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지 사랑만 하고 미워할 수 없다면 그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다. 진정한 사랑은 열정이 된다. 이 '열정'이라는 단어는 아름답다. 열정은 강렬하다. 사랑은 어떻게 열정이 되는가?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의 자비는 무능하다. 그는 무능하다.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는 미워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다. 미움이라는 감정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때, 거기에 열정이 있다. 이때 배경과 형상이 조화를 이룬다. 하나의 게쉬탈트가 형성된다. *드러난 것보다 숨은 조화가 훨씬 낫다. 이것이 종교적인 사람과 도덕적인 사람의 차이점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표면적으로만 조화롭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중심에서 조화롭다. 종교적인 사람은 모순될 수밖에 없다. 반면, 도덕적인 사람은 항상 일관되다. 도덕적인 사람은 믿을 만 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도덕적인 사람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예수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어떻게 행동할지 점칠 수 없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예측을 불허한다. 그는 사랑에 대해 말하는 한편, 사원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르며 환전상들을 내쫓았다. 그는 자비에 대해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사원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는 혁명적이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그는 아주 일관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버트란트 러셀은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의 일관성 없는 태도를 꼬집고 있다. "예수는 일관성이 없다. 그는 신경증 환자 같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화를 낸다.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무에게도 화를 낸다. 그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배가 고픈 상태에서 무화과나무를 지나갔다. 그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계절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았다. 이때 예수는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퍼부었다. 무슨 인간이 이런가? 이런 그가 사랑을 말한다고?" 예수는 숨은 조화를 갖고 있다. 하지만 러셀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는 현대판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의 내면에 깃든 숨은 조화를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러셀이 기독교인이 안된 것은 잘된 일이다. 아주 좋은 일이다. 그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도덕주의자다. 모든 행동이 일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과의 일관성인가? 누구에 대한 일관성인가? 누구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가? 과거와의 일관성? 내 말이 다른 말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강물이 흐르지 않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강을 보라. 강은 때로는 오른 쪽으로 굽어지고, 때로는 왼쪽으로 굽어진다. 때로는 남쪽으로 가고 때로는 북쪽으로 간다. 그대의 눈에는 이 강이 아주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숨은 조화가 있다. 강물은 바다에 도달한다. 강물이 어디로 가든 바다가 목적지다. 강물은 때로는 남쪽으로 간다. 땅이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때로 강물은 북 쪽으로 간다. 땅이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방향으로 가든 강은 똑같은 목적지를 지향한다. 강물은 언제나 바다를 향한다. 그리고 결국 바다에 도달한다. 강물이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항상 남쪽으로 갈 것이다. 내가 북 쪽으로 가면 사람들이 나를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다." 이 강물은 결코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러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강물은 결코 바다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일관적이다. 너무 표면적이다. 그들은 숨은 조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대립되는 것들을 통해 똑같은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대립되는 것들을 통해 동일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해 그들은 아는 게 없다. 전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