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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WHO, 천연두 완전 퇴치 선언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33차 총회에서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단 한
건의 새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죽음의 사자’에게
인류의 이름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진 순간
이었다.
천연두는 고대 로마에서 군대 내에 집단
으로 창궐, 군인을 따라 수많은 도시를 황
폐화시켰다. 1492년 신대륙 발견 후 아메
리카 대륙에선 100만명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잉카제국과 아즈
텍 문명의 종말을 앞당긴 것도 유럽인이
묻혀온 천연두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18세기 초 영국 사회에서 빼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메리 몬태규 부인
의 얼굴을 곰보로 만든 장본인도 바로 천
연두였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지난 1967년 전세계
에서 1000만명이 발병, 200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엔 1만
여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치료 및 예방에 전기를 마련한 사
람은 영국의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였다.
제너는 소의 질병인 우두에 걸렸던 여자
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근거로 천연두 백신 실험을 했다.
제너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제너의 성공은
인류 의학이 세균 정복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음을 의미했다. 균을 약하게 한 뒤,
사람의 면역성을 높이는 ‘백신’ 예방법의
시발이었다.
이후 백신연구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에서
정교화-체계화됐고, 과학자들은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결핵 등 각종 전염성 질병에
대한 예방백신들을 잇따라 개발해냈다.
▶2009년'조훈현 스승' 후지사와 타계
▶2006년 출산율 1.08명 "인구재앙" 위험
▶2005년 남대문교회 시각장애인
개안수술(총 액 52.571000원 175명)
▶2005년노무현대통령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순방
▶2003년한국 농구의 ‘별’ 전규삼씨 별세
▶2001 년 인도 전역 맥도널드
쇠기름 사용 분 개.
▶1996년팔라우공화국
쿠니오 나카무라 대통령 방한
▶1994년가키누마 센신 스님, 안중근 의사 유품 기증
안중근 의사의 친필 유묵 3점과 관련사진 원본 7점, 한일 강제병합 직전 한국 관련사진 61점이 한국에 기증됐다. 1994년 5월 8일 방한한 일본 가키누마 센신 스님(62. 한-일불교복지협의회 회장)이 이날 조선일보사를 방문, “이들을 소장한 쓰다 고도 스님이 한국정부가 원할 경우 안의사 유묵과 관련 사진, 한국 관계자료 등 총 71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쓰다 스님이 소장한 안의사 관련품은 안의사가 러시아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강에게 보낸 편지, 여순형무소에서 찍은 정면사진, 안의사 시신을 태우고 형장에서 묘지로 가는 마차, 처형직전 여순형무소에서 홍석구신부 등과 면회하는 모습, 총탄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 안의사의 재판 광경, 저격에 사용한 권총사진 등 7점과 ‘민이호학불치하문, 불인자불가이구처약, 계신호기소불도’라고 쓰여진 친필유묵 3점이다.
이들 소장품은 쓰다 스님의 작은 할아버지 쓰다 가이준 스님이 1909년쯤 중국 여순형무소에서 직접 입수한 것으로 사진 원본은 유리건판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쓰다 가이준 스님은 안의사가 복역하고 있을 당시 여순형무소의 포교사로 활동했다.
▶1993년남북한 첫 직교역 실시 -
설탕, 소주 교환
▶1993년1987~1991년까지
부정 입학생 명단 공개
▶1991년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 분신자살
1991년 5월 8일 오전8시 7분경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26세)씨가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자행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김씨가 자살한 것은 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시위진압경찰의 구타로 사망한 후 운동권 학생들이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의미로 분신자살하던 와중의 일이었다.
김기설씨가 분신자살한 직후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씨를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었다는 혐의로 자살방조죄 등으로 기소했다. 유서의 진위를 놓고 정권과 검찰에 의한 사건 조작이라는 재야 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기훈씨는 재판 끝에 실형을 선고받고 3년 2개월간 복역했다.
▶ 1988년 SF 거장 로버트 A.하인라인 타계
“어떻게 하면 서른 살의 머리 나쁜 사람이 열다섯 살의 천재보다 더 현명하게 투표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네….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의 신성한 권리’ 시대에나 있었던 일이야. 신경 쓸 필요는 없네. 그들은 그 우매함의 대가를 치렀으니까.”
우주 전투함을 타고 다른 행성에 투하돼 외계인과 싸우는 기동보병 조니 리코는 장교가 되기 위해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교관은 일정 연령이 되면 누구에게나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라는 황당한 제도가 먼 옛날 지구에서 운영됐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로버트 하인라인이 1959년에 펴낸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의 한 대목이다.
하인라인은 ‘로봇’ ‘파운데이션’을 쓴 아이작 아시모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작가 아서 클라크와 함께 사이언스픽션(SF)의 황금기였던 1940, 50년대 ‘SF의 3대 거장’으로 꼽혔다. 1988년 5월 8일 타계하기 전까지 그는 ‘미스터 SF’로 불렸다.
SF소설 애호가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폴 버호벤 감독이 1997년 만든 동명의 영화에서 곤충형 우주생물과 기동보병들이 참혹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다.
하인라인이 이 책에서 그린 미래의 지구는 일종의 군국주의 사회다. 군대에 지원해 2년 이상 복무한 사람에게만 ‘시민’ 자격이 주어져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얻는다. 범죄자는 등을 채찍으로 때리는 형에 처한다. 이런 내용 때문에 하인라인은 파시스트라는 일부의 비판을 받았지만 책은 과학소설계의 최고상인 ‘휴고상’을 받았다.
성공적인 SF 작가들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클라크는 1940년대에 ‘통신위성’의 개념을 미리 창안했고, 아시모프는 ‘로봇 3원칙’을 고안했다.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기동보병이 입는 ‘강화복(powered suit)’도 이처럼 탁월한 아이디어였다. 강화복 아이디어는 이후 수많은 SF 소설과 건담 시리즈 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확대재생산됐다. 미군이 개발하고 있는 미래형 보병장비도 하인라인의 콘셉트에서 출발했다.
▶1985년카프(KAPF)의 실질적 지도자인
팔봉 김기진 사망
▶1984년소련 LA올림픽 불참 선언
▶1981년한국-일본 의원연맹 재구성
▶1980년자원개발연구소,
충북 옥천서 우라늄광 발견 발표
▶1979년미국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 사망
▶1973년레바논 군사정부 수립
▶1973년어버이 날 제정
▶1972년해방후 처음으로 일본인 학교,
유치원 서울에 개설
▶1972년닉슨 미국 대통령,
북베트남 모든 항만에 대해 기뢰봉쇄 선언
▶1954년인도지나 문제를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개막
▶1951년국회 정-부의장 개선
(의장 신익희)
▶1948년국제적십자의 날 제정
▶1945년트루먼 미국 대통령,
무조건항복을 권고하는 대일성명 발표
▶1945년자렛 출생 - 20세기 후반의
가장 독창적이고 활동적인 재즈 음악가
▶1945년알제리아에서 반프랑스 폭동
▶1939년스페인 국제연맹 탈퇴
▶1936년독일 역사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사망
막연하긴 했지만 유럽인들은 20세기를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맞았다. 세기 초 10여년간 유럽 전역을 감싸안은 평화와 번영은 20세기 역시 그들의 시대임을 알리는 예고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발발, 전쟁은 길어졌고 상처는 깊어만 갔다. 기존의 제도를 불신하기 시작했고 유럽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절망한 유럽인들은 서구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18년 7월, 지극히 비관주의적인 관점에서 서구문명의 몰락을 예언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제1권이 출간됐다. 2권은 1922년에 출간됐다.
세계사를 이집트·인도·중국·그리스·로마 등 9개의 유기적인 문화권의 흥망성쇠로 분석하면서 서유럽과 미국 문명도 결코 흥망성쇠의 사이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리스·로마가 몰락할 때의 징후가 서구문명에서도 발견되므로 결국 서구의 몰락은 운명적이라는 내용이었다.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유럽인들에게는 서구문명의 종착점이 분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사람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지만 정통학자들은 이를 외면했다. 슈펭글러가 고대, 중세, 근대라는 기존의 3단계 역사 구분방식을 단선적이고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못마땅한 데다 그의 사료 취급방식이 부정확하고 표면적인 정보에만 의지했다는 것이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난 슈펭글러가 젊어서 철학, 역사학, 수학, 예술 등을 두루 섭렵하고 저술에만 전념하기 시작한 것이 1911년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서구의 몰락’ 이후 한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기울어 1933년에 출간된 ‘결정의 시각’에서는 의회제·민주주의·사회주의·유색인종 등을 맹렬히 비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치가 그의 페시미즘(비관주의)을 인정하지 않고 그 역시 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나치와 멀어져 말년에는 고독과 불우한 생활을 보내다 1936년 5월 8일 뮌헨에서 56세로 생을 마쳤다.
▶1931년세계최초의 TV 야외방송,
런던에서 시작
▶1926년영국의 방송인,
작가 애튼버러 출생 - 혁신적인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으로 유명
▶1923년영화배우 허장강 출생
▶1922년김수환 추기경 출생
▶1911년영국 청국 아편 협정 체결
▶1903년프랑스 화가 고갱,
남태평양의 섬에서 심장병 발작으로 사망
원시를 꿈꾸다, 폴 고갱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1848~1903)은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과 함께 20세기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 꼽힌다.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고갱은 강렬한 색채의 실험으로 ‘종합주의’를 선도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00년대 후반 고갱의 모습
[타히티의 여인들] 1891
페루와 프랑스에서 보낸 유년기
고갱은 저널리스트 클로비스 고갱(Clovis Gauguin)과 페루계 사회주의자(플로라 트리스탄)의 딸인 알린느 마리아 샤잘(Aline Maria Chazal)의 사이에서 태어났다(프랑스 파리). 1851년에 당시 파리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페루로 가던 중 고갱의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고갱과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페루의 리마에서 외삼촌과 함께 4년을 살았다. 이곳에서의 이미지들은 훗날 고갱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1854년 무렵 고갱과 그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 오를레앙에 정착했고, 고갱은 이곳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1865년 17살이 되었을 때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수습 도선사(사관후보생)가 되어, 약 6년간 상선(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고갱은 인도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파리로 돌아와,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친구가 마련해 준 증권 거래소의 점원 일을 하게 된다. 고갱은 1873년에 덴마크 출신의 메테 소피 가트(Mette Sophie Gad)와 결혼하여 10여 년 동안 5명의 아이를 낳았다.
작품 수집가로 시작한 초기 활동
고갱은 결혼 이후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고, 이 무렵부터 그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 작품들을 많이 수집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후견인이었던 어머니의 친구 구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작품 수집까지 하게 됐다. 그는 갤러리를 빈번히 다니면서 당시 떠오르는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였다. 이 즈음의 고갱은 작품을 구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그리기도 하였으며, 27세 무렵에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 연구소에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다. 1876년에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카미유 피사로를 알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의 제5회 인상파전 이후로는 주요 멤버가 되었다.
[고갱 부인의 초상화] 1880~1881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로 고갱의 직업은 불안해졌다. 이때 고갱은 화가가 되기 위해 피사로와 의논하게 되고, 피사로의 소개로 폴 세잔, 아르망 기요맹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확실하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35세가 되던 1883년부터는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고, 생활비가 저렴한 루앙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고 그의 처가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파리로 혼자 돌아온 이후로는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 생활은 여전히 가난의 연속이었고 고갱은 벽보 붙이는 일을 하며 연명해갔다. 1886년의 제8회 마지막 인상파전에 고갱은 무려 열아홉 점의 작품을 출품했지만, 불행하게도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등 신인상주의 화가들의 빛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도시생활에 지친 그는 1886년 6월, 브르타뉴(Bretagne)의 퐁타방(Pont-Aven)으로 이사하여 그림에 전념하였다. 퐁타방의 주민들은 프랑스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으며 화가의 모델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퐁타방을 즐겨 찾았다. 이곳에서 고갱은 종래 인상파풍의 외광묘사를 버리고 차차 특유의 장식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토속적인 토기류 제작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나중에 폴 세뤼지에, 모리스 드니, 피에르 보나르 등의 나비파(Nabis)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와의 만남
고갱은 퐁타방에서 알게 된 샤를 라발(Charles Laval)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 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흑인들의 집에 거주하고 그들의 일상을 지켜본 고갱은 즐겁게 지냈지만, 그곳의 여름은 너무나 더웠고 거주지는 비에 젖어 기울어졌으며 설사병과 열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때 제작된 약 10여 점의 원시주의적 미술 작품들은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화상(畵商)인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는 고갱의 작품에 큰 감동을 하여 고갱과의 거래를 시작했다. 테오와의 만남을 통해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수확을 얻은 고갱은 더 이상 자연을 미화하며 재현하는 따위의 그림은 그리지 않고, 사물을 자기 방식대로 단순화시키며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에서 지내며 고흐와 툴루즈 로트렉 등을 알게 되었고, 특히 고흐와의 우정은 특별했다. 테오의 주선으로 고흐가 머물고 있는 아를(Arles)의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고흐는 브르타뉴에서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하고 있었고, 화가들은 함께 모여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프랑스의 아를에 노란 집을 만들어 화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테오로부터 생활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받아 아를로 행한 고갱은 고흐와의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과 대립을 겪었고, 급기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둘은 헤어졌다.
고갱은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 판화, 도기 제작에도 전념하였다. 고갱은 에밀 베르나르, 샤를 라발(Charles Laval) 등 다른 작가들과 함께 퐁타방을 더욱 빈번히 왕래하였고, 이때 퐁타방파라고 불리는 강한 순색의 사용과 그림에 주제를 선택하는 상징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퐁타방 또한 매우 번잡하게 느껴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황색의 그리스도] 1889
2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9
[황색의 그리스도]는 고갱이 한 성당에서 본 나무 십자가의 예수상을 스케치하여 그린 것이다. 노란색의 예수 모습과 배경, 단풍이 든 것처럼 붉게 채색된 나무 등 전체적으로 매우 단순화된 작품이다. 십자가 주변에는 묵상하는 세 여인이 그려져 있으며, 이들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이다. 이 그림 속에서 푸른 빛의 색을 제외하곤 원근감의 표현은 아예 없다. 단지 배경을 구분 짓기 위한 윤곽선이 있을 뿐이다. 평면, 강렬한 색채, 대담한 윤곽선으로 구성된 황색 그리스도는 고갱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인상주의와의 결별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889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시에서는 공식행사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 전시에 고갱의 참가를 거부했다. 이에 고갱은 전시장 건물 앞 볼피니 카페를 빌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 그룹전을 열었다. 이는 박람회에 참여하지 못한 불만을 시위하는 장이었다. 피에르 보나르, 에두아르 뷔야르, 그리고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이욜까지 참여한 이 전시회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림의 내용 자체가 인상주의와는 거의 무관한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와 종합주의’는 고갱이 인상주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붙인 전시 제목으로 인상주의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장이기도 했다.
‘종합주의’란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외형적 현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자신의 경험을 종합하여 가시적인 세계가 아닌 감추어진 세계를 회화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강렬한 색과 굵은 선, 단순화된 형태를 주관적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는 경향으로 고갱의 사상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 종합주의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나비파 화가로 소개되며, 시인 앙리 카잘리스가 붙인 ’나비파’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나비 즉 ’예언자’를 뜻하는 것이다. 고갱은 색의 음영과 농담의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색채만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이러한 고갱의 이론은 인상주의가 한계를 드러내며 해체되자 젊은 화가들을 매료시켰지만, 일반인들의 관심은 끌지 못했다.
[설교 후의 환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
타히티의 이국적인 매력에 흠뻑 빠진 고갱
고갱은 박람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삶을 동경하였다. 각국 민속관들 중에서 자바의 민속관은 고갱으로 하여금 이국적인 매력에 흠뻑 빠지게 했다.
고갱은 파리에서의 힘든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올해는 그토록 힘겹게 싸웠건만 파리의 조롱 말고는 소득이 없네. 여기서도 그들의 조롱이 내 귀에 들리고 있네. 너무 절망스러워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정도라네.”라며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
고갱은 산업문명으로 썩은 서양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작품을 공매 처분하려고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일반인들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갱은 코펜하겐에 있는 가족을 찾아가 잠시 만난 뒤, 꿈에 그리던 남태평양 타히티의 파페에테 섬으로 간다. 무려 두 달을 걸려 찾아간 파페에테 섬은 이미 문명의 때가 묻어 있어 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후 고갱은 문명의 흔적이 거의 없는 섬을 찾다가 마침내 그가 원하던 곳인 마타이에아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열세 살의 원주민 테하마나(테후라)라는 소녀와 동거한다. 고갱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 테하마나는 고갱이 찾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폴리네시아인이었다. 그는 테하마나와 같이 지낸 기간 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에 빠져들었고 행복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송금이 오래전에 끊겨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이 한 점도 팔리지 않은 것이다. 물감 값이 떨어지자 그림은 엷어졌고, 그는 이런 현실을 두고 “고통이 천재성을 고무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 심할 때에는 천재성이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다.”라며 자조하였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아베 마리아)] 1891
고갱은 파리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고 그림 그리는 일도 접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작품을 호평했던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Albert Aurier)와 고갱의 작품을 거래하던 유일한 화상인 테오도르 반 고흐의 죽음으로 고갱이 기댈 곳은 없어진 셈이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시련의 시기 동안 엄청난 창작욕에 불탄 고갱은 무려 80점이나 되는 작품을 그렸다.
대작의 탄생과 불행했던 말년
1893년 고갱은 테하마나를 남겨둔 채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타히티의 삶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삽화를 곁들인 수필을 쓰기도 했다([노아 노아]). 그러나 전시회는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했고, 만신창이가 된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1895년, 파리의 리옹 역. 고갱은 짐에 걸터앉아 울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한 자신을 뒤돌아 보며 그는 울고 있었다. 타히티가 지상의 낙원이라고 큰소리쳤지만 그와 동행하려는 동료화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고갱은 아내로부터 돈을 빌려, 다시 타히티의 푸나아우이아로 가서 타히티 전통가옥을 짓고 살았다.
그의 육체는 점점 병들어갔다. 거듭된 음주로 저항력이 떨어져 매독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피부에 난 뾰루지로 인해 나병 환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 시기에 고갱은 입원과 퇴원을 수없이 반복했다. 14세의 원주민과 동거를 하였지만, 가난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갱은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자살하기 전에 유언과도 같은 유작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여 그린 대작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이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친구 몽프레(Daniel de Monfreid)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12월 한 달 동안 유작으로 대작을 그려보기로 했네. 미친 듯이 그렸네. 사람들은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지금껏 그린 것 중에서 최고이며, 앞으로도 이 그림과 비교할 만한 작품을 그릴 자신이 없네. 작품 구상이 워낙 뚜렷해 어느덧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네. 그림 상단의 양쪽 귀퉁이는 연노랑으로 칠하고, 위의 양 귀퉁이가 손상된 프레스코 벽화처럼 말이야. 나는 이것을 걸작으로 본다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우리는무엇이며,어디로 가는가?] 1897
이 작품은 삼베에다 그려서 매우 거친 질감으로 느껴진다.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는 듯 넓게 펼쳐진 풍경에는 여러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고갱은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그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붓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작품을 그의 추종자 모리스 드니에게 보냈지만, 여덟 점의 작품을 판 돈으로 불과 1,000프랑 밖에 받지 못했다.
남은 삶을 보낸 타히티 섬에서 그린 그의 작품들은 다분히 종교적인 상징주의와 폴리네시아의 이국적인 시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감각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사물을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려 했다. 무엇보다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점은 이후 20세기 미술의 수많은 화가들-앙리 마티스, 피카소, 뭉크, 알베르 마르케,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 모두 고갱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갱은 190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당시 고갱을 후원하고 있었던 화상 아브루아즈 볼라르는 사망 몇 달 후 추모전을 열었고, 이어 3년 뒤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여 고갱의 명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1902년경의선(서울-개성) 기공
▶1886년 코카콜라 시판
1886년 5월 8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시의 약국에서 한 시럽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물 코카콜라의 탄생이었다.
콜라 판매 비수기인 겨울철을 위해 코카콜라가 내세운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
코카콜라의 원래 이름은 코카와인(cocawine)으로 애틀랜타시의 존 펨버튼 박사가 1886년 우연히 발명한 시럽 덕분에 탄생했다. 당시 시럽에 탄산을 섞어 친구들에게 권하자 새롭고 상쾌한 맛이라는 반응이 쏟아졌고 이에 고무된 펨버튼이 얼마 뒤 약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이어 경리사원의 권유에 따라 시럽의 이름은 코카콜라(Coca-Cola)로 개칭됐다.
5월 29일자 '애틀랜타 저널'에는 코카콜라의 첫 광고가 실렸다. "코카콜라 맛있다! 상쾌하다! 활기를 준다! 기운을 북돋운다!"는 문구였다. 이후 펼쳐진 코카콜라 마케팅의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코카콜라는 옥외광고의 원조이기도 하다.
시골 약국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한 사람은 캔들러였다. 1887년 펨버튼이 죽자 2,300달러에 일체의 권리를 사들인 캔들러는 오늘의 코카콜라를 만든 장본인이다.
캔들러는 시럽 개선 실험에 착수해 '7X'라는 첨가물을 만들어냈다. 7X는 지금까지도 제조방법을 비밀에 붙이고 있는 첨가물이다. 독특한 곡선미로 여체를 연상시키는 코카콜라 컨투어(등고선)병은 1915년에 디자인됐다. 당시 백과사전에 수록된 코코넛의 일러스트에서 힌트를 얻어 밋밋하고 직선적이던 병에 세로 선을 넣어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의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이미지도 코카콜라가 만들어낸 것이다. 음료수 비수기인 겨울철만 되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코카콜라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창조한 광고모델이 바로 빨간 옷의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였다. 그전까지 산타는 굴뚝을 드나들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요정처럼 묘사됐었다 .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단어로 'OK!'에 이어 '코카콜라'가 2위에 랭크됐다고 한다.
마케팅의 갑중의갑 best of best
1. 현지화
자극적인 맛에 걸맛게 각 현지의 자극적이거나 유명한 스타 섭외. 자극적인것도 복싱선수정도
국내에선 2pm이 광고
2. 동심을 통한 어린이 팬 유도
북극곰, 산타할아버지
3. 앤디워홀
캠밸 뿐 아니라 코카콜라 브랜딩에도 지대한영향을 끼친 팝아티스트
4.병 디자인
100년동안 같은 검빨 형태
잡기 좋고 눈에 들어오는 호리병모양
주기적으로 나오는 스페셜 에디션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골수팬 형성
현지화와 비슷하지만 국내의 예로 들자면
슈퍼스타k 스페셜 에디션
코카콜라의 예상대로 한정판 출시가 아니여서
방송이 끝난후 곧바로 대형마트행~~
5. 올림픽, 월드컵 등 문화,스포츠 국제행사에 매번 서포터즈
6. 기프트컵 배포
7. 코카콜라가 만드는 음료수
환타, 조지아커피, 미닛메이드, 닥터페퍼, 사이다
▶1828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출생
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이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본래 사업가였던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지역을 여행하다가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전투에서 부상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전쟁과 재해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국제구호단체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1864년 12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제네바 협약’을 채택ㆍ조인하면서 적십자운동이 시작됐다.
제1회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했던
앙리 뒤낭.
그는 결국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파산했고, 그 뒤 1867년 제네바를 떠나 가난하게 살았으나 계속해서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 노예제도 폐지, 국제적 중재, 무장해제, 유대인 국가수립을 위해 힘썼다.
뒤낭은 1901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최된 제1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적십자 운동의 공로로 ‘제1호’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벨상의 수상 시비는 첫 해부터 계속돼, 뒤낭의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노벨의 유언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난을 받았다. 뒤낭이 한 일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어루만지면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전쟁을 인간화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은 평상시 재난구호와 취약계층 지원을 주 임무로 하는 국제적십자연맹(IFRC)과 무장충돌지역의 희생자 보호지원을 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그리고 IFRC의 179개 회원국이 3대 축을 이뤄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황제 칙령 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하면서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으며, 1949년 대한적십자사조직법이 공포되면서 오늘의 조직에 이르고 있다.
▶ 1800년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 러벳 출생 - 선거개혁을 요구하는 `인민헌장`(1838)의 초안 작성
▶ 1788년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흥망사` 전6권 완간
▶ 1660년 영국 왕정복고
▶ 1442년 측우제도 실시
https://youtu.be/fxtUxjlNQHQ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