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친구가 정년을 맞게 되어 준비모임의 부탁으로 기념 문집에 글도 한편 써 주고 교정까지 보고
참석하기를 고대하였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저 세상으로 떠났다고.
지금 막 원지동 추모공원에서 이 세상을 이별하고 들어와 다시 초청장을 보고.
세상을 떠나는 날 준비위원회에서 보낸 편지를 본다.
우선 기념문집에 내가 올린 글을 보며 슬픔을 달래려 한다.
강하야!, 아니 광하야!
나와 중고등 동창, 그러나 대학은 일 년 아래, 그런데 나보다 먼저 정년을 맞게 되었다. 50년이 넘는 그 동안의 교우관계를 살펴보면 이 친구는 61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만나 비쩍 마른 둘이 짝이 되었다. 물론 시켜서 되었지만. 처음 본 인상은 해맑은 얼굴에 약간은 엉성한 모습이었고. 한 학년을 옆자리에서 보내었다. 우리 담임은 이름이 김문복선생으로 수성 못 부근의 집에서 가축도 기르는 실업선생님. 해방 전 집안이 야채가 귀한 만주에서 콩나물 길러 돈을 많이 벌었으나 귀국 시에는 빈털터리로 내려 오셨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 등으로 재미있으셨던 분. 개교기념일에는 경북중고등학생 모두가 달리는 마라톤대회가 있었다. 중학생들은 수성못입구에서 돌아오고, 고등학생들은 여기에 수성못을 한 바퀴 더 돌고. 길가의 대구시민들이 응원을 하는 큰 행사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 5.16군사 혁명이 일어났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달리기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이 행사가 취소되고 행사 후에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단팥빵만 같이 먹은 기억이 난다.
이 친구는 경북고등에 입학하고 난 뒤 다시 만난다. 한반은 한 번도 하지 않았으나 YMCA산하의 고등서클인 High-Y의 청록멤버로서 여러 행사에 참석을 하여 우의를 나누었다. 이 서클은 지금도 자주 만나는 사이이고 얼마 전에는 북한산 둘레길을 같이 걷기도 하였었다. 더구나 3학년 때는 이과와 문과로 나누어 있었기 때문 더 더욱 길이 달랐고. 3학년 겨울방학 때인 1월, 형의 서울대 교복을 입고 나타나 우리가 얼마나 놀랐던지. 아하! 이 친구는 벌써 입학을 보장 받았구나. 하고서. 시험이란 게 반드시 실력과 비례하지 않지만 대학에 첫해 실패를 하고 양영학원 시절, 아마 처음 인생의 좌절이 아니었을까.? 내가 하릴없는 의예과 학생이었을 때 학원을 찾아가 만나기도 하였었다. 대학 다니는 동안은 학교가 달라 서로 안부만 묻는 정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으로 한국비료에 일 년간 다니는 동안은 적조하였었고, 군대는 방위로 마치지 않았나? 그 후 대학원의 조교 생활을 하다 도미하여 격변기인 75년부터 81년까지는 친구가 텍사스 오스틴에서 수학 중이었다.
81년도에 돌아와 서울대학에 임용되었을 때부터는 다시 교류가 시작되었다. 귀국 시 집을 얻기 위하여 재정 보증을 서 준 친구이다. 이는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의 병원 입사 원서 친구 란에도 물론 올렸지요. 그때는 또 우리 고등 친구모임인 “맥맥클럽”으로 자주 만나 식사도, 술도, 애들이 어릴 때는 어린이날이고, 여름휴가고, 송년모임에도 애들과 같이 만나곤 하였는데 애들이 다 커고 각자 일들이 있어 이제는 같이 못 만나지만, 여러 행사들도 같이 하게 되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88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유럽 신장학회가 열렸을 때 마침 친구가 일 년간 프랑스 파리에 연수를 나가 있어 학회 가는 길에 찰스 디킨스의 “A tale of Two Cities에서 London의 Covent Garden과 이에 대칭해서 나오는 Paris의 생 미셀거리의 찻집에서 만나 시내 관광을 안내받고 우리나라사람들이 판매원으로 있는 면세점 “Benrux(방뤼)에 같이 가서 쇼핑 가이드를 받은 적도 있었다. 물론 이 친구 특유의 친화력으로 산 물건의 할인도 받았다. 애석하게도 그 때 산 금테에 물소 뿔로 만든 Dunhill 선글라스는 몇 년 후 처와 같이 파리를 방문하였다가 잃어 버렸고, 지금은 물소 뿔로 만들지도, 따라서 살 수도 없다.
선친의 이야기를 뺄 수도 없다. 중학교 겨울방학 때 드넓은 경북 농도원의 원장 관사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이어서 경상북도 산업국장으로 계실 때는 대봉동의 적산가옥, 또 대구시장실과 그 앞의 관사, 비서실에 경상도 말투가 매력적인 비서가 있었는데. 서울로 오셔서는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농협이사와 농협대학장으로 공직을 마치신 걸로 알고 있다. 신촌이대 후문 쪽의 집에도 가보았고. 여의도에 사실 때 세상을 떠나셨는데 문상을 가서 우리들은 항상 주님을 위하시는 모친 때문에 술도 한잔 못 마시고 밤샐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였으나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문상객 접대는 남들과 똑같이 하여라” 하여 넉넉한 술로 심심치 않게 보내었다. 나는 물론 이 친구의 부모님이외에도 누님들과 형, 남동생과 여동생들도 모두 잘 안다. 마지막으로 온 가족들을 만났을 때는 아마 아산병원에서 모친 돌아가셨을 때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한다.
손위처남이 나의 서울의대 2년 선배이시고, 친구의 부인도 내 동생과 대구 사대부중 동창이고 화가인 친구 부인과는 나의 처 이대 미대 동기이자 지금도 한 달에 한번 씩은 반드시 만나는 모임이 있다. 친구가 결혼 전 신촌의 처남댁에 우리 친구들이 함을 팔러 갔을 때 미리 내가 온다는 것을 잘 아시는 처남이 “어이 유선생, 뭐 하는 거야. 빨리 들어오질 않고. 돈을 달라는 대로 다 줄 터이니.” 햐! 이런 싱거운 일이 어디 있나? 이 선배는 요즈음도 환자를 소개하면 잘 보아 주신다. 얼마 전 서클후배들과 점심을 먹으며 들은 이야기이다. 여의도에 친구가 살 때 집에 부인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후배들이 부러워하니까 “저 작품 하나 하는데도 돈 많이 들었다” 하였다고.
나와 친구의 공통점은 무지하게 많다. 같은 중고등학교, 전공은 달라도 같은 대학 졸업, 부인도 같은 대학의 미대 출신, 애들도 순서만 바뀌었지 남매로 같고, 직업도 전공은 다르지만 박봉의 교수로 같고, 친구의 친구가 나의 친구, 부인의 친구가 내처의 친구, 여태 강남에서 같이 살아왔었고. 노래방에 같이 가면 둘 다 노래를 잘 못 부른다는 것, 또 살림살이에 도움도 되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잡학에 밝다는 것이다.
친구는 나보다 대학을 일 년 늦게 들어와 교단을 일 년 일찍 떠나는구나. “강하야!, 아니 정확하게 불러야지. 광하야!” 앞으로도 그동안 네가 평소에 해 온 것처럼 많은 일들을 할 생각은 버리고, 매이지 않는 삶을, 유유자적한 삶을 살기를 바래.
“정년을 축하한다.” 라고 말해야 하나. 온가족들 모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빌며.
너의 오랜 친구인 석희가.
첫댓글 아까운 분이 요절하셨네요....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