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성당(龍城聖堂) 구룡공소(九龍公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구룡마을길 361-5(정상리 67))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에 있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용성성당 소속 공소. 공소가 있는 구룡산은 청도군 운문면과 경산시 용성면, 영천시 대창면·북안면의 3개 시군을 접하고 있는 해발 675m 높이의 산으로 피난하여 숨어 살기에 적합한 천연의 지세이다.
첩첩산중인 깊은 산골 구룡산 산정에 위치한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처음에는 구룡산 바로 아래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올라와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설립되었다.
1815년 을해박해 때에 청송 노래산과 진보의 머루산의 교우촌이 파괴됨으로 인해 영천과 경주 지방으로 피난하여 산재하여 있던 신자들이 더 깊은 산속을 찾아 이곳 구룡산에 모여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어 자급자족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신중하고 은밀하게 인근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구룡산 지역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여 모여든 곳으로 경상북도 남부 지역의 주요 피난처였으며, 인근의 대구, 영천, 경주, 밀양 등지에 산재해 있던 신자들간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경상남북도를 잇는 주요 통로 였다. 한편 구룡 공소는 박해로 인한 순교자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배교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이었던 연유로 사료된다.
구룡 공소는 교난을 피하여 온 사람들로 형성된 교우촌이지만 신부가 주재하여 사목하였으므로 성당으로 건립된 곳이다.
1921년 12월 11일 안세화 주교의 사목 방문을 기념하여 새 성전의 건립을 추진하여, 20년간 전全 교우 절미 운동을 전개, 1933년 9월 13일에 성전의 준공을 이루었다.
1993년 이문희 대주교가 부활 미사 집전 후 성지로의 개발을 지시하여, 1995년 공소를 복원하고 피정의 집을 마련하였다.
김보록 신부의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1885년에서 1986년간 구룡 공소의 연 평균 신자 수는 50명이었다.
공소의 미사 시간은 셋째 주를 제외 한 매 주일 오전 7시 30분이며, 셋째 주에는 관할 본당인 용성 성당에서 친교를 나누기 위해 미사를 보고 점심을 함께 한다. 2012년 현재 구룡 공소의 신자 수는 20여 명이다.
본당 입구 공터에 고상이 있으며, 본당 정문에는 ‘천주공교회성당’이라는 현판이 있으며, 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성모상이 있고, 우측에 본당 건물이 있는데 4칸 집으로 ‘성모 설지전’이다.
왼쪽 벽 앞에는 1921년 12월 21일 구룡 공소 성당 축성을 보도한 『대구 매일 신문』 기사를 찍은 축성식 공고문 사진이 있으며, 벽의 좌우로는 안세화 주교 때 만든 14처상, 뒤편 벽 중앙에는 1957년 당시의 성당 전경 사진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공소(公所)는 본당(本堂)보다 작은 교회 단위로서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고 대신에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첨례를 보거나 공소 예절이 행해지며,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해서만 성사(聖事)가 집행된다.
천주天主강생降生 일천구백삼십년一千九 百三十三年 음력陰曆 구월九月삼일三日 입주立柱 상량上樑
구룡 공소 성당의 특징은 바티칸공의회에 따라 다른 성당의 제대와 반대로 신부님이 제대를 등지고 미사를 집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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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산 첩첩산중 675미터 산중에는 미세먼지도 없고, 하늘도 맑아 여기가 천국 가는 길목인듯
우리 일행 5명은 구룡공소 방문의 영광과 함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반 사찰은 보통 신도들로 북적이고 각종 시설들이 다듬어져 있어 화려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 공소는 봄빛은 밝고 고요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엄숙하고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천주교의 진리가 그대로 나타나는듯했습니다.
인근 주민들도 친절하고 역사적으로 정신이 이어져 있는 느낌이 있어 존경심까지 가졌습니다.
90년 넘은 소중한 건축 유산과 하느님의 진리가 그대로 숨쉬는듯한
뜻깊은 역사와 정신이 오래오래 전승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