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논단
‘글로벌사우스’의 도전과 한국 외교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53호(2024.04.15)
신범식
외교85-89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정치는 거대한 변동기에 접어들고 있다. 탈냉전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분열과 지정학적 경쟁 그리고 지역질서 분화의 압력에 노출돼 있다. 미국 패권에 의한 단극질서를 특징으로 했던 탈냉전기가 저물며 ‘탈탈냉전기(post-post-Cold War era)’에 들어서고 있다는 진단이다. 요동치는 국제정세를 설명하기 위해 ‘미-중 전략경쟁’과 ‘세력전이’ 및 ‘다극화’에 대한 논의가 큰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최근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의 부상이 향후 국제정치의 구조적 변수가 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글로벌사우스는 주로 북반구에 위치한 미국과 유럽 국가들 및 그 핵심적 동맹국들을 칭하는 ‘범(凡)서방(Global West)’과 그에 대항하는 러시아와 중국 및 이란 등의 ‘반(反)서방(Global East)’ 간 대립의 사이에 있는 중간자 (中間者) 국가들을 지칭한다.
냉전기 동-서 진영대립 가운데 제3세계로 분류되었던 저개발 국가들이 1955 년 반둥회의를 거쳐 비동맹운동(후에 ‘77그룹’)을 통해 유엔무역개발회의 (UNCTAD)를 설립하고 신국제경제질서(NIEO) 구축을 요구하는 등 선진국 들의 저개발국·개도국에 대한 지원과 적극적 빈곤문제 해결을 촉구한 바 있다. 냉전기에 이들의 영향력은 국제정치상 구조적 변수로 취급하기엔 그 영향력이 미미했지만, 최근엔 그 힘과 영향력의 증대에 주목한 논의들이 활발 하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따르면 브릭스(BRICS) 5개국의 구매력 평가지수 및 국내총생산(GDP)의 합계와 비중이 2023년을 기점으로 서방 선진 7개국(G7)을 추월했다. 글로벌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95년에 44.9% 대 15.9%였던 것이, 2010년에는 34.3% 대 26.6%로 격차를 줄였고, 2023년에는 29.9% 대 32.1%로 역전됐다.
물론 브릭스에는 미국과 경쟁하는 중국과 러시아가 포함돼 있지만, 적어도 글로벌사우스가 중-러를 축으로 하는 반서방 연대에 힘을 보탤 경우 국제정치 구도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는 성장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안보의 핵심 이슈인 석유·천연가스·우라늄·식량 등 전통적 전략자원은 물론이고 희토류나 리튬 등 희귀광물을 다량 보유한 다수 국가들이 글로벌사우스에 포진해 있다. 글로벌사우스는 향후 국제정치 변화와 더불어 각국이 외교의 향방을 설정하는 데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산되고 있는 ‘신냉전 담론’에 대해서도 글로벌사우스의 존재는 대안적 설명을 요구한다. 서방의 결속과 지원에 의해 우크라이나가 끝까지 저항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 푸틴의 오판과 함께, 러시아를 강력한 제재로 쉽게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서방의 빗나간 기대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과 지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범서방이 러시아를 제재하고, 중국은 러시아의 뒷배가 되는 구도는 양 진영 간 대립을 잘 보여주지만, 실용주의적 글로벌사우스는 서방의 대 러시아 제재를 무력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인도네시아 등 대표적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의 전쟁 외교와 행태는 어느 한 편에 서있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신냉전 담론에서는 이런 글로벌사우스를 기회주의적이며 일시적 대응이라 치부하려 하지만,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은 국제정치의 변동에 영향을 미치는 세 번째 축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신냉전 담론이 과거 냉전의 기억을 소환하며 양자택일적 사고를 강요하는 구도에 대한 변화된 인식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G20, 브릭스 등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이 현 국제정치 변동기를 새로운 제도 창출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가령, 2009년에 러시아와 중국이 인도, 브라질, 남아공(2010년 가입)과 함께 결성한 브릭스는 2023년 남아공 회의를 통해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신규 회원국을 받아들여 브릭스플러스(BRICS+) 로 확장했고, 현재 글로벌사우스 40여 개국이 가입 신청을 했다. 이들은 비달러화 석유거래를 확산하고 새로운 국제 결제시스템 및 통화체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페트로 달러 체제를 흔들 가능성까지 보이고 있다.
한국 외교는 다면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현 정부는 지난 정권들이 풀지 못했던 여러 난제들 중 대일관계를 개선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한·미·일 공조체제를 작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 결과 범서방 진영의 일원으로서의 한국의 포지셔닝은 국제정치적 변동과 관련해 글로벌사우스의 도전 및 러시아-북한 간 밀착과 같은 도전에 맞닥뜨리게 된 것도 사실이다.
국제정치 변동기에 과감한 외교 전략 노선 변경은 극히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기존 한미 동맹외교 축을 안정화시킨 성과를 잘 관리하면서도 글로벌 사우스의 움직임에 주의하며 이들과의 협력 구도를 만들고, 필요한 경우에는 한국이 가교국가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창조적 외교를 포기해선 안된다. 전략적 선명성으로 얻은 이익을 지키면서도 전략적 유연성이 작동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창조적 외교의 발현을 위해서라도 글로벌사우스의 도전에 대한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대응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