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에서 그렇지만, 아무리 우수한 자질을 갖춘 선수일지라도 그 포지션에 기존의 검증된 선수가 있을 경우에는 출전 기회를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생긴지도 벌써 2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연습생 신화를 이룬 장종훈과 김상진, 송유석, 이동수 등 고졸 신화나 무명 신화를 이룬 선수들도 있지만, 반면에 제대로 된 기회 한번 가지지 못하고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간 선수들은 더욱 더 많다.
1983년 프로야구가 2년째 되던 해에 고교야구에서는 미사일타선으로 무장한 무명의 팀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팬들의 관심을 받았다. 바로 1981년 창단한 포철공고가 그 주인공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북고와 상원고(전 대구상고)라는 양강이 지배하고 있는 대구를 제외한 경북은 야구 불모지라고 할 수 있다. 포철공고에 이어서, 1982년에 경주고가, 1983년에는 경주상고(후에 해체됨), 2003년 10월에는 구미전자공고가 야구부를 창단하였다. 당시 포철공고는 제2의 장효조로 불리면서 각광을 받았던 정성룡과 고교 최정상급의 유격수 최해명, 한 방이 돋보였던 슬러거 염창무, 정확한 타격을 자랑한 김성범 등 최강의 타선과 유명선, 정윤수 등 좌우 쌍두마차가 마운드를 이끌었다.
이 해 고교야구는 군웅활거의 전국시대였다고 할 수 있었다. 전국시대라고 해서, 돋보이는 선수가 없는 고만고만한 선수들이 활거한 것이 아니라, 내놓으라 하는 영웅들이 넘쳐 흘렀다. 1학년 때부터 전국을 호령했던 조계현과 장호익 콤비가 돋보인 군산상고를 필두로, 야구 천재 박준태와 문희수, 김선진, 김성규, 이강철 등 호화 멤버를 자랑한 광주일고, 투타에서 자질을 보인 송진우 등의 세광고, 박동희와 현남수, 이석재, 유동효 등을 앞세운 부산고, 초고교급 좌완투수였던 김기범의 충암고, 문병권 등의 전통의 명가 경북고 등 어느 팀이나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강호들 속에서 포철공고는 모기업인 포항제철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타선을 앞세워서, 청룡기대회에서 조계현을 앞세운 군산상고를 13 : 4로 대파하고, 창단 3년만에 처음으로 전국대회 결승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에서는 2학년 트리오 - 진정필, 구동우, 김길선 등의 마운드가 돋보였던 천안북일고로, 타선이 강한 포철공고였기에, 창과 방패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전체적으로 투타에서 앞선 포철공고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경기는 팽팽한 투수전이 전개되었다. 결국, 김길선과 진정필 등의 역투 속에 짜내기로 이 경기의 유일한 득점을 올린 천안북일고가 1 : 0으로 포철공고를 제압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포철공고로서는 첫 결승 진출에 따른 심리적인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절치부심하던 포철공고는 고교야구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인 봉황기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다시 한번 결승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의 상대는 문희수와 이강철 등의 마운드와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던 박준태, 김선진, 서창기, 정영진, 김성규 등 투타에서 가장 안정된 전력을 자랑하던 광주일고였다. 두번의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포철공고의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김성규의 신들린 수비 등으로 또 한번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전국체전에서도 광주일고에 패배하면서, 포철공고는 화려한 멤버를 가지고서도 준우승만 3번을 기록하는 불운에 울었다.
살인 타선으로 야구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포철공고의 주력 멤버들은 졸업과 동시에 뿔뿔히 흩어졌다. 최해명은 연세대로, 이영민 타격상을 받은 김성범은 고려대로, 염창무와 정윤수는 경남대, 유명선은 계명대 등으로 진학하였다. 특히, 제2의 장효조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던 정성룡은 전국대회 3관왕을 차지한 광주일고의 문희수와 최동원 이상의 재목으로 손꼽히던 경남고의 조용철 등과 함께 대학이 아닌 바로 프로로 직행한 최초의 선수들이 되었다.
정성룡은 초고교급 타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지역의 연고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였지만, 당시 삼성의 외야에는 장효조, 장태수, 허규옥, 정현발, 홍승규, 황병일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결국, 큰 기대와는 달리 정성룡은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였고, 또한 당시에는 - 지금이라고 해도 변함이 없지만, 2군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였기에 허송세월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대학이 아닌 프로행에 나선 정성룡은 졸지에 강태공이 되어서, 방망이로 세월을 낚을 수밖에 없었다.
Year |
입단 |
퇴단 |
1985 |
이해창(MBC) |
박찬(빙그레) |
1986 |
구윤, 최무영(이상 신인) |
황병일(빙그레) |
1987 |
- |
정현발, 이해창(이상 청보) |
1988 |
- |
- |
1989 |
나광남, 강종필(이상 신인), 김용철(롯데) |
장효조, 허규옥(이상 롯데) |
한시대를 장식한 장효조와 허규옥, 장태수, 김용철, 홍승규, 구윤 등에 밀려서 정성룡은 프로에서 기대와는 달리 대타로 간간히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기약없는 벤치 멤버와 2군 생활에 늘어난 것은 몸무게 뿐이었다. 한 때 제2의 장효조라는 칭호가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는 포동포동 살찐 정성룡은 제2의 정동진으로 불리기 조차 하였다. 1991년 77경기에 출전해서, 타율 0.295 등을 기록하면서, 마침내 자리를 잡는가 싶었지만, 불안한 수비와 다시 빈타에 허득일 뿐이었다. 윤용하와 동봉철 등의 입단으로 좌타자라는 장점도 없어진 정성룡은 1993년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해태로 이적한 1993년에는 개인 최다인 107경기에 출전하기도 했지만, 빈약한 수비력과 파워가 없는 타격의 정성룡은 1995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초고교 타자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의 쓸쓸한 퇴장을 바라보면서, 그가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행이 아닌 대학을 거쳤다면 어땠을지라는 결과론적인 생각이 든다. 정상적으로 대학에 갔다면, 그는 1988년에 프로에 입단할 수 있었고, 그 때라면 세대교체에 들어간 삼성의 외야진이기에 좀 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고교 졸업 후 프로행 3총사였던 문희수와 조용철도 정성룡과 마찬가지였다. 1988년 한국시리즈 MVP와 10승 이상을 2번(1985년과 1992년) 등을 기록하는데 머문 문희수도,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인상적인 투구를 보이기도 한 조용철은 1984년과 1985년 단 2년간 단 2경기에 등판해서, 승패 없이 방어율 7.71 등을 남기고 야구판에서 멀어졌다.
정성룡이 성급한 프로행이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면, 최해명은 정말 불운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대학에서도 최정상급 유격수로 이름을 날리던 최해명은 졸업하던 1988년 올림픽 대표로 뽑혀서, 팔자에도 없이 송진우와 함께 올림픽용 실업팀인 세일통상의 유니폼을 1년간 입을 수밖에 없었다(세일통상이 1년도 버티지 못하면서, 무적 선수 - 정확하게 말하면, 야구협회 소속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타력과 수비력에서 평균 이상의 재능을 가진 최해명이었지만, 삼성의 내야진은 그가 비집고 들어갈 바늘의 빈틈도 없었다.
견실한 수비력의 대명사인 김용국과 말이 필요없는 유중일에 타격이나 수비력에서 한 수 위의 기량을 가진 강기웅으로 짜여진 내야였기에, 최해명은 강영수 등과 함께 국가대표출신 백업 멤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간간히 출전 기회 속에서도 최해명은 1989년에는 타율 0.276, 1990년에는 타율 0.272 등을 기록하는 등 매서움을 보였지만, 정경훈과 박규대 등이 대두하면서, 1992년에는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될 수 밖에 없었다. 프로야구판에서 막장이나 마찬가지였던 쌍방울에서도 과거의 명성을 보이지 못한 채 최해명도 1993년을 끝으로 정든 유니폼을 벗었다.
1983년 포철공고를 대표했던 정성룡과 최해명은 중도에 야구를 접거나 프로구단으로 지명조차 받지 못한 김성범이나 염창무 등에 비하면, 그래도 프로에서도 뛰었기에, 행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은퇴 후 최해명은 연세대에서 코치를, 정성룡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강릉고의 감독을 하기도 하였다. 사실 프로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선수는 수 없이 많다. 초창기에 대학이 아닌 프로행을 택한 선수들로 한정해도, 1984년의 3총사와 박형렬, 김종철, 김승관 등이 있었고, 게다가 수 많은 선수들이 연습생이라는 신분으로 신화를 꿈꾸다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고교 졸업 후 프로에 뛰어던 유현진이 신인왕과 MVP를 동시 석권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그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지만, 흐릿한 기억 속에 입안으로 맴돌고만 있다.
유니폼을 벗은 후 야구를 떠나서 영업사원으로, 공사판을 전전하거나 소식 조차 알 수 없는 그들에게 영광이 함께 하기를 ... ... ...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그런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만의 야구를 알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첫댓글 현남수 선수가 진짜 그 현남수 선수야?? @_@
응 ㅋㅋ 현재 하남리틀야구 감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