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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청 사이트에서>)
~ 남해 상주 양아리 석각(사진은 첨부파일에)에 대한 기사
지정번호 : 도기념물 제6호
지정일자 : 1974.02.16
위치 : 상주면 양아마을
규모 : 가로 7m 세로 4m
자연암 위에 음각 "수수께끼 간직한 고대 문자, 해석하러 가 볼까요" 천하를 통일한 중국 진시황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 서불을 불렀다. "서불아 너에게 동남동녀 500명을 줄 터이니 불로초를 구해 오라" 서불은 산 넘고 물 건너 남해 금산까지 찾아왔지만 불로초는 구하지 못했다. 늙지 않게 해 주는 풀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한동안 사냥만 즐기다가 금산을 떠나면서 바위 위에 글을 새기고 갔다. 이런 이야기를 간직한 바위가 남해에 있다. 남해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상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두모마을 표지석과 함께 두모포로 가는 길이 나온다.두모마을 표지석에서 상주쪽으로 5백여m 가면 길 왼쪽에 금산 부소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이 길을 따라 20분 정도 산을 오르면 '상주리 석각'이라 부르는 글이 새겨진 거북바위에 닿는다. 이 문자는 고대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유적이다. 바위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이곳 암각화는 관심있는 학자들의 현장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서불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왔다가 사냥을 즐기다가 갔다"라고 쓴 글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들도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문자라고 하는 사람, 고대 거란족의 문자라고 하는 사람,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문자라는 사람, 산스크리트 계통의 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귀인의 사냥터'라는 그림 표지라고 주장하는 사람 등등 아주 많은 학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답은 '알 수 없다'가 정확하다. 서불 일행은 불로초를 구하려 온 것이 아니라 망명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망명한 자들이 한반도에 건너와 일부는 일본으로,일부는 남해안에 그대로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중 일부가 서불 일행이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부산을 비롯해 경남·제주 일원에는 신선사상이나 서불과 관련된 전설이 숱하다. 이처럼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거북바위 옆에는 거대한 바위벼랑이 있다.그위로 올라가면 두모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한편 두모마을 표지석 바로 앞 집의 고구마밭 이랑에는 비늘 달린 짐승의 몸통 같이 희귀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이 비늘무늬 바위는 거북바위, 동이바위와 더불어 상주리 일대 바위 문화의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한 요약>)
~ 양아리 석각에 대한 자료가 있는 고문서
환단고기는 한국 상고사의 기원과 미완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역사서로서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 초기에 편집하였다.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李裕?)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이다.
내용은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대 한국의 역사,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 등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 있다. 상하 2편으로 이루어진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행적을 알 수 없는 원동중(元董仲)이 쓴 것이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는데, 1421년에 세종이 전국에 수집 명령을 내린 〈삼성기〉와 책명이 일치한다. (첨언~조선은 전국 각지에 보유중인 고려이전의 고서를 수집하여 불태웠으며, 책을 보유한 이가 책을 내놓지 않으면 극형에 처했으며 태종이 수렴청정하는 세종시기가 가장 극악했다함. 조선왕조 내내이러한 정책은 변함이 없었다고함)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첨언~당시 세종은 전국에서 수집한 고서를 불태웠음. 또한 조선시대 내내 고사서를 금서로 규정하고 단속해옴) 〈단군세기〉는 1363년(공민왕 12) 문정공 이암(李?)이 전한 내용으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칭한 단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대 단군 왕검부터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에 걸친 단군 조선의 시기별 역사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것으로, 상·하·가섭원부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조 해모수에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단군세기〉의 속편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했는데, 한국(桓國)·신시시대·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천지만물의 생성으로부터 단군과 광명숭배, 3조선, 단군 경전, 민족을 드높인 고구려·발해·고려의 대외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군 이래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둔 고유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태백일사〉에는 1923년에 중국 뤄양[洛陽]에서 천남생(泉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실려 있다. 나아가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 책을 계승했다는 이유립이 편찬자이며 4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第五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의 낭아리 설명분>) 현재 행정구역상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로 되어 있는데, 본문에 의하며 남해현(南解縣) 낭하리(郎河里)로 되어 있다. 양아리의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은 환웅시대(이후 단군조선, 막.번.진조선,마.진.변한,부여,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짐)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삼신께 제를 드리다>라는 의미의 글자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배우는 한자의 서체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설명이 곁들여 있다. 말하자면 신시시대의 글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당시 제국을 다스리는 천황들은 몸소 국경을 순수하며 경계를 확정하고 민정을 시찰하는 일을 주요 국정과제로 여겼음을 이후에 진시황의 국경순수나 고구려의 제왕들이 역사에 남긴 순수기록 들을 통하여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我國文字 自古有之 今南海縣郞河里岩壁 有神市古刻 夫餘人王文所書之法 類符擬篆 紫府先生之內文 太子扶婁之五行 皆出於桓檀之世 而殷學漢文 盖王文遺範也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조각이 있다. 부여사람 왕문이 쓴 바의 류부의전과 자부선생의 내문과 태자 부루의 오행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시대 익힌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진저!
留記云 神劃 曾在太白山靑岩之壁 其形如 世稱神誌仙人所傳也 或者 以是爲造字之始 則其劃直一曲二之形 其義 有管制之象 其形其聲 又似出於計意然者也 故 以神人之德 愛求人世以準焉 則眞敎之行也 必人事皆正也 賢能在位 老幼公養 壯者服義 多者勸化 姦詐息訟 干戈閉謀 是亦理化之一道也
유기에 '신획 일찌기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었거늘' 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 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를 글자를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곶 그 획은 직일과 곡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의 모양도 있다. 그 형과 소리는 계획된 바가 없지 않은 듯하니 생각컨재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고로 신인의 덕애로써 사람 세상을 고르게 하니 이에 담된 가?딤이 행해지고 결국 세상의 일이 모두 바로 된다. 현능한 사람은 벼슬에 있고 노유는 공개적으로 봉양 양육하며 장년은 의에 복종한다. 많은 사람이 감화되니 간사한 자는 소송을 그치고 창칼은 음모의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이화의 한 길이다.
大辯說註 曰南海縣郞河里之溪谷岩上 有神市古刻 其文曰桓雄出獵 致祭三神 又曰大始傳古 只憑口舌 久而後 乃形以爲妓 又復妓變而爲之字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蓋文字之源 莫非出於國俗之所尊信也 自一氣而析三 氣卽極也 極卽無也 夫天之源 乃貫三極 爲虛而空 幷內外而然也 天之宮 卽爲光明之會 萬化所出 天之一神 能體其虛而乃其主宰也 故 曰一氣卽天也 卽空也 然 自有中一之神 而能爲三也 三神 乃天一地一太一之神也 一氣之自能動作 而爲造敎治三化之神 神卽氣也 氣卽虛也 虛卽一也 故 地有三韓 爲辰弁馬三京之韓 韓卽皇也 皇卽大也 大卽一也 故 人有三眞 爲性命精三受之眞 眞卽衷也 衷卽業也 業卽續也 續卽一也 然 一始一終 回復其眞也 卽一卽三 對合於善也 微粒積粒 一歸之美也 乃性之所善也 乃命之所淸也 乃精之所厚也 更復何有曰有曰無也哉 眞之爲不染也 其染者爲妄也 善之爲不息也 其息者爲惡也 淸之爲不散也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기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는 곧 극이다. 극은 즉 무다. 저 하늘의 근원은 곧 삼극을 꿰뚫어 허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을 곧 빛이 모이는 곳, 만 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은 능히 그 허를 체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는 즉 천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의 신이 있어 능히 삼이 된다. 삼신은 곧 천일 지일 태일의 신이다. 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은 죽 기이고 기는 곧 허이며, 허는 즉 일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이 있다. 성명 정의 삼수의 진이라 한다. 진은 즉 충이고, 충은 곧 업이고, 업은 곧 속이며, 속은 즉 일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으로 되오는 것을 말한다. 곧 일은 즉 삼이라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합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로 되돌아 오는 미이다. 곧 성의 선이라 하는 것이고 곧 명의 청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의 후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 물듦을 망이라 하고 선을 불식이라 한다. 그 식을 악이라 하고 청을 불산이라 한다.
其散者爲濁也 厚之爲不縮也 其縮者爲薄也 所以執一含三者 乃一其氣而三其神也 所以會三歸一者 是亦神爲三而氣爲一也 夫爲生也者之體 是一氣也 一氣者 內有三神也 智之源 亦在三神也 三神者 外包一氣也 其外在也一 其乃容也一 其統制也一 亦皆含會而不謗焉 其爲字之源 含會執歸之義 存焉也 산을 탁이라 한다. 후를 불축이라 한다. 축을 박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은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하는 이유는 역시 신을 셋으로 하고 기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사는 자의 체는 일기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고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神
市有算木 蚩尤有鬪佃目 夫餘有書算 其曰算木 一二三( ) 也 其曰佃目 ( )也 檀君世紀 檀君嘉勒二年 三郞乙普勒伶正音三十八字 是謂加臨多 其文 曰 신시엔 신목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이 있었다. 그 산목이라하는 것은 1234567890 이다. 또 전목은 1234567890 이다. 단군 갸륵제 2년 삼랑 을보록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라고 했다 한다. 그 글을 보면 이렇다.
李太白全書 玉塵叢談 云 渤海國 有書於唐 擧朝無解之者 李太白 能解而答之 三國史記 云 憲康王十二年春 北鎭奏 震國人入鎭 以片木掛樹而去 遂取以獻 其木書十五字 云 寶露國 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 <이태백전서>의 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하고 있다. <삼국사기>엔 [헌강왕 12년의 봄 북진으로부터 적국인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음을 상주하고는 마침내 그 나무에 쓰여진 15자를 취하여 바쳤는데 <보로국과 흑수국의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통하고자 왔노라>고 써져 있다]고 했다.
且高麗光宗時 張儒 接伴使著聞 初 避亂到吳越 越氏有好事者 刻東國寒松亭曲於琴底 漂逆波 越不得解其辭 適 遇張儒 拜問其辭 張儒卽席 以漢詩解之 曰 月白寒松夜 波晏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鷗 盖琴底所刻文 疑古加臨多之類也 또 고려의 광종 때 장유는 접반사로서 저명한 사람이다. 처음 난을 피해 오월에 이르었다. 월씨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한송정의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파도에 띄워 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때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로써 이를 풀었다. "달빛 소나무에 하얀 밤. 파도까지 잠든 경포의 가을 애처로이 울며 오가는 한마리 바다 갈매기여!" 아마 거문고 바닥에 각문한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이었을 것이다.
元董仲三聖紀注 云 辰餘倭國 或橫書 或結繩 或淇木 惟高麗 摸寫穎法 想必桓檀上世 必有文字摸刻也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 [왜 진 여국은 혹은 휭서하고 혹은 결승하고 혹은 계목한다.]하고있다. 애오라미 고려만이 영법을 모사했으니, 생각컨대 한단의 상고시대엔 반드시 문자의 모각이 있었을 것이다.
崔致遠 嘗得神誌古碑所刻之天符經 更復作帖以傳於世 卽與郞河里岩刻 的是皆實跡也
최치원은 일찌기 신지의 옛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를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체의 자취이다.
世傳 神市有鹿書 紫府有雨書 蚩尤有花書 鬪佃文束 卽其殘痕也 伏羲有龍書 檀君有神篆 此等字書 遍用於白山黑水靑邱九黎之域
세상엔 전하기를 [신시에는 녹서가 있고 자부에겐 우서가 있고 치우에게는 화서가 있어, 투전문 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겐 용서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 청구 구려등에 쓰여졌다]고 했다.
夫餘人王文 始以篆爲煩 而稍省其劃 新作符隸而書之
부여사람 왕문은 처음 전문을 번거롭다 여기고 좀 그 휙을 없애고 새로 부예를 만들어 사용했다.
秦時 程邈奉使於肅愼 得王文隸法於漢水 又因其劃而小變之形 是今之八分也 진나라때 정막은 숙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를 한수에서 얻었고, 또 그 휙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형으로 고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이다.
晉時 王次仲 又作楷書 次仲 王文之遠裔也今究其字之所源 則皆神市之遺法 而今漢字 亦承其支流也 明矣
진나라의 왕차중은 또 해서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남해군청] 남해군, ~'서불과차' 본격 연구 돌입
[연합뉴스 보도자료 2006-03-31 12:40] -
상주면 금산 암각바위 탐사 용역 의뢰 남해군이 일명 '서불과차'로 해독된 바 있는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금산의 암각바위에 대한 서예사와 금석문적 재평가를 위해 서울대학교 국제서복학회에 서불(또는 서복) 관련 역사와 전설에 대한 탐사 용역을 의뢰하였다.
남해군 관계자는 전경수 책임연구원을 비롯한 6명의 연구진이 31일부터 2일간 '서불과차'와 주변유적을 둘려보고 연구에 돌입하게 되며 용역이 끝나는 11월경에 지역주민과 향토사학자 등 관계자와 함께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남해 상주리 석각(지방기념물 제6호)은 중국 진시황때 삼심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 서불이 금산을 찾아와서 사냥을 즐기다 떠나면서 자신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새긴 것이라는 일명 '서불과차'로 통용되고 있으며, 조선후기 이래 여러 학자들에 의해 해독된 바 있지만 이것을 신시(神市)와도 연결시키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암각의 진실성 여부, 서불과의 관련성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채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전개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일고 있어 금석학, 서예사, 종교학, 민속학, 인류학 등 전문연구자들이 이번 연구에 참여하여 그 내용에 대한 재평가를 내릴 것으로 보여진다. 남해군 일대에서는 중국의 역사서『史記』 '진시황본기'에 등장하는 서불(또는 서복)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것은 금산바위의 도상을 '서불과차'로 해석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첨언~진시황시대의 남해는 지금의 홍콩을 중심으로한 광동성 남부의 거대한 남해郡
이 유일한 남해라는 지명의 출발이다.)
이와 관련된 전설은 남해일대에 많이 분포 되어있으며, 이를 근거로 제주도 서귀포시는 이미 서불의 역사를 지역활성화와 연결시키는 문화재생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웃 일본과 중국에서도 서불의 전설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문화교류를 위한 교두보로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군 관계자는 '서불과차' 연구용역이 완료되면 동아시아적 구도 속에서 남해를 이해하는 초석이 마련되고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대에 남해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였다.
[남해군청] 민선4기 하영제 남해군수 취임사
[연합뉴스 보도자료 2006-07-03 14:20]
존경하는 50만 내외군민 여러분! 그리고 오늘 저의 취임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자리를 같이하신 박희태 국회의원님, 김영조 도의원님, 양기홍 도의원님, 남해군 의회 의장님을 비롯한 군의원 여러분, 관내 기관 단체장님, 그리고 바쁘신 중에도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하신 향우 회장님과 공무원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 군민 여러분! 그간 농번기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그리고 한창 바쁜 농사철에 선거를 치르시느라고 얼마나 번거로우셨습니까? 이제 농번기도 지나고 우리의 눈길이 미치는 곳은 모두 푸른색으로 갈아입었습니다. 7월의 눈부신 태양 아래 빛나는 우리 남해의 들판과 하늘과 바다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남해 땅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의 조상님들은 억새풀과 같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 땅을 낙도로 가꾸어 우리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조상님들로부터 일점선도(一點仙島)를 물려받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다시 이 땅을 훌륭하게 가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엄숙한 책무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군민 여러분 앞에 다시 섰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사랑과 선택을 받아 민선 3기 군수로 당선되어 취임선서를 하던 4년 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시련과 영광을 함께 하였습니다. 전무후무한 태풍 매미가 우리 남해를 덮쳤을 때 그 참상 앞에 처음에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남해인들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같이 손잡고 일어서는 전통을 바탕으로 전국에서도 모범적으로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미증유의 태풍 내습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이를 힘 모아 복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남해의 각종 산업 인프라와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시설들을 오히려 수십 년 앞당겨 정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함께 손잡고 화합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군민 여러분들이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저는 군민 여러분들을 태산같이 믿고 우리 공무원들과 함께 몸 바쳐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 남해군의 행정 수준은 이미 전국적으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고 전국의 많은 자치단체가 남해군의 시책을 벤치마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해군정의 선진행정 성과는 주요한 것만 살펴보더라도 지방자치 10년을 평가하는 지방자치대상, 최우수 공약상, 대한민국 지방자치경영대전 최우수상, 한국관광경영대상, 대한민국 스포츠 레저문화대상 등과 같은 전국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다수 수상하여 50만 내외군민들의 자존심을 한 단계 높여 드린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보건기구로부터 국제건강도시,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받아 남해군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크게 높였으며 우리 남해가 앞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개인적으로는 전문평가 기관으로부터 차세대 정치지도자, 한국의 CEO, 자랑스런 향토인 등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민선 3기 군수로 취임하면서 군민 여러분께 약속드린 공약들을 지난 4년간 훌륭하게 완수하였으며, 특히 모범적인 공약추진으로 전국의 자치단체장 중에서도 최우수 공약상을 수상한 것을 군민 여러분 앞에 떳떳하게 보고 드립니다. 이러한 성과는 항상 저와 우리 공무원들에게 무한한 애정과 관심으로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신 50만 내외군민 여러분들의 덕분으로 생각하고, 오늘 제4기 민선군수 취임과 더불어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존경하는 군민 여러분! 이제 저는 이러한 지난 4년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가 힘만 합치면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여러분과 함께 헤쳐 나가고자 합니다. 앞으로 제가 추진해 나갈 주요 정책기조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보물섬 남해건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산업기반을 확충하여 주민들이 고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풍성하고도 싱싱한 보물섬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이미 남면 덕월·오리·평산 지구에 1,200억원 이상이 투자되는 하모니 리조트 조성사업이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추진 중인 남해안 관광벨트 사업 중에서도 모범적인 민자유치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고, 앞으로 우리 남해의 지역경제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하모니 리조트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계기로 앞으로 우리 남해에 맞는 차별화된 관광 인프라 구축을 위하여 관내에 산재해 있는 간사지를 활용한 각종 관광·체육시설을 적극적으로 확충하여 도시민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주민들의 소득창출 기회를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또한 우리 군의 주력산업의 한 축인 스포츠산업 육성을 위한 노력에도 박차를 가하여 국제적인 스포츠 산업도시로 성장시키겠습니다. 관광 인프라 구축은 경남도의 이순신 프로젝트 시책과 연계하여 이락사와 충렬사 역사체험 관광지 조성 및 임진란 평화공원 조성, 김만중 유배지 정비, 그리고 유배문학관 및 국제 탈 공연 예술촌 건립, 서불과차 유적지 체계적 개발 등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 추진도 동시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략~
첫댓글 남해읍 곡내리(谷內里) 또는 골안(谷內) 뜻이 "골짜기에 있는 마을"쯤으로 익히 알고 있었는데, 자전(字典)을 살펴보니 "곡내(谷內)"는 시내(市內) 또는 읍내(邑內) 또는시가지(市街地)의 중심(中心)"의 뜻을지녔다함. 전국에 안골(內谷里) 바깥골(外谷里)로 쓰이는 지명이 많음을 비교하시길
어이쿠 정사장 !!! 여기서 만나는 구먼..!!! 반갑네..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