었다. 그 분은 나를 보며 말했다. “해안경비대를 아나?” “뭐하는 곳입니까?” “해군이 되는 것인데, 곧 진해에서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야.” 그때 그 말 한 마디, ‘진해’라는 말이 내 마음을 온통 휘어잡아 버렸다. 진해, 초등학교 시절 진해 군항 일본군 함정을 구경하면서 내 작은 꿈을 꾸었던 곳. 여름이면 학교에서 그곳으로 해수욕을 갔고, 진해 탑산에 올라 일본 육전대 훈련을 보며 가슴 설레었던 기억들. 진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정일권 씨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러나?” “죄송합니다. 차마 입이 안 떨어집니다만 진해는 내 고향과도 가깝고, 어렸을 때부터 너무 익숙한 곳이라 그쪽으로 자꾸 마음이 쏠립니다.” 내가 쩔쩔매며 겨우 입을 떼자 정일권 씨는 어이가 없었는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해안경비대에 가고 싶다는 말이지?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렇게 해야지. 단 언제든지 다시 돌아 올 수 있으면 와. 항상 문은 열어두고 있을 테니까.” “정말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군인으로서의 길이 또 바꾸어졌다. 마도로스 복장을 한 사나이는 바로 초대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었다. 그의 부친은 손정도 목사(후일 정동교회)였는데 상해 임시정부 임시 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이승만 대통령과도 막역한 사이기 때문에 이 대통령은 손원일 제독을 친 아들같이 대했다 한다. 손원일 제독과의 만남으로 나의 길이 해안경비대로 바뀌었다. 그러자 자위대 친구들도 모두 나를 따라 해군에 입대했고, 나는 모병된 800여 명의 신병들과 함께 진해로 내려가게 되었다. 반공은 나의 삶이요, 철학이었다 반공은 나의 삶의 일부요, 철학이었다. 이것은 내가 그들(공산군)과 직접 전투를 치루었던 군인이었기 때문에, 혹은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했던 국방장관을 지냈기 때문에 가졌던 입장은 아니다. 육이오 전쟁 시 나는 군인으로서 그들(공산군)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또한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방장관으로서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그들의 적화야욕을 막기 위해 내 모든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반공을 내 삶의 지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 척결에 대한 나의 신념은 좀더 멀리 올라간다. 먼저 나는 공산주의 이론의 허구성을 만주 하얼빈 농대 시절 독파했던 공산주의 저서들을 통해 간파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소유욕을 무시한 채 세워진 이론의 허구성. 공동 소유, 공동 생산, 공동 분배를 주장하는 그 이면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혁명이 있었다.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는 독재체제를 근간으로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여 모든 자유를 부정하는 그 체제가 과연 인간의 소유욕과 기본적 자유를 인정하며 다양한 입장을 포용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우리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수립 후 불과 70여 년 만에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첫째, 구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것부터 공산주의 태동 이론에 대한 모순은 시작된다. 가장 산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투쟁에서 노동자가 승리하여 세워진다는 공산주의가 산업화와는 너무 동 떨어진 농업 사회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폭력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성공했다. 결국 공산주의 성립 이론부터가 모순이었다. 둘째, 나는 신앙인으로서 결코 공산주의를 용납할 수 없다. 신앙인의 양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체제와는 결코 합일될 수가 없었다. 약속의 땅 만주를 버리고 귀국한 것도 사실은 만주가 공산화되어 잃게 되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큰 이유였다. 조부님으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의 뿌리를 지켜야 하는 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 수많은 신앙인의 자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으로라도 공산주의를 막아내야만 했다. 셋째, 나는 만주 고려 자위단 시절에 공산군들의 실체를 체험했다. 나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라는 소련 군대의 만행을 지켜봤기에 그 체제에 대한 실망과 증오를 누를 수가 없었다. 내가 체험했던 소련군은 거칠고 무지했으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나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군율이라는 것도 없었다. 인민의 군대라는 그들이 피난민에게 서슴없이 저지른 금수와도 같은 만행은 과연 공산주의가 어떤 체제인지 젊은 나에게도 여실히 보여 주는 증표였다. 이렇게 해서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일찌감치 정리되었다. 그러나 당시 해방 조국의 상황은 달랐다. 대다수 지방의 경우 공산당들이 득세를 했다. 그 이유는 당시 일부 지식인 계층이 민족의 독립을 외세에 의존하는 것보다 우리 민족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공산주의를 택하게 되었고,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큰 어려움이 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공산주의가 되면 부자들이 소유한 땅과 집을 빼앗아 나누어 준다는 그들의 선무공작에 속아 민주주의 이념은 설명조차 들으려 하지 않으려는 형국이었다. 미 군정 역시 독일, 일본에 맞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소련의 한반도 적화 기도를 우려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사상의 자유까지 억압할 수 없다는 논리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파괴는 막지만 일부 군이나 일반인들이 가지는 공산주의 이론 학습이나 사상을 탄압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군 내부의 공산주의 이론 침투까지 방관할 정도였다. 따라서 당시 군 수뇌부 입장 역시 미 군정청의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유화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공산당 프락치에 의한 군 적화는 독버섯 같이 번져갔다. 그러나 만주와 이북에서 소련군의 만행을 직접 겪었던 나와 자위단 동료들은 누구보다 그들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가 걱정될 뿐이었다. 이러한 때에 나는 마침내 군인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고, 공산주의 척결만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진해에 도착한 나는 먼저 자위단 동료들 절반을 헌병대로 편성했다. 군의 좌익 프락치들의 활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군 수뇌부로부터 군 내의 좌익 척결에 대한 지시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좌익의 발호에 따른 군 내부 동요를 원천부터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헌병대에 심어 놓은 하얼빈 자위단 후배들로부터 군 내부의 동향을 자세히 보고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보고를 받았다. “부대 내의 몇 사람이 밤이면 내무반에서 공산당 이론을 토론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즉시 헌병대 황운서 대장에게 알렸다. “나도 듣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통일정부를 위한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다. 자칫 공산주의 탄압으로 알려지면 회담에 영향을 미친다. 일단 감시만 잘하라.” 하얼빈 농대 선배인 황운서 대장은 만주군 출신으로 귀국 후 해군 헌병대장을 지낸 철저한 반공인사였다. 하지만 당시 미 군정청의 정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해안경비대 창설과 손원일 제독 군 내부의 좌익이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던 혼돈의 시기에 이루어진 해안경비대 창설은 무엇보다 초대 손원일 제독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손원일 제독은 중국 상해 상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해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고, 이에 해군 육성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많은 사람들은 손원일 제독이 귀국 후 상해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아버지 손정도 목사를 따라 정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정치보다는 조국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열정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는 해군 건설에 모든 것을 쏟아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해사위원회라고도 불림)을 1945년 11월 11일, 육군의 국방경비대보다 빨리 진해 구 일본 해군기지에서 창설하였다. 이어 군정청이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를 창설하면서 해방병단은 해안경비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자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해안경비대가 창설될 당시에는 미국의 해안경비대(Coast Guard)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해안경비대는 미 재무성 소속으로 밀수나 마약 단속, 밀입국자와 밀항자 단속, 해난 구조, 등대 부표 관리 등 해안 경찰의 역할을 주목적으로 하고, 전시에는 해군의 일부로 활약한다. 우리 해안경비대도 초기에는 이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창설 시 어려움 중 하나는 해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양국가 일본은 해군 육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국가의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해군 육성을 국가 최고 시책으로 삼은 일제는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도 일본 해군 사관학교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만큼 해군의 역할과 해군강병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국방경비대 창설에는 일본 육사, 만주 군관학교 출신의 많은 인재들이 큰 힘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사로 구한 말 대한제국 육사 생도들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 김석원, 유승열, 이응준, 홍사익 등이 있었고, 정규 일본 육사 출신으로는 이종찬, 김정열, 이형근, 김창규, 유재흥 등이 있었다. 또한 만주군에는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신현준 등이 있었다. 이러한 국방경비대의 풍부한 인적 자원과는 달리 해안경비대는 일본 상선학교 졸업자, 해원 양성소 출신들이 극소수를 차지했고, 대다수는 만주군, 일본군, 광복군 출신이나 민간인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문적인 인원 부족으로 시작한 해안경비대는 일단 서울에서 1개 대대 부대 편성을 하고 내려 갔는데, 대대장 이상렬(만주군 출신), 1중대장은 나, 2중대장은 오명복 소위였다. 진해에 도착하여 본 기본 시설은 그런 대로 충실하였다. 일본 해군들이 사용하던 항만 시설, 조함창, 사령부 건물, 장교 사택, 해군 병원, 야구장, 운동장, 장교구락부 등 부대시설도 있었지만 우리는 신병훈련소를 사용했다. 일본 해군의 주요 시설들은 주로 군정청 시설로 사용하고 있었고, 보급창고는 해안경비대 사령부, 해원양성소 건물은 해사가 각각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 해사 1기를 모집했는데 만주 고려 자위단 출신 중 몇 명이 해사에 입학했다. 그 중백문기라는 친구가 기억난다. 진해 도착 후 훈련이나 편제는 일단 일본 육군식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정규 일본 해군 출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무반 편성이나 당직 담당을 위한 주번사관 등 편제나 훈련 방법, 즉 제식훈련 등도 모두 일본 육군식으로 했다. 하지만 후에 미 육군 고문단이 와서 미국식으로 변경해서 훈련을 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그때 진해항의 총 책임자는 폴란드 출신 미 육군 소령 뽀뽀비치라는 장교였다. 그는 해안경비대 운영에 자문 역할을 했고, 해안경비대의 군정청 예산은 국방경비대 경리장교가 담당했다. 재무관으로 불린 그는 통위부(국방부)에서 파견한 육군 소위로 긴 칼을 차고 일본군의 긴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자못 위엄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국방경비대가 예산 집행까지 담당했기에 해안경비대는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예산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물자가 부족했다. 특히 해방 직후라 군량미는 비축해 놓은 것이 없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미 군정청에서 나오는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어야 했다. 소금만 넣고 끓인 수제비에 질려 나는 지금도 수제비를 싫어한다. 영외 거주 장교에게는 쌀을 배급했지만, 너무 부족해 군량미를 사기 위해 100톤 규모의 잡용선을 타고 전라도 장성, 부안, 고창까지 보급관이 쌀을 사러 가기도 했다. 또 땔감이나 모포가 부족했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얇은 모포 한 장씩만을 덮고 불기 없는 추운 마룻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이러한 보급의 열악함에 불만을 가진 일부 준사관들과 하사관들이 집단 항명 사태를 벌이기도 했다. 그때가 아마 1946년 6월쯤이었을 것이다. 1기 하사관 200~300명이 이 항명 사태를 주도했는데 식사, 복장, 근무 여건 등에 대한 시정 요구를 하고 나선 것이었다. 다행히 좌우익 대립에서 나온 집단행동이 아닌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사태였기 때문에 곧 무마되었다. 하지만 손원일 제독은 그 일을 군의 기강 확립의 기회로 삼았다. 손원일 제독은 신현준 교육대장에게 항명 사태에 참가한 준사관, 하사관들을 특별 정신훈련을 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때 신현준 교육대장 휘하의 교관으로는 나를 포함하여 김정주(일본 상선학교 출신), 최용남(연희대 해병대 소장 예편), 최이현(일본 학병 출신, 후에 월북) 등 네 명이 있었다. 그런데 신현준 교육대장이 나에게 특별 정신교육을 담당시켰다. 나는 이들에게 엄격한 육군식 기초 훈련과 화랑도 정신, 연개소문, 을지문덕, 김유신 장군 등 호국의 역사를 가르쳐 한 달 후에는 절도 있는 행동과 예의가 몸에 배인 군인으로 탈바꿈시켰다. 나는 이들에게 이런 정신교육을 두 번에 걸쳐 실시했다. 만주군 대위 출신인 신현준 교육대장(해병대 초대 사령관, 중장으로 예편)은 귀국이 늦어 나보다 늦게 해안경비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당장 대위 계급을 줄 수 없어 통위부(후에 국방부) 내신을 거치는 동안 일단 견습사관으로 준 하사관 교육대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하는 중 나를 만났다. 그 후로 지금까지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과 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 같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신현준 사령관은 성격이 겸손, 온화, 정직하고 인내심이 강했는데 나보다는 아홉 살 연장이었다. 일찍부터 편모 슬하에서 자랐고, 하얼빈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신현준 사령관은 초등학교 시절, 너무 가난해 점심을 가져가지 못해 다른 친구들이 점심을 먹을 때 혼자 학교 마당을 배회하곤 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일본인 교사가 자신의 도시락을 나누어 주고 그 뒤로 꼭 도시락 두 개를 가져와 그 도시락을 먹으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며 고마운 일본인 교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을 보았다. 어학에 큰 재능을 가지고 있는 신현준 사령관은 유창한 중국어와 일본어 솜씨로 초등학교 졸업 후 일본군 통역으로 지내다가 심양의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는 평소 군사 교재를 열심히 보던 그를 눈여겨 보던 일본 군관이 추천서를 써 주어 입학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해병대 사령관을 지내고 예편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지만 미국 생활의 무료함과 문화적 차이를 견디지 못해 몇 번씩 귀국하고는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의 아들 집에서 노후를 잘 보내고 있다 얼마 전 해병대는 신현준 사령관으로부터 크나큰 선물을 받았는데, 바로 그 분이 평생 모은 돈 1억 원을 해병대 장학회에 쾌척한 것이었다. 우리가 감동받은 것은 본인 뜻도 감사하지만 그 분 자녀들이 아버지의 뜻을 흔쾌히 따라 준 것이었다. 어려운 미국 생활 중 1억 원은 결코 적지 않은 돈일 텐데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큰 사랑을 베푼 신현준 사령관과 그 분 자녀들의 높은 뜻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해병 창설과 수많은 파고를 함께 넘어오면서 더욱 두터워진 서로 간의 신뢰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나와 신현준 사령관의 관계로 잠시 이야기가 비켜갔지만 이 항명 사건 이후 준하사관 교육대에 군사영어학교 출신 14~15명이 입교했다. 군사 영어학교는 미 군정청이 군사 경력자들에게 군사 영어와 군사 지식을 교육하여 미군과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장차 우리 군의 창설요원으로 충원하기 위해 1945년 12월에 창설한 학교였다. 여기 졸업자는 일본 육사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그리고 학병 출신들이었다. 군사 영어학교 출신으로 해안경비대로 지원한 인사로는 고길훈(예비역 소장), 김두찬(5대 해병대사령관), 박원준 등이었고, 후에 해군 제독이 된 남철, 이경원, 한문식(대령 예편) 등이 있었다. 이들은 1946년 12월 해사 1기생들과 함께 소위로 임관이 되었다. 민을 위한 군대, 중국 팔로군에게 얻은 교훈 나는 군인으로서 길을 하나씩 세워 가고 있었지만 해방 조국의 정치상황은 갈수록 혼란스러워졌다. 혼탁한 좌우 대립, 또 민족 진영의 국내 지도자들과 해외파 지도자들 간에 벌어지는 치열한 권력 다툼 등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의 정치적 틈은 갈수록 벌어져 갔고 친일파 척결문제로 대립하여 갔다. 특히 국내 잔류 인사들과 해외 귀국파 인사들 간에는 친일 문제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 예로 국내의 우익계 인사들인 김성수, 장덕수 등이 한민당을 창당하여 자금을 모아 김구 주석을 찾아갔을 때 ‘친일파 돈은 받을 수 없다.’며 문전박대하여 민족 진영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정말 혼돈의 시대였다. 군인의 한 사람으로 나는 갈수록 혼탁해 가는 좌우진영의 갈등을 보며 불현듯 ‘이 나라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몇 개월 전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체험했던 만주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때 중국은 국공합작으로 일제를 쫓아 낸 장개석과 모택동이 내부의 치열한 이념투쟁을 벌이며 내전을 확대일로로 몰고 가고 있었다. 이것을 보며 38선으로 나뉘어져 남과 북이 전혀 합치할 수 없는 이념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 현실도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군이 국민의 군대로서 면모를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깊게 했다. 그 이유는, 군의 승리는 우수한 장비와 병력만으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중국 팔로군(공산군)들이 장개석 군대를 괴멸시키는 과정에서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비록 적이지만, 중국 팔로군은 ‘인민의 군대가 무엇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에게 확실히 심어 준 군대였다. 결코 국민을 경시하는 모습은 없었다. 예를 들면, 한 지역을 점령할 때도 미리 사람을 보내 ‘중공군이 들어온다. 우리는 당신들을 위하는 군대다, 절대 동요하지 말라.’라고 미리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점령하면 먼저 촌장이나 연장자들을 찾아가 ‘며칠 주둔한다. 절대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언약을 하고는 반드시 그대로 실천했다. 팔로군들은 민가에 숙소를 정할 때도 절대 주인의 방을 뺏지 않고 헛간이나 마당에서 잠을 잤고, 군의 필요에 의해 민간인들 물건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차용증을 써 주고 전쟁 후 갚을 것을 약속했다. 농사철에는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떠날 때는 반드시 청소를 하고 떠나 민심을 얻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렇게 민과 밀착한 중공군은 우수한 장비를 갖춘 장개석 군대를 대륙에서 몰아내게 된다.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공산군. 군인으로서 볼 때 이들이 대륙에서 펼친 민과 합동하는 모습은 비록 적이지만 훌륭했다. 나는 이 교훈을 나중 해병대 창설 시 신현준 사령관과 합의하여 해병대 정신으로 활용했고, 실제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 원칙을 고수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암담했다. 해안경비대라는 명칭이 부끄러울 정도로 우리의 장비는 열악했다. 선박이라고 하지만 일본 해군이 사용하다 버리고 간 80~100톤 급의 증기선이 고작이었고, 사병들의 개인화기도 일본군 무장 해제 때 미군이 접수한 99식 소총이었다. 기관총이나 중화기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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