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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DSLRCLUB의 와이지님
그러나 이 날은 .....
‘전국정의구현사제단’ 내가 이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87년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맞서 서울의 사제들이 단식기도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였다. 또한 이후 박종철의 고문치사사건이 조작 되었다는 성명서와 함께 6.10항쟁의 한복판에 서 계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사진을 보면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83학번으로 당시 개신교 신학교인 장신대의 졸업을 앞두며 개신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장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사제들의 완전한 투신은 내게 크게 감동을 주었다. 완전한 투신의 힘은 독신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당시 구의동성당 주임신부님을 찾아뵈어 사제에 대한 원의를 말씀드리고 세례를 1989년 7월에 받았다. 그 후 교구 성소자 모임을 알아보던 중에 대부님의 소개로 예수회를 알게 되어 예수회에 1993년에 입회하여 2004년에 사제서품을 받게 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을 떠 올리면 따라서 늘 내겐 빚진 자의 심정이었다. 고인이 되신 김승훈 신부님과 함세웅 신부님들의 강연과 책을 통해 예언자적인 모습을 늘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내 성소의 마중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회에 입회한 후 그 동안 너무나 학생운동하며 이념으로 치우쳐서 있던 내 모습을 반성하며 복음과 예수회원으로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하다 보니 내 앞가림하기도 벅찼다. 그보다도 현실에 안주하며 안일하게 시국을 바라보는 것에 젖어 들어 정의에 대해 무뎌졌던 것이 더 정확한지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는 한 때 이념적으로 편향된 것에 대한 두려움이 또 다시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릴 것을 붙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내 안에 복음과 정의의 균형에 대한 또 다른 두려움지도 모른다.
서품 후 1년 5개월이란 짧은 기간의 본당생활과 그 후 예수회신학원에서 삶을 보내며 이곳저곳에 피정동반을 하고 지냈다. 본당생활과 피정동반을 깊은 하느님 체험을 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을 맛들이고 알아가는 신자, 신학생, 수녀, 신부님, 목사님들을 동반하며 줍는 영적이삭이 어찌 그리 달고 맛있었는지...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무뎌져 눈감고 있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지난 5월초부터 들리기 시작한 촛불문화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러다 5월 20여일게 수사님들과 우연히 함께 나가게 된 집회에서 나는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이전과 같이 분노와 긴장과 적개심과 전투적이지 않았다. 놀고, 즐기는 해학적인 놀이로 다가왔다. 또한 그 참석자이 층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단히 넓어졌음에 충격에 받았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와 구호들은 어찌 보면 유치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힘이 있었다. 그들이 소리와 외침이 급기야 내게는 베드로에게 들였던 그 닭 울음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계속 참석했다. 참석하면서 주일시국미사를 시청광장에서 수녀님과 신자들, 혹 예수회원들끼리만 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혼자 힘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싶어 한국남자봉헌생활단장상연합회 정의평화위원회의 김정대 신부에게 시국미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내적인 갈증에 비해 촛불문화제에서는 물과 빵, 김밥, 커피, 수박, 오이, 참외 등등...참으로 많은 음식을 얻어먹었다. 급기야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와 단식에 합류하면서는 더 깊은 체험을 했다. 사제단 천막에 며칠 있으며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본의 아니게 관찰하기도 하며 남녀노소를 만나게 되었다. 천막 앞을 무슨 큰 죄를 짓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안쓰럽게 바라보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얼굴 한번 돌리며 미소를 짓고 가는 사람들. 가볍게 목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못 본 것을 본 듯한 표정이나 벌레만도 못하다는 듯이 처다 보는 사람도 있었다. 참으로 다양했다.
그리고 생수와 얼음생수, 옥수수차를 비롯하여 백합, 장미꽃다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제단 천막 앞에 말없이 갖다 놓고들 갔다. 어떤 이는 초코렛은 음식이 아니니 힘들 때 몰래(?)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뱀의 유혹처럼 너무나 달콤했다. 정말 힘들어서 먹으려고 찾았지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지금도 아쉽게 느껴진다. ~!~ 혼자서 혹 가족들과 함께 와 ‘수고 하십니다’, ‘힘들어서 어떠하냐고?’ 인사하는 사람들... 심지어 어떤 이는 큰절을 하여 사제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바쁜 출근길에 비닐봉지에 생수를 말없이 부끄럽게 한쪽 곁에 살짝 놓고 가는 자매님들..또 어떤 이들은 양말과 속옷까지 갖다 놓고 간다. 참 속 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들이 들었다. 단식기도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일반 시민들은 인터넷을 통해 신부들이 굶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정성스레 두 자매님도 계셨다. 또한 단식하느라 수고한다고 복숭아와 바나나를 사 온 분도 계셨다. 이들에게 일일이 단식기도의 의미를 설명하기가 싫지만은 않은 순간들이기도 했다. 사제다운 모습을 보여주니 복음의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Mt.10,10b)라는 말씀을 절로 체험 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있었다.
촛불 집회를 사주한다며 외국계 보험회사의 강모 신자는 신부들을 지도하기 위해 왔다는 분도 있었다. 이분은 초면인 내게 다짜고짜로 반말을 해서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도 했다. 나중에 옆 신부님의 표현을 빌리면 내가 한 대 쥐어박을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 했단다. 암튼 그렇게 내 마음이 상했던가 보다. 또한 Wall Street journal 기자라는 미국인 Steve란 자도 있었다.(이 사람은 하도 거짓말을 해서 이 이름도 거짓인지도 모르겠다) 사제단 천막을 세 번이나 출렁거리게 하며 줄을 잡아당기며 모욕과 조롱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붙들고 사과를 받아내며 못하는 영어에 내가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해댔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만큼 힘든 시간들이었다.
또한 모 신부님은 주교님들이 왜 미사를 밖에서 하느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셨다고 한다. 세계청소년 대회를 야회에서 하시는 교황님께는 무엇이라고 말씀드릴 것인가? 그럼 성당에서 앞으로는 야회미사를 드릴 수 없는 것인가? 신자들이 있는 곳에 사제가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상처 받은 양떼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목자들의 의무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바로 보여주시지 않았던가? 예수님이 어디 건물 안에서만 사람들을 만났던가? 예수님이 어디 한 곳에서만 머무르시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먹을 것을 주셨는가?하는 의문들이 계속 들었다. 왜 주교님들은 무엇을 한 행동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가? 실제로 이곳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왜 없으신가? 하는 의문들만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2천 년 전의 예수님 시대로 되돌아가 있던 이 체험과 감격은 무엇인가?
성사란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가톨릭 교리에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징을 통해 드러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은가! 즉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을 성사라는 표징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낸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7성사를 통해 은총을 받고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지 않은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완전한 성사라고 고백하며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를 믿어 의심치 않은가?
6월 30일 시국미사를 드릴 때, 김인국 신부의 “여러분 그동안 외로우셨죠?”라는 이 말에 통해 많은 신자와 수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감격하여 울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내 주위의 많은 비신자들조차 내게 너무나 고맙고, 감격했고 50대를 넘으신 남성분들이 감격에 흐느꼈다고 전해 주었다. 이들이 감격하고 위로를 받은 것은 무엇인가? 사제단이 잘생겨서, 혹 말을 잘해서 이었을까? 그날 그곳에 사제단이 있음으로 해서 그들에게 위로가 된 것이다. 이는 단지 외형적인 사제단의 모습에 위로가 되었다면 그저 기뻐하고 환호, 박수하며 좋은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 속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더 깊은 그 어떤 체험이 존재한다. 신자와 비신자를 떠나 하느님께서 시민들의 영혼에 창조해 놓으신 당신의 모상을 통해 당신을 단박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사제단의 광장출현을 통해 시민들이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는 그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란 책에서 “명확한 개념적 이해와 언어적 표현을 초월하는 어떤 비합리적 체험”을 <성스러움의 경험, 누미노제>이라고 했다. 시민들이 한 경험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하느님 체험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민들의 체험을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완전한 성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그들이 체험한 것이라고 하지 못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하느님 체험을 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있을까?
어떤 신부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홍해를 건너는 그 체험을 했다고 한다. 시민들 한 가운데를 지나는 그 순간 폭력과 불신, 분노를 처 부스는 비폭력과 평화, 위로의 걸음이었다고 한다. 또 어떤 신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성지주일의 그 체험이라고도 했다. 내 개인적으로도 일면 동의하는 측면이 있었다. 평소 성지주일 관상은 늘 불편했다. 즉 예수님을 환영하던 같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을 하는 이중적인 군중으로 알고 있는 알량한 신학적 지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하느님 나라를 그렇게 갈망하던 사람으로 상처받고 외로운 군중들로 보였다. 분명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발걸음도 그저 신나지만은 않았다. 십자가를 들고 입장하며 어떤 비장함이 있었다.
사진 : DSLRCLUB의 Toti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갈라디아 6,14)
미사를 준비하면서 또한 입장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 '신부님 사랑 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들을 들었다. 물론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라는 말도 들었다. 마치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이러했겠구나 하는 생각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광장에서 3차례에 걸쳐 주일미사를 드리며 어떤 무기력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나의 정체성을 다시금 깊이 새긴 날 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신자와 비신자, 남녀노소가 환영의 박수를 쳐주어서 우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날까지
나는 건물과 성당 안,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사제였다.
그러나 이날은
내가 그들이 사제가 된 날이 아니다.
그러나 이날은
‘내가 여러분들의 사제입니다.’라 선포한 한 날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날은
그들이 나를 자신들의 사제로 만들어 준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그들이 나를 자신들의 사제로 받아들인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내가 이 나라의 모든 이을 위한 사제가 된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내가 대한민국의 사제로 다시 태어난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내가 모든 이의 사제가 될 수 있고,
되었다는 이 명백한 사실에
내가 사제임을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제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미사와 행진 후 함께 갔던 수사님들은
자신들이 왜 사제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깊은 부르심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은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 날이었다.
이날은 그분이 일하신 날이었다.
이날은 바로 그분의 날이었다.
하느님 당신이 하신 일 맞죠?
다 알고 있습니다.
~!~
P.S : 시국미사에 참석하며 정의구현사제단에 뜬 구름 없이 이제 내가 진 빚을 갚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또 다른 빚이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느낌이다.
이게 감정과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이며 무엇일까?....
2008년 7월 11일
성 베네딕트 아빠스 기념일에 촛불문화제를 정리하며...
첫댓글 무엇인지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느낌...하느님을 체험한 모든이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게 무엇일가요..제게도 터져나오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가슴에 응어리처럼 고여있답니다... 어제 시사IN 주간지에 정의구현사제단기사 읽으면서도 뭉클했는데.. 이 아침도 감동을 선물받고 제게 채찍질해주십니다. 이 시대의 살아있는 예수님! 사랑하고 고맙답니다.
뭉클함으로인해 눈에 맺혀지는 이슬로 끝나버리는것이 아닌지..마음졸였답니다. 분명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을텐데 답답함을 느낍니다.목에걸린가시로 표현하셨는데...무엇일까요....,지금 이현실속에서도 우리를 위로의 눈으로 안타까운 눈으로 보시는 예수님...,..,
하느님이 심어 놓으신 마지막 나(너)의 모습은 모르지만,가장 나(너)답게 살게 하시는 그 분은 ~~답게들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지요.. 이념에 투철한 개신교 신학생이 단지.., 모든이를 사랑하는 사제가 되었고 그 날 이미 사랑뒤의 비장함도 알아버린 우리는 광장에 처음부터 함께 하셨던 사제에 더욱 찡~한 사랑과 존경을 보낸거지요. 성소의 마중물이었던 정의구현단에의 빚을 신부님이 갚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느님의 뜻이 제때에 작용하셨음을 보시면 어떤 빚도 목의 가시가 되지 않을 거라 믿는다고 감히 말씀드려요 우리의 마중물이 되어주신 신부님~ 답답한 현실이지만 언제고 시원한 물줄기에 젖는 희망 잃지 않아요 ^^
보여주심에 감사~~함께 기도합니다.
정의 + 빛 , 한 복판에 서 계시는 신부님. 바오로의 고백이 곧 신부님의 고백이 되시기를!!! 그러나 미완성인 세상은 늘 목에 가시가 걸려있는 느낌이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지금. 그러나 신부님의 한 걸음에 신자들은 열배 백배 힘이 닙니다. 다시, 감사하고 고맙고 그렇습니다. 신부님**
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행위에찬동하지않는다. 사제는 길거리를 방황하는 거른 사제가아니다. 사제란 기도와 묵상이지 정치 게임의 선동적인 행위에 나는 거부한다.
하느님의 요청에 따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길거리가 아니라 지옥에라도 가 있어야 하는 것이 사도로서 불리움 받은 사람의 소명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생명의 수호와 보존이고, 그를 위해 정의와 평화가 요구되는 것이니까요... 정치는 그 목적을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몇차례 촛불축제가 있고 유월십일에야 전주에서 하는 문화제에 참석했다. 퇴근하고 저녁을 간단히 먹고 다섯부류의 모임이 있는데 여성, 종교인,농민,등등 나는 종교인이었지만, 여성이니까 여성들의 모임으로 가고 싶어서 객사쪽으로 갔다. 어린아이들과 중학교, 고등학교 여학생,남학생들이 많이 모였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렇지만 결의에 찬 아이들의 모습이 느껴져왔다. 주는 초에 불을 붙이려는데 옆에 있는 중학생 남자 아이에게 불을 달라고 했더니, 그 조카 같은 남학생이 "고맙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옆에 여학생도 멀리에서 왔는데 "고맙습니다" 하는 것이다. 갑자기 후레쉬가 터지고 여기 저기서 사진을 찍는것이다.
무엇이 고맙다는 것일까? 자기들과 함께 해주어서 고맙다는 말로 해석했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그들과 함께 할때 비로소 힘을 얻는게 아닐까?
신부님의 진솔한 마음의 고백이 심금을 울립니다~~무엇이 제 발걸음을 이끌었던지 7월5일 미사와 행진 대열에 저도 함께 하였었지요~ 앞서 가시던 신부님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셨지요... 그 빛은 아직도 생생히 제 마음속에 남아 하루하루를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