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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청도에서 태어나서 70살까지 충청도에서 살았다.
엄격히 말하면 70년 중 약 3년간 김포공항에서 군대생활 한 기간과 근무처 변경으로 직장을 따라 포천에서 자취하고 있었던 2년 6개월을 빼야 한다.
완전 충청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충청인의 표준은 절대 아니다.
어느 곳이고 그 지역 사람들의 특색은 말투와 행동에서 표출되는 것이 보통일 텐데, 같은 충청도라도 충북과 충남이 다르고 같은 충남에서도 시군별로 차이가 많다.
충북지방의 말투는 표준말에 가깝다.
흔히 TV 드라마 같은데 많이 등장하는 충청도 사투리는 서산지방 정도에 해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아산에서 태어나 주로 아산과 천안에서 살았는데 천안-아산 지방은 경기도 접경으로 말투가 거의 같고 덜 충청도스럽다.
나 어렸을 때의 대표적인 말투는 ‘야(예), 그류(그래요), 아뉴(아니오)’를 필두로 각 지역에서 쓰는 유형, 무형의 사물 이름에 차이가 있었다.
(자마리-잠자리, 금저리-거머리, 뜰팡-뜰, 살강-시렁,선반, 멱꾸리-멱둥구미, 바수거리-바소쿠리, 행길-한길,큰길, 샴-샘 등등)
요즘이야 가장 알아듣기 어렵다는 제주도에 가서도 대화에 불편이 없도록 제주 사람들도 표준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학교 교육과 함께 라디오, 텔레비전 등 매체의 힘이 크다.
옛날에는 학교 공부의 혜택을 많이 못 받고 교통이 불편하여 왕래도 적으며 라디오, 텔레비전도 거의 없이 살았다.
다른 지방의 언어와 섞일 일 없이 한 동네 사람들끼리만 생활을 해 왔으니 다른 지방의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했다.
충청도 기질 중 하나는 낙향한 선비들의 후예가 많은 탓인지 ‘군자는 자중’이라는 양반골 행동 양식을 모르는 새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바꾸어 말하면 희로애락의 인간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속마음도 잘 드러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그 속을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친절하지도 않다.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무뚝뚝의 상징 경상도 사람들보다도 더 무뚝뚝하다. 이것은 속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그 사람이 부담스러워할 까봐 그런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그런지 충청도 사람들은 깃발을 들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 어떤 사람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테지만 충청도 사람은 나서지 않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도와주면 제 갈 길을 가고, 다 몇 번 드려다 보다가 그냥 가버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게 되면 그때서야 도움을 주려한다.
젊었을 때 무슨 교육을 받기 위하여 마산을 간 적이 있었다.
천안에서 출발하여 시간을 대기가 어려워서 전날 저녁에 내려갔는데 아침에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오래도록 등산을 즐겨온 나는 다른 고장을 가게 되면 주변에 있는 산이 어떤 산인가, 올라볼 시간이 되는가를 우선적으로 생각을 해 보게 되는데 시간이 애매하다.
그렇다고 언제 또 와볼 것도 아니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산행을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산은 ‘무학산’이 대표적인데 그 높이가 761m로 정상을 다녀오기는 시간상 어렵다.
이럴 때 내가 산행을 하는 방식은 한정된 시간의 절반까지만 갔다가 그 시간이 되면 정상을 포기하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려오는 시간이 훨씬 덜 걸리게 되니 하산 후 씻고 쉴 시간이 주어진다.
산을 오르는데 당연히 먼저 올라갔다가 하산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한 아주머니가 내려오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는 이 지역에는 전혀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없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다.
내 뒤에 바로 따라오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가보다 생각을 했는데 좀 가다 뒤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그럼 왜 그랬을까???
좀 더 가니 또 다른 한분이 내려오다 역시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는 얼른 뒤부터 돌아봤다. 아무도 가까이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약간 늦었지만 얼른 답례를 했다. 이후에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기도 했다!
나중 전국 각지의 산을 두루 돌아다니다 보니 경상도, 전라도 쪽의 산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다. 웬일인지 충청도가 제일 적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하리만치 충청도 사람들은 화끈한 면보다 뜨뜻미지근한 면이 있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흑과 백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의사결정을 해도 마찬가지다. 만장일치가 거의 없고 제각각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이것은 국가적 행사인 투표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느 당 어느 인물에게 표를 몰아주는 법이 없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여러 당 여러 후보에게 표를 골고루 나누어 준다.
이런 환경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나는 매 투표 때마다 영호남이 현저하게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가 압도적으로 표가 갈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물의 됨됨이 정당의 공약에 따라서 표가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XX당’만 업고 나오면 개표 해보나마나 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차츰 개선되어 가고는 있지만 더 빨리 개선되어야 우리나라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비약적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말장난의 소소한 재미의 글을 쓴다는 것이 좀 길고 무겁게 흘렀다.
이제 부터는 진짜 가벼운 소재로....! ^^
1. 돌 굴러유~
이 말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혹시 몰라 말해 보면,
충청도 어떤 마을의 부자(父子)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늙은 아버지는 밑에서 젊은 아들은 산비탈 위에서 나무를 했다.
아들이 잘못하여 돌덩어리를 건드렸는데 그만 아래로 굴러갔다.
아들은 충청도 말로 소리쳤다.
“아버지, 돌 굴러유~~!”
말보다 구르는 돌이 더 빨라서 아버지는 돌에 치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충청도 사람들도 잘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우스갯소리도 못되어 얘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충청도를 떠나 다른 고장에 가면 듣기 싫도록 듣는다.
충청도에서 왔다고 하면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그 말부터 한다.
더 지독하게 그 말을 많이 들은 것은 군대에 가서다.
보통 충청도 사람을 일컫는 말은 좋게는 양반, 나쁘게는 멍청도, 핫바지가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돌 굴러유~’가 으뜸이다.
만인의 호구인 쫄병 때는 고참들로부터 수없이 들어도 감히 싫은 내색도 못하고 감내하는 수밖에....!
아예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야, 돌 굴러유 이리 와봐!”
나는 재미도 없고 기분이 좋을 리 없건마는 다른 고참 쫄병들은 다 웃는다!
왜 그런지 군대에는 충청도 병력이 절대 소수이다.
어리버리한 내가 고참이 되었다.
만약 나보다 늦은 군번이 나에게 ‘돌 굴러유~’를 입에 올리면
“박일병님, 일루 와 봐유!”
그리고는 냅다 후려 갈기고는
“말은 느려두 주먹은 빨러유~!”^^
나중에는 어쩌다 충청도에서 멀리 산 많고 물 맑은 포천에서 2년여를 살게 되었었다.
거기서는 이런 말도 들었다.
부자가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아버지가 돌에 치어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다른 부자가 또 나무를 하러 갔다.
그만 또 아들이 돌을 건드려 돌이 굴러 내려갔다. 아들이
“아버지, 돌....”
하고 '굴러유~'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 아버지는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잽싸게 피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또 돌에 치어 죽었다. 왜냐?
아들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손가락을 2개 펴 보이면서
“두 갠디....!”
2. 개혀?
요즘은 경상도 사람이 아니어도 긴 낱말을 짧게 줄여 쓰는 말이 일상화 되었다.
아예 표준말을 선도해야 할 매체에서도 ‘미우새-미운 우리 새끼’,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 등등.
내가 처음에 절묘하다고 생각한 경상도의 줄임말은 ‘선생님’을 뜻하는 ‘샘’이었다.
‘샘’은 선의 첫소리 ‘ㅅ'에, 생의 가운데 소리 ‘ㅐ’, 그리고 님의 끝소리 ‘ㅁ'을 합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얼마나 합리적, 과학적인가?
지금은 경상도 뿐 아니라 전국에서 쓰는 말이 되었다. 더러 ‘쌤’이나 ‘쌔임’으로 쓰기도 하지만!
그런데 느릴 것만 같은 충청도 말은 경상도 말보다 아예 문장 자체를 줄여 더 빠른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요즘은 이런 말 하면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여름에 더위에 지쳤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더운 여름철에 먹어도 탈이 적은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본래 ‘개장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것이 88올림픽을 치루면서 서양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사람들을 식인종, 미개인 취급을 하는 통에 도심에서 업소를 변두리로 퇴출하고 이름도 ‘보신탕, 영양탕, 보양탕, 사철탕’등으로 바꿔 불렀다.
하여간 아직도 즐겨 먹는 사람도 상당수 있지만 옛날에 비할 바 못된다.
옛날에는 친목 모임 같은 데에서 회원들에게 아예 물어 보지도 않고 그런 식당을 많이 잡았는데 어느 순간 안 먹는 사람이 많아져서 물어보게 되었다.
‘개고기 먹을 줄 알아?, 개고기 좋아해?’이렇게....!
충청도 사람들은 간단하다. ‘개혀?’두 글자면 된다.
또 하나, 제비족들 이야기!
나 같은 맹물단지는 아예 춤을 배워 본적이 없어서 드나들지 않아 잘 모르지만 카바레나 댄스홀(솔직히 말하면 카바레와 댄스홀의 차이도 모른다. 그러나 몸치는 아니다, 막춤에는 대가다)에 가면 춤을 추러 남녀가 팀을 이뤄 같이 온 사람들도 있지만 솔로로 와서 부킹으로 파트너를 구하는 수도 많은가 보다.
상대가 필요한 남녀는 따로따로 모여서 앉아 있고 남자들은 여자들 모여 있는데 가서 상대를 골라 춤을 신청하여 좋다고 하면 플로어로 같이 나가는 모양이다.
한 남자는 파트너를 구하는데 여자 있는 데로 가서 정중하고도 예의 바른 언행으로 춤을 신청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말이 느린 충청도 남자 하나는 아주 빨리빨리 파트너를 구하여 플로어로 나가는 것이다.
그 재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자기도 배워 빨리빨리 파트너를 구해 보려고 그 충청도 남자를 따라가 봤다!
그가 점찍어 둔 여성 앞에 가더니 ‘출튜?’하고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이다.
빠를 수밖에....!
2. 지나친 배려
상대편을 배려하는 마음이 지나친 충청인!
사실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좋고 싫음을 신속하게 표명하지 않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상대편을 배려하기 때문인 것일 수도 있다.
우물쭈물해 보이는 것은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생각이 많다는 뜻이다.
동네 사람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를 듣고 문병을 갔다.
가서 보니 한 다리를 깁스하고 누워 있었다.
“아이구, 어티갸? 저러키 한쪽 다리가 뿐질러져서 걷지두 못허구 어쩐댜?”
자기를 위해 염려해 주는 동네 사람들을 배려하여 환자는 한마디 한다.
“뭐, 할 수 웁찌유. 그래두 두 다리가 뿌러진 거 보담은 백배 나서유! 괜찮어유!”
충청도 출신 코미디언 중에 최양락(아산 도고), 김학래(천안 성남), 안상태(아산 인주) 등의 말투가 전형적인 우리 고향의 말투다! (말의 속도에는 세사람 다 차이가 있다. 최양락은 성질 급한 젊은 사람, 김학래는 보통의 어른, 안상태는 순한 할머니들의 말투)
4. 그런디 말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충청도 사람을 설득하기는 참 어렵다.
단선적으로 남이 하는 말에 대하여 같은 생각이라면 비교적 쉽게 수긍을 하지만, 아닐 경우가 문제다. 곧바로 ‘싫다,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 예,(오래 전부터 야, 야란 말은 안 쓴다.) 그렇지유, 맞어유, 그러문유,’라고 대답을 한다.
설득을 하러 온 사람은 다 이해 시킨 것으로 생각하고 신이 나서 마무리를 짓고 도장을 받으려 한다.
그 결정적 순간에 폭탄 같은 말 한마디!
‘그런디 말유!’
지금까지 장시간 머리를 써서 온갖 설득을 한 내용은 전면 백지화로 원위치가 된다.
다시 또 처음부터 이해를 시키고, 의지의 충청인은 끝에 가서 ‘그런디 말유!’를 또 들고 나오고.....!
혹시 잘못하여 처음 설명했던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부분이 나오면 이건 설득불가 수준이 된다!
‘우째 얘기가 아까 뻔하구 틀린디유?’
칠팔십 년대에 ‘시월유신’이니 ‘한국식 민주주의’니 하면서 독재체제를 굳히려 별 짓을 다 했다.
체계적으로 이론을 세워 국민을 장악하기 위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인가 뭔가를 세우고, 고위직 공무원들에게 연수를 시키는 것을 비롯하여 국민을 현혹시킬 수 있는 이론을 만들려 한 것 같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나 글줄이나 읽은 지식인들은 반정부 정서가 심하여 격렬한 시위에 참가를 하기도 했는데 나 같은 말단 교육공무원은 심정적 동조만 할 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
옛날 잡지에서 인터뷰한 얘기를 읽었는데, 혹시나 하고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 두 사람이 누구였는지 찾지를 못했다. 시위하다 체포된 대학생과 그 대학생을 취조하던 형사가 나중에 만나서 대화를 한 내용이었다.
시위를 주도한 일원 중의 하나인 충청도 대학생이 검거되어 감옥에 갇혀 전향시키고 반정부운동 조직에 대한 정보를 캐내고자 온갖 폭행 고문 심리적 압박 등을 가 했는데 끝까지 불지를 않았다고 한다.
결국 민주화가 이루어지고는 입장이 바뀌어 감옥 안에 있던 대학생은 풀려나고 그 담당 형사는 재판을 받고 대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술집에서 잡지사 기자와 함께 만나서 나눈 이야기다.
-물론 한때는 적이나 원수 같았던 사이이지만 진실을 캐기 위한 무겁고 진지한 얘기가 아니라, 재미있는 옛날 얘기를 나누듯 농담을 섞어가며 그때는 서로 몰랐던 궁금한 얘기를 물어보기도 하고 그때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형사의 얘기가 여러 사람이 잡혀 왔는데 다들 처음에는 완강히 버텨서 설득이 어려웠는데 이 충청도 학생은 말랑말랑하니 쉽게 설득을 시킬 수 있을 것 같더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때리고 고문하며 본론에 들어가니 다른 학생들은 다 두손 들고 회유에 넘어가 순순히 불고 풀려 났는데 이 충청도 대학생만은 끝까지 불지 않아 남아 있었는데 그 이유를 물었다.
그 학생은 답변이 간단했다.
처음 잡혀 가면서 불을까 말까 망설였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불기는 싫어서 버텨 보았는데 못 견디겠어서 이제는 불어야 겠다 마음먹으면 조지고, 조지면 오기가 생겨서 불지 않고, 또 불어야 겠다 마음먹으면 조지고, 도대체 불을 시간을 안 주더라는 것이다!
위 내용이 별 것 아니어서 다른 지역분들은 재미가 없을지 몰라도 충청인인 나는 나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결정이 느린) 것같아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었다. 지금도 그가 누구였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충청도 사람이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저변에는 옛날 조상들이 나섰다가 형벌을 받거나 귀양을 가고 낙향을 하게 된 것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나 혼자 생각을 해 본다.
충청도 사람이라고 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것은 아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과 백야 김좌진 장군은 충청도 사람이지만 어느 지역 사람에 못지않은 대단한 결기가 있는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순신, 김시민, 류관순, .... 많이 있네!
충청도 사람이 잘났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해본 사실도 아니고 내 생각을 그냥 재미로 써본 글이니 지역색 운운하며 몰아세우진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