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_이승희(1965 ~ )
여기는 지상에 없는 방 한 칸. 나는 여기서 봉인된 채 녹슬어
가는 중입니다. 지리멸렬한 문장들이 구름처럼 떠돌다 목마름
으로 내려옵니다. 내가 꿈꾸는 것은 매일 조금씩 지워지는 것.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를 덜어내는 일. 이 도시가, 사회가,
친구가, 애인이, 지하실 박스 속에 담겨 몇 년째 풀지 못해 썩어
가는 책들이 나를 들춰보고 조금씩 떼어먹기를, 그리하여 어느
여름날 선풍기 바람에 흔적 없이 날아가버릴 수 있으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부치지 못한 대로 잠들고, 집 나가 돌아오지 못한
마음은 살아서 내 죽음을 지켜보길. 그러니 하나도 새롭지 않은
절망이여 날마다 가지 치고 어서 꽃피워 융성해지시기를. 내가
지워진 자리, 내가 지워진 세상을 가만히 만져본다. 따뜻하구나,
거기 나 없이 융성한 저녁이여.
[2012년 발표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에 수록]
헨델(1685-1759)이 48세 때 작곡한 하프시코드 모음곡 D 단조 中
제3곡 사라방드(Sarabande)이며, Voices of Music 연주입니다.
https://youtu.be/xOLQd_pUbx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