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전고(官職典故) 승문원(承文院)
고려에서는 문서감진색(文書監進色)을 설치하여 대국을 섬김과 이웃나라와 사귀는 문서를 관장하게 하였다. 뒤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라 개칭하고 다른 관원으로서 겸하게 하였다.
○ 국초(國初)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 10년에 승문원이라 개칭하고, 판사(判事)ㆍ지사(知事)ㆍ첨지사(僉知事) 각 1명과 교리ㆍ부교리ㆍ정자(正字)ㆍ부정자(副正字) 각 2명을 두었다.
15년에 박사(博士)ㆍ저작(著作) 각 2명을 증원하였다.
세종 15년에 첨지(僉知)를 고쳐서 부지(副知)라 하였다.
세조 12년에 판교(判校)ㆍ참교(參校)ㆍ교감(校勘) 각 1명과 교리ㆍ교검(校檢)ㆍ박사 저작ㆍ정자ㆍ부정자 각 2명과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명을 고쳐 두었다.
연산군이 박사 이하의 관직을 폐지하였다.
중종 초년에 복구하였으나 참교ㆍ교감ㆍ교리 및 교검 1명씩을 감하였다. 뒤에 판사를 고쳐서 도제조(都提調) 세 사람으로 하고 정승이 으레 겸하였다. 지사를 제조(提調)로 하였는데 정원이 없었으며, 부지를 부제조 한 사람으로 하고 혹 두 사람도 하였는데 모두 다른 벼슬이 겸하였다.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는 정원이 없었다. 문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를 박사에 올려 분관(分館)을 주장하게 하고, 또 간택을 겪은 뒤에라야 예에 따라서 부직(付職)하였다.
19년 《고사촬요》에는 20년 을유라고 하였다. 에 이문학관(吏文學官)을 증설하여 백의(白衣 관직이 없는 사람)로서 종사하게 하였다. 뒤에 한리학관(漢吏學官)으로 고쳤다. 실직(實職)이 7명이고, 미리 뽑아두는 사람이 3명이다.
을유년에 남곤(南袞)의 아룀에 의하여 이문학관을 설치하였는데, 그 제도는 경(經)ㆍ사(史) 중에서 세 가지 글을 강론하고, 시(詩)ㆍ부(賦)ㆍ논(論) 각 한 편을 시험하며, 정원을 6명으로 하여 동지(同知) 최세진(崔世珍)에게 수업하게 하였다. 신축년에 김안국(金安國)이 건의하여 한리학관(漢吏學官)이라 고치고, 7명을 정원으로 하여 실관(實官)이라 하며, 또 예차(預差 미리 뽑아두는 것) 3명을 두었다. 《패관잡기》 ○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역설(譯舌)〉
선조조에 학관(學官) 4명을 감원하고, 제술관(製述官) 3명을 추가하여 두었다.
숙종이 학관 3명과 제술관 1명을 감하였다. 지금은 2명이 남았는데, 1명은 문관으로서 교서관에서 쓰고, 1명은 음관(蔭官)으로서 일찍이 학관을 지낸 사람을 쓴다.
사자관(寫字官) 40명을 두었다.
국초에는 사자관이 없고 문신 중에서 글 잘 쓰는 자로 하였는데, 뒤에 문신으로서 글 잘 쓰는 자가 매우 적은 까닭으로 선조조에서 부터 사(士)ㆍ서인(庶人)을 막론하고, 글 잘 쓰는 자에게 군직(軍職)의 직함을 주고 관대(冠帶)를 하여 매일 근무하게 하였는데, 이해룡(李海龍)ㆍ한호(韓濩)가 곧 그 시작이었다.
○ 승문원은 사대(事大)를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황제가 내린 조칙(詔勅)을 여기에 간수하였다. 이숙감(李淑堿)의 〈제명기(題名記)〉
○ 세종 15년에 승문원이 북부 양덕방(陽德坊) 마을에 여염집과 섞여 있어서, 황제가 내린 조칙을 감수하였는데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는 뜻이 아니라고 하여, 드디어 궐내로 옮겨 따로 각(閣)을 북쪽 모퉁이에 세워서 간수하게 하였다.
○ 영종 46년에 양궐(兩闕 경희궁ㆍ창경궁)을 승문원 안에 각각 세워서 국조(國朝) 이래의 조칙을 봉안하고, 임금이 각(閣) 이름을 써서 현판을 붙였는데, 경희궁(慶熙宮)에 있는 것은 ‘경봉각(敬奉閣)’이라 하고 창경궁(昌慶宮)에 있는 것은 ‘흠봉각(欽奉閣)’이라 하였다.
○ 승문원에서 평상시에 문서를 감진(監進 물건을 진상할 때 감독하는 것)하는 날에는 어주(御酒)를 하사하는 일이 있었다. 옛날에 기사시(記事詩 교리 조안정(趙安貞)이 즉석에서 지었다 한다)가 있었는데,
문서를 감진하는 그날에 / 監進文書日
제조는 각기 흩어져 돌아갔다 / 提調各散回
마른 노루포를 한 마리 찢고 / 乾獐一口割
하사하신 어주는 두 두루미를 열었다 / 宣醞兩尊開
대선생을 불러서 마시고 / 呼大先生飮
모든 요장을 오라고 청한다 / 請諸僚長來
고령종이 오르내리니 / 高靈鍾上下
옥산(玉山)이 무너짐을 깨닫지 못하네 / 不覺玉山頹
하였다. 고령종은 승문원 안에 있는 옛 그릇인데, 18되[升]의 술이 든다. 전하는 말에,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가 마셨던 그릇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령 땅에서 산출(産出)된 것이라고 의심하나 옛 일을 지금에는 다시 볼 수 없다. 《지봉유설》
문서를 상고하는 날에는 제조가 일제히 앉아서 감진(監進)하는데, 내자시(內資寺)에서는 술을 제공하고, 사재감(司宰監)에서는 안주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사하는 의식을 마치면 제조는 모두 헤어지고, 낭청(郞廳)이 그대로 앉아서 대작(對酌)을 베푸는 것이었다. 《용재총화》
○ 국조에서 사대하는 일을 중하게 하는 까닭으로, 당하문관(堂下文官)을 ‘이습관(肄習官)’ 이라 일컬어서 모두 괴원(槐院 승문원)에 예속시켰다. 매달 2일에는 부제조가 모여 앉아서 일과를 감독하는데, 이문(吏文 관용 문서의 용어와 격식)에는 ‘순제 백일장(旬題白日場)’이란 것이 있고, 한어(漢語)에는 ‘별초(別抄)’가 있었다. 또 정시(庭試)와 전강(殿講)이 있어서 상을 주고 벌을 주기도 하였다. 근래에는 그 제도가 해이하여져서, 제조가 모여 앉는 날에도 혹 병을 핑계하고 오지 않는 자가 있으니 매우 한심하다. 《지봉유설》
○ 승문원 제조는 반드시 당시에 학문상의 명망이 있는 사람을 극히 가려서 제수하는 것이었다. 만력(萬曆) 병술 연간에 이수광(李睟光)이 처음으로 본원에 출근하였는데, 그때 도제조는 노수신(盧守愼)ㆍ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㙉)이었고, 제조는 이산해(李山海)ㆍ정탁(鄭琢)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ㆍ윤탁연(尹卓然)ㆍ윤의중(尹毅中)이었으며, 부제조는 권벽(權擘)ㆍ정윤복(丁胤福)ㆍ이성중(李誠中)이었다. 비록, 최립(崔岦)이 문재(文才)로 임진년 난리 뒤에 비로소 제조에 제수되었으나 마침내 사직하였고, 홍여순(洪汝諄)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도 역시 제조는 되지 못하였다. 부제조는 ‘공사 제조(公事提調)’라 하여, 예에는 3, 4명에 불과하였는데, 근년에는 부제조가 많아서 10여 명까지 되고, 또 전에는 제조가 승지로 되면 제조는 사면하였는데, 근년부터는 승지가 제조를 겸하니 옛 일이 아니다. 《지봉유설》
○ 평시에는 괴원(槐院)이 경복궁 광화문 안에 있었다. 괴원 안에 장서각(藏書閣)이 있어서 매우 높았는데, 중국의 고문(誥文)과 조칙(詔勅), 여러 글을 간수하고 세 사람이 갖추어져야 여닫는 것이었다. 신관(新官)으로 뽑힌 자는 이름을 누각 아래에 쓰고 이어 큰 잔치를 거행하는데, 이를 ‘제명(題名) 잔치’라고 한다. 본원에서 한림(翰林)ㆍ주서(注書)가 된 자를 ‘서비(西飛)’라고 하는 것은 괴원이 동쪽에 있는 까닭이었다. 윤인함(尹仁涵)이 정자(正字)가 되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
과거에 오른 지 3년이나 되었건만 / 登科三載後
아직도 조사(낮은 벼슬아치)를 면치 못했구나 / 猶不免曹司
매양 까닭 없이 꾸지람만 받고 / 每受無端責
입이 있으나 굶주림은 견디기 어렵네 / 難堪有口飢
하였는데, 이는 실상을 기록한 것이었다. 《지봉유설》
○ 원중(院中)에 관원은 많고 급료는 적어서, 점심 때가 되면 다만 밥 한 그릇과 나물, 젓 한 그릇 뿐이었다. 그때에 기롱하는 자가,
반 가운데 깨진 주발은 배보다 크고 / 盤血破鉢大於舟
좁쌀 밥은 엉긋덩긋 꿩 대가리보다 작다 / 糲飯參差小雉頭
배가 차지 않아 도리어 고프고 / 膓未果然還自惄
말몰이 놈은 남은 밥조차 얻어먹지 못하누나 / 騶童曾不歷餘休
하였다. 전임(前任) 문사(文士)로서 학관이 되어 왔다가, 이것으로 인하여 실직을 얻은 자가 제법 많으니, 그때 사람이 괴원을 활인원(活人院)이라고 하였다. 그뒤에 신숙주가 예조 판서를 겸하여 봉급을 넉넉하게 주기를 청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조금 넉넉하여졌다. 《용재총화》
○ 선조가 지성껏 대국(大國)을 섬겼으므로 표문(表文)과 자문(咨文) 문자는 반드시 친히 참고하고 열람하여서 범연하게 넘기지 않았는데, 괴원의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을 능히 체득(體得)하지 못하여 자신이 지어 바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제술관 허징(許澂)에게만 맡겼다. 허징은 천얼(賤孼)이므로, 식견이 많이 부족하여 그 지은 것이 혹 임금의 뜻에 맞지 못하니, 임금이 여러 번 엄교(嚴敎)를 내려서, “공경(公卿)은 국사를 ‘나 몰라’ 하는 처지에 두고서 오직 허징이 담당하여 근로(勤勞)하게 되니 애처롭구나.” 하고, 이어 허징에게 어떤 물건을 하사하였으니, 대개 여러 신하를 과격하게 꾸짖은 것이었다. 《공사견문》
[주D-001]옥산(玉山)이 무너짐 : 진(晉) 나라 혜강(嵇康)이 풍채가 좋아서 술이 취해 넘어지면 옥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