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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스 만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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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Bay of Pigs Invasion |
스페인어 | La Batalla de Girón |
1. 개요
해변에 상륙한 놈들의 목을 벌써 따버린 것이나 다름없소.
You just cut the throats of everybody on the beach down there.
1961년 4월 15일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의 지원 하에 반공 게릴라가 벌인 상륙작전. 마이애미에 모인 쿠바 망명자들을 군사기지에서 훈련시켜 쿠바에 상륙해 이들을 통한 게릴라전과 항공 지원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본래 계획과 달리 지나치게 많은 기관들이 개입하고 필요 이상의 군사력 투입으로 인해 단순히 소규모 부대들을 통한 게릴라전이 아니라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상륙작전으로 전개되었고 지형과 항공 지원의 부재, 현지의 정보 부족과 민심[2]같은 여러 사항들로 인해 미 군사 역사상 가장 참혹히 끝난 작전들 중 하나이자 첩보 및 공작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남았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정권 말기인 1960년 3월 백악관과 CIA에 의해 브루투스라는 작전명으로 계획되었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던 약 1,500여 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해 명칭을 "2506여단(Brigade 2506)"이라고 짓고 친미 군사정권[3]이 있었던 과테말라 모처에 위치한 비밀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다만 그 해 5월에 발생한 U-2 격추 사건으로 인해 아이젠하워는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브루투스 작전에 대한 실행 의욕을 잃었다. 때문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작전을 진행하였으나 이미 임기 말이 다가와 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아이젠하워 정부가 끝나고 신임 대통령으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며 훈련 중이던 1,500여 명의 게릴라는 그대로 실미도 사건 꼴이 나는가 싶었으나 이 작전은 CIA뿐만 아니라 국무부와 펜타곤까지 개입되었다. 지금까지 쓴 비용과 끌어모은 전력을 이대로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케네디는 외교적 위험 부담이 큰 이 작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노회한 인상의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에 비해 무언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송이 같다는 평가를 단번에 떨칠 정도의 탁월한 업적을 쌓아 올리고 싶었던 케네디는 쿠바에 침공군이 상륙하면 쿠바 국내의 호응이 있을 것이란 CIA의 호언장담만 믿고 작전을 승인했다.
사실 배경은 또 하나 더 있다. 피그만 침공이 1961년 4월에 시작되었는데 그 해 3월에는 군부에서 더 정신 나간 작전인 노스우즈 작전을 올린 것이다. 케네디 입장에서는 노스우즈 작전보다는 차라리 피그만 침공 쪽이 훨씬 제정신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전은 처음부터 산재한 위험 요소와 갖은 문제점들이 많았다. 작전이 갓 세워질 때는 소규모 요원들을 야간에 몰래 투입한다고 계획되었으나, 작전에 간섭하는 목소리가 많아지다 보니 소규모 잠입이 사전 폭격을 동반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불어났다.[4]
그래도 여기까지는 차라리 문제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후 계획이 진행되며 점점 보안이 허술해졌고, 작전의 정교함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작전 몇 개월 전에는 뉴욕 타임스가 쿠바에 대한 군사 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CIA 국장은 "수 개월 내에 쿠바의 공산정권은 무너질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올렸다. 이 외에도 작전의 사전준비랍시고 소규모 게릴라를 끊임없이 쿠바에 침투시켜 사보타주 공작을 벌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쿠바 혁명정권에게 힌트를 주는 격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쿠바 혁명정권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 전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는 계속된 미국의 위협으로 인해 의심의 눈초리를 곤두세우며 전 병력을 동원해 해안선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정치적 제약이 심했다. 어디 반란군도 아니고 엄연한 주권국가인 쿠바를 미국이 공격한다는 모양새를 내보일 수는 없으니 모두가 미국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공 게릴라들은 해외로 도망간 쿠바 망명자들이 주도하고 이를 '익명의 후원자들'이 도와주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때문에 무기도 쿠바군 흉내를 냈고 부대 역시 쿠바 망명자가 주도[5]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덕분에 장비의 제한도 많았고 작전도 어려웠다.
지리적인 제약도 있었다. 피그만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와는 직선거리 100km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서 상륙에는 최적지였으나 그만큼 경계도 삼엄했다. 또 상륙지와 재집결 지역 사이에는 광활한 늪지대가 있어 사실상 병력 재집결이 불가능했다. 초기의 소규모 병력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연대 병력에 육박하는 상륙부대에겐 큰 문제였다. 하지만 작전 추진자들은 이를 간과하고 작전을 진행해 결국 상륙부대는 늪지에 갇혀 꼼짝도 못 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작전은 15일 새벽 은폐를 위해 국적 마크를 지운 A-26 공격기[6]들이 쿠바 공군기지들을 공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은폐를 했든 안 했든 어쨌건 간에 미군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 되는 쿠바 공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계획했던 2차 폭격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미 1차 공격을 가했는데 한 번 폭격한 공격기가 바로 보급을 마치고 재차 폭격을 가하면 뒤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7] 뒤에 미국이 있는 것은 전세계가 다 알았지만 일단 눈 가리고 아웅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는 심각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는 상륙군에게 미 공군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중 지원을 할 준비를 했지만 작전 하루 전에 취소되었다. 보고를 들은 후 길 패트릭 국방차관[8]에게 한 말이 바로 문서 맨 위의 인용문이다.
나름 준비와 각오를 마친 카스트로와 쿠바 정부는 전면전을 선포해 전군을 물론 자국 국민들에게까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만일을 대비하여 반정부 성향을 지닌 인사 약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반정부 인사들의 폭동이 벌어져야 했지만 카스트로와 KGB의 주도 하에 훈련을 받은 쿠바 내무부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사전에 차단당했다.
17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상륙부대는 피그만에 상륙을 시작했다. 쿠바군은 상륙부대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고 최정예 공수부대와 T-34-85 20대로 이루어진 전차 대대를 선봉에 세워 반격해 곧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상륙해오는 부대도 1년 이상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부대들이라 쿠바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나[9] 10배가 넘어가는 병력의 차를 어쩔 수는 없었고 미 공군과 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명령 전달이 늦어지면서 오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앞서 언급한 이유로 못 온 것도 있다. 정치적 이유로 후속 지원이 계획상에서 틀어졌고 상황 판단 미비로 계획의 융통성 있는 변경이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에 쿠바 공군은 공습에서 살아남거나 피해를 입은 비행기들을 긁어모아 최대한 빠르게 수리하여 출격시켰다. 쿠바 공군은 중화기를 실은 수송선을 폭격하여 격침시켰고 이로써 전세는 완전히 쿠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2506여단은 100여 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10] 카스트로 정부는 재판을 통해 주동자들을 처형했고 미국은 5,300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을 지불하고 나서야 나머지 1,113명의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이전에 체포되었던 반정부 인사들도 덤으로 숙청당했다.
훗날 2506여단을 기리기 위해 마이애미의 리틀 아바나에 피그만 전시관[11]이 건립되었다.
침공으로부터 4달이 지난 1961년 8월 우루과이 푼타 데 에스테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경제회의에 참석한 체 게바라는 회담장에서 만난 케네디 보좌관 리처드 굿윈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케네디에게 전해 주라는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침공을 당하기 이전에 쿠바 혁명은 약했으나, 지금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고맙다."
이 사건이 끝나고 나서 카스트로는 라디오에서 몇 시간 동안 분노 + 희열에 가득 찬 연설을 했다. 또 피그만 침공의 후폭풍으로 KGB에서 훈련받은 쿠바 정보부는 반정부 인사들 대다수를 미국의 침공을 인도한 앞잡이라는 명목으로 모가지를 날려 버렸으며 미국의 침공을 직접 겪었던 쿠바는 소련 붕괴와 냉전의 종말 후에도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사회주의 국가로 남게 되었다. 섣부른 판단이 거의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 셈.
케네디는 이 사건으로 집권 초기에 예기치 못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CIA에 격분해 해체시키려고 했으나[12] 암살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때문에 케네디 암살이 CIA에 의한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실제로 케네디의 CIA와 정보부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엄청났다. CIA 국장은 당장 파면되었고 CIA 자체를 해체하려고 했으며 군에 대해서도 불신을 가져서 라오스 왕국[13]에 대한 파병을 반대했다.[14] 이런데 피그만 침공 직전이었던 1961년 3월에 군부대에서 제출한 것이 노스우즈 작전이었고 피그만 침공이 실패하고도 정신 못 차리고 8월에 나온 것이 몽구스 작전이었으니 케네디로서는 CIA건 군부건 전부 다 멍청한 전쟁광에 한통속이라고 생각했을 수밖에 없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도 이 사건 때문에 자신이 '정보기관이나 군에 의해서 휘둘린다'라고 소련이 평가할까 봐 걱정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15]
피델 카스트로는 정권에 위협을 느껴 소련에 SOS를 쳤는데, 이렇게 해서 일어난 사건은 쿠바 한 나라의 문제를 넘어 세계구급의 문제로 번졌다.
1957년 미국과 소련의 포로 교환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고 주인공인 제임스 도노반 변호사가 1962년 피그만 침공 포로 석방 협상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고 엔딩 자막으로 나온다.
냉전 시대 첩보전을 다룬 드라마 The Company에서 1화 분량으로 피그만 침공을 다루고 있다. 2506 여단의 훈련부터 해안 상륙까지 전부 묘사되었다. 해당 드라마에서의 2506 여단에 대한 묘사가 매우 이질적인데 부대원들의 의지는 매우 높으나 이들을 훈련시킬 미국인들은 반바지에 쪼리를 신고 멀찌감치 앉아서 쳐다만 보고 있는 등 영 진지하지 않다. 게다가 상륙작전 자체가 극비사항인데 상륙을 위해 이동하는 배에서 부대원들이 드럼통을 바다로 던져놓고 거기다 총 쏘고 있다. 만약 지나가던 다른 배들이 봤다면 단번에 군인들이 타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므로 여기저기서 불안한 요소가 산재해 있는 걸 보여준 셈.[16]
1980년대 미드 에어울프의 부주인공인 도미니크 산티니(어네스트 보그나인 분)은 피그만 침공에 참전한 것으로 나온다.
캠페인의 첫 미션인 <Operation 40>은 이 사건이 배경이며 여기선 피그만 침공이 사실은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주의를 돌리는 CIA의 양동 작전이었다는 설정이다. 쿠바 경찰과 민병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작전이 꽤나 잘 풀려서(?) 카스트로가 있는 내륙의 기지까지 침입해 카스트로까지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카스트로는 사실 대역이었으며 암살 후 쿠바군의 폭격으로 인해 상륙한 부대가 거의 다 작살난다. 게다가 앞서 CIA가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음모론까지 겹쳐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떡밥인 셈.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카르텔은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정부의 무능함을 느낀 미국 내부의 반공 인사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다.
할인 이벤트 중 하나로 등장한다.
심리학 집단사고 중 가장 많이 예시로 언급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피그만 침공 과정 중 정책 결정의 과정을 두고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핵심은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집단 전체를 사로잡아서 그에 대한 비판 및 비판자를 용납하지 못하고 결국 예정된 실패로 진행된다는 것.
참고:
[1] 후술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준비하던 2차 지원폭격이 취소되자 한 말이다.
[2] 당연히 게릴라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나기 위해선 현지의 정보와 민심을 통한 대중 호응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CIA는 쿠바가 과거 미국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망각한 상태로 카스트로 정권 치하의 쿠바를 완전한 파탄국가로 판단했고 쿠바 전역에 반공 게릴라가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대로 카스트로 정권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계획대로 소규모 병력을 통한 게릴라 전투였다고 해도 오래가지 않아 현실처럼 참혹히 끝났을 것이다.
[3] 이 정권은 CIA가 지원한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었다. 바나나 공화국 참조.
[4] 본래 국방부는 미군 정규군(육해공 모두)까지 동원하려 했다. 이것만큼은 너무 모양새가 안 좋고 티가 난다는 이유로 케네디가 막았다.
[5] 다만 비행, 항해, 폭파 등의 전문 기술이나 전투능력 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인 교관들이 함께 참전했고 이 사람들이 쿠바에 잡혀서 결국 미국은 굴욕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6] 이 기체는 당시 쿠바군의 주력기이기도 했는데 쿠바에 친미 정권이 들어섰을 때 도입된 것이다.
[7] 애초에 CIA가 구상했던 스토리 설정은 '카스트로 정권에 반기를 품고 있던 쿠바 공군 내의 반체제 인사들이 자국 군시설을 폭격하고 미국에 귀순한다' 는 것이었다. 작전에 사용할 항공기로 많고 많은 폭격기 중에 하필 A-26 공격기를 고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런 '망명자'들이 탄 군용기가 미국에 귀순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재무장하고 다시 폭격에 나선다면 모양새가 너무 이상하다는 것.
[8] 맥나마라는 부재중이었다.
[9] 공식적인 발표로는 전사자 170여 명이지만 사상자를 포함한 수는 발표되지 않았다.
[10] 쿠바 군인들 사이에 몰래 숨어서 탈출하려던 단원도 있었지만 그가 껌을 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장교에게 잡혔다.
[11] 다른 이름으로는 2506 여단 전시관(Brigade 2506 Museum).
[12] 이때 케네디는 "CIA를 1천 개의 조각으로 찢어서 바람에 날려버리겠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크게 격분하였었다.
[13]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한 것의 영향을 받아서 라오스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정말 무서운 것이 이 사회주의 변혁을 이끈 인물이 보운콩 왕의 서자였던 수파누봉 왕자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수파누봉은 라오스의 1대 대통령이 되었다.
[14] 케네디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만난 자리에서 피그만 침공의 뻘짓이 없었다면 라오스 파병에 동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15] 그리고 실제로 이때 소련은 케네디가 군에 휘둘린다고 판단하고 미군을 직접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계획을 수립해 실행하게 되었다.
[16] 망망대해 바다에서 부표나 드럼통을 띄워놓고 여기에다가 사격 훈련을 하는 경우 자체는 흔하다. 이 장면에서는 이게 총알 낭비라서 문제인 건 아니고, 민간 상선으로 위장한 배로 몰래 피그만까지 가야 하는데 저러고 있는 게 문제다. 중간에 공해상에서 다른 나라 배를 만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저 짓을 하고 있으니 기밀 유출이 될 수 있다.
출처:
첫댓글
피그스 만 침공 사건은 정치, 군사, 작전, 군수, 심리전, 훈련 모든 면에서 실패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전 정권의 아이젠하워부터 시작된 일관성이 없는 기획으로 갈팡질팡했고,
ㄷㅅ의 케네디 엿먹이기 작전으로 변질되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는 이 사건으로 ㄷㅅ를 없애야만 미국이 생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거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