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전 스님의 본생담으로 읽는 불교
16. 함사 본생(‘본생경’ 502번)
좋은 도반이 곧 청정한 삶…목숨 거는 의리 있어야
사냥꾼 그물에 걸린 거위왕 다타랏타
끝까지 옆에서 지킨 수무카 거위는
술 취해 부처님에게 돌진하던 코끼리
목숨 걸고 막아선 아난다의 전생
의리 지킨 공덕으로 좋은 스승 만나
‘절반의 경' 등 여러 경전서 거듭 강조
아잔타 석굴 17굴 모서리 벽의 함사 본생. 날아가는 거위들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부처님께서 라즈기르(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 술 취한 코끼리가 부처님을 향해 돌진한 적이 있었다. 데바닷다가 마가다국의 왕인 아자타샤트루왕의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인도에는 코끼리를 전투에 많이 사용하여 코끼리 군대를 만들곤 하였는데, 코끼리들을 이용하여 전쟁을 치를 때에는 코끼리들에게 술을 먹여 싸움터에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데바닷다가 부처님을 시해하기 위하여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때 부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앞을 아난존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가로막았다. 그러나 술 취한 코끼리는 부처님 앞에 다다르자 무릎을 꿇고 순종하였다. 이를 취상조복(醉象調伏)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팔상전에 있는 팔상성도에 대비되는 인도 팔상(八相) 중 하나에 속한다. 인도 팔상에 따라 인도의 8대 성지가 정해져서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있는 것이다.
아난존자의 목숨을 건 행동에 대해 부처님께서 과거에도 아난존자가 그런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거위로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인 함사 본생담이다. 아잔타 석굴 2굴과 17굴에 그려져 있다. 17굴 모서리 벽의 그림에서 거위들이 날아가는 모습은 매우 역동적이다.
옛날 바후풋타카왕이 바라나시에서 나라를 다스릴 때, 황금 거위가 법문하는 꿈을 꾼 케마 왕비가 그 꿈을 실현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황금 거위의 꿈을 꾼 왕비는 왕에게 그 소원을 말하고 왕은 왕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케마라고 이름 붙인 연못을 만들고 사냥꾼을 불러 황금 거위를 잡게 한다.
거위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잘 기른 연못을 설치하고 기다리자 거위들이 연못에 날아들게 된다. 치타쿠타산에서 9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살던 거위왕 다타랏타는 거위들과 함께 이 못에 날아들었다가 덫에 걸려 매달려 있게 된다. 다타랏타는 거위들을 모두 도망하게 하였다. 그러나 수무카가 도망가지 않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고 다음 게송을 외웠다.
‘덫의 지배에 있는/ 오직 하나 나를 돌보지 않고/ 우리 일족들은 다 달아났나니/ 너만은 왜 뒤에 남아 있느냐?/ 날짐승 중에서 뛰어난 이여, 날아가라./ 포박된 자와의 우정은 없다./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머뭇거리지 말고/ 수무카여, 빨리 달아나라.’
그러자 수무카는 진흙 위에 앉아 다음 게송을 읊었다. ‘다타랏타여, 너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나는 너를 버릴 수 없다./ 나는 살거나 죽거나/ 너와 함께 있으리.’
이때 사냥꾼이 도망가지 않는 거위 수무카에게 묻는다. ‘저 거위 무리들은/ 두려움에 쫓기어 다 달아났다./ 황금색 가진 자여/ 너만 여기 남았구나// 하늘을 나는 저 새들은/ 먹고 또 마시면서/ 그를 돌보지 않고 날아갔나니/ 너만 남아 그를 섬기는구나.’
수무카가 대답했다. ‘저 새는 우리 왕, 우리 동무/ 우리의 벗으로서 내 목숨과 같다./ 그러므로 내 목숨 마칠 때까지/ 나는 저 새를 버리지 못한다.’
사냥꾼은 이 말을 듣고 “왕에게서 받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면서 다타랏타를 강가로 데리고 가서 덫을 풀어주면서 “벗이여, 이제 그대는 마음대로 가라”하였다. 다타랏타는 어디로 갈지 숙고하고 나서 “사냥꾼이여, 오늘 우리를 저 왕에게 데려다 다오”하였다. 사냥꾼이 그들을 왕에게 데리고 가니 왕은 기뻐하여 두 마리 백조를 황금 자리에 앉힌 뒤에 꿀을 바른 곡식을 먹이고 꿀물을 타서 마시게 하고는 합장하여 설법을 청했다.
다타랏타는 왕에게 왕의 행복과 건강, 대신들, 왕비, 자식들의 안부를 물은 뒤에 백 한 명의 왕의 아들들을 위해 다음 게송을 읊었다.
‘아무리 출생이 좋고/ 계율을 잘 지키더라도/ 의무에 대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불행에 떨어지리// 지혜가 쇠약해진 사람에게는/ 언제나 큰 과실이 생긴다./ 비유하면 밤 눈 어두운 장님이/ 뚜렷한 빛깔만을 보는 것처럼// 가치 없는 것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마치 험난한 산길에/ 쓰러져 있는 저 사슴처럼// 아무리 그 출생이 낮더라도/ 활기 있고 용기 있고/ 바른 행과 계율을 갖춘 사람은/ 마치 캄캄한 밤의 불처럼 번쩍인다.// 이러한 비유로써 그 아이들을/ 지혜의 말로 양육하여라/ 마치 지혜로운 사람이 비 속에서/ 들에 씨알을 기르는 것처럼.’
이렇게 밤새껏 왕에게 설법하고서 거위왕은 수무카와 함께 북쪽 창으로 나와 치타쿠타로 날아갔다. 그때의 그 사냥꾼은 챤나요, 왕은 사리불이며, 케마 왕비는 저 비구니요, 그 백조의 무리들은 석가족이며, 수무카는 아난다요, 거위왕은 바로 부처님이었다.
이 본생담은 지난번에 연재한 마하카피 본생담(‘본생경’ 516번)과 대조를 이룬다. 마하카피 본생담이 은혜를 배반한 내용인 반면, 함사 본생은 목숨 걸고 의리를 지킨 이야기이다. 그럼으로써 좋은 사람,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도반은 청정한 삶의 전부라고 말씀하셨다. ‘쌍윳다니까야’의 ‘절반의 경’에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아난다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좋은 친구와 사귀는 것, 좋은 동료와 사귀는 것,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
이는 ‘사리풋다경’에도 동일하게 설해지고 있다. ‘법화경’ 제1서품에도 “어떤 보살은 온갖 희롱과 농담과 어리석은 무리를 떠나서 지혜로운 이들을 친근하여(親近智者) 일심으로 산란함을 제거하고 억 천만년을 산림에서 생각을 집중하여 불도(佛道)를 구합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보조지눌 국사도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의 첫 구절에서 “무릇 처음 불법을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악한 벗을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라(夫初心之人 須遠離惡友 親近賢善)”고 하여 좋은 친구를 가까이 하라고 하고 있다.
청정한 삶을 살게 하여 도를 이루게 하는 도반을 만나기는 어렵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이루어준 이는 벗(生我者父母 成我者朋友)’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도반을 얻으려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의리가 필요한 것이다.
‘사라바미가 본생담’에도 “벗을 즐겁게 하는 이는 영원히 번성할 것이며, 천상에서 살 곳을 발견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함사 본생은 이러한 의리를 보여준다.
[1646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