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楊根)이란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양근’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예로부터 남한강 변에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었다.
버드나무는 일단 뿌리만 내리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속성수이다.
그래서 남한강 변에 심어진 버드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 폭우로 인한 제방의 붕괴를 막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나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어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퍼져나갔고,
순교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졌다.
한편 양근이라는 말에서 양제근기(楊提根基)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이 말은 튼튼한 근원, 기초란 의미로 더욱 놀라운 것은 양근이라는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차지하는 양근 성지의 의미가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현재 양평이란 지명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908년 양근군(楊根郡)으로 전입한 지평군(砥平郡)의 평자와
양근군의 양자가 합해져 오늘날의 양평군이 되었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한 때 강상면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현재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이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李檗)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과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몸소 조과(朝課, 아침기도), 만과(晩課, 저녁기도),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 기도) 등을 바치며 천주교 신앙생활을 실천했다.
당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천주교 창립의 주역들은 신부의 역할을 하며 2년간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그리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 성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양근 성지는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조 베드로는 훗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종손자(從孫子)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 순교부부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1837년 1월에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근으로 가서 머물며
4주일 동안 조선말을 공부한 다음 그 읍내 신자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를 양근으로 불러 그곳에서 함께 부활 축일을 보냈다.
양근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4촌 여동생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이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한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양근 성지와
관련 있는 순교 복자는 조용삼(베드로, 1801년 3월 27일 순교, 독신),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1802년 1월 29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802년 1월 30일 순교, 평신도 지도자), 조숙(베드로)와 권천례(데레사, 1819년 8월 10일 이후 순교, 동정부부)이다.
양근 성지의 중요성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첫째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국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모태이다.
둘째로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난 곳이다. 셋째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진 곳이다.
양근 성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용문사는 권일신이 1785년 봄 명례방(명동)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
형조 관리에게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이후 양근 사람 조동섬과 함께 8일간 침묵 피정을 한 곳이다.
2003년 전담신부 발령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양근 성지는 대형 십자가와 기념성당, 한강변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였고,
2010년에는 순교자 광장에 이숙자 수녀가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순교부부상,
순교 조형물을 세웠고, 감호암 위에 있었던 정자 감호정과 직암정, 녹암정, 쉼터 등을 광장에 마련하는 등 새롭게 단장하였다.
2011년 5월 7일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 및 시설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 후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상,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 등을 설치하고, 2013년 5월 23일에는 양근 출신으로
1868년 5월 28일 서소문 밖 사형터에서 순교한 권복 프란치스코(권일신의 증손자)의 유해를 성지 내에 안치하였다.
양근 성지는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 운동의 거점이자 복음전파의 출발점이었던 성지의 의미를 살려 소공동체 봉사자 및
구역장 반장을 위한 교육의 장이자 선교사들을 위한 훈련도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순교한 곳으로서 참다운 부부애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과 피정에 힘쓰고,
평신도 사도직과 순교자들의 신앙과 행적을 본받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5년 4월 9일)]
대감마을과 주어사 - 교회의 요람지
양평 읍내에서 한강을 넘어 광주 곤지암으로 가다 보면 세월 초등학교를 지나 대감마을(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 더 남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주어말 동네가 있고 그 뒤로 주어사(走魚寺,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높은 산자락이 바로 앵자봉이며, 그 너머에는 유명한 천진암(天眞菴)이 자리잡고 있다.
대감마을은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瀷)의 제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살던 곳으로, 초기 교회에서 유명한 이벽(요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이 모두 권철신의 제자였다.
1779년 겨울, 권철신과 제자들이 주어사를 찾은 이유는 대감마을에서 가까운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때 이벽이 주어사 강학 모임을 찾아가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고 돌아오도록 했으며, 1784년 가을 무렵에는 이승훈이 전한 교회 서적들을
들고 대감마을로 스승 권철신을 방문하여 교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가 창설되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이 대감마을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고
각각 충청도와 전라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곧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앵자봉 너머의 천진암은 일찍이 이벽과 정약용이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반면에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점차 교회사에서 잊혀져만 갔다.
또 초기 교회의 인물 중에서는 정약종, 유항검만이 훌륭한 순교자로 남아 있을 뿐, 이벽과 권일신의 신앙 증거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고,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용, 이존창 등은 배교자의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히 신앙을 버렸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조선 최고의 학자 정약용이 말한 "만리 밖의 성현"은 과연 누구였는지?
슬프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성현(聖賢)은 만리 밖에 있으니, 누가 이 몽매함을 열어 줄 것인가?
머리 들어 세상을 바라보니, 뜻을 깨달은 이들이 드므네.
모방하기에만 급급하니, 오묘한 것을 가려낼 겨를이 없구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시문집 중에서)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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