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트 니어링은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을 네 시간씩 나눠 썼다.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 활동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는 시간 네 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고 그의 자서전에 썼다.
며칠 동안 과천도서관에서 낮 시간을 자료 수집을 하며 보냈더니 오늘은 마침 일요일,
색다르게 보내고 싶어 식빵에 버터 발라 굽고 살구쨈과 땅콩버터를 발라 맞붙였다. 그리고 단감을 여덟 토막 내고 호박즙도 먹거리 자루에 넣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도서 자료실에 갈까하여 홈을 열어보니 토, 일요일은 쉰다.
그래도 옷을 따뜻하게 차려입고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과천도서관과의 갈림길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부림동 문화의 집 옆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대공원나들길’이라는 팻말이 달려있어 늘 궁금해 하던 길로.
이 길은 사람과 자전거와 동물만 다니는 숲길이다.
꽃을 든다면 대공원 가는 길에 참 잘 어울릴 거란 생각을 하면서 지나는 사람들을 보니 조깅족들은 빨리 지나치고, 장님인 듯한 어른은 눈을 고요히 내리고 지팡이를 먼저 춤추게 하면서 저는 처음 걸음을 떼는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틱 낫한 스님이 봤다면 함박 미소를 지을 평화로운 걸음이었다.
길아, 고맙다. 하며 미술관 셔틀버스 타는 곳을 지나쳐 산으로 난 길로 들어섰다.
이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등산객이다.
집시같이 옷 입은 사람은 나 혼자라 의아해하며 흘금흘금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예전에 지리산에서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미숙이 혜숙이와 치마를 입고 산길을 걸을 때,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산에서 동물원에서 탈출한 공작새라도 만난 듯 옷보고 놀라고 심지어 뭐라 흉보기까지 한 그 때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마침 약수터를 만나니 옛 친구들 얼굴마냥 맑고 향기로운 물맛이다,
산자락 동물병원 옆에 직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들여다보니 타고 들어온 차를 통째로 소독해야 하는 모양이다.
신성한 동식물이 사는 곳이니 속진일랑은 말끔히 씻고서 들어가야지, 암.
청계산이란 거대한 도서관에 꽂힌 책들이 아닌가. 직원들이란. 들랑 달랑...
다리를 건너니 바로 동물원 앞이다. 거대한 호랑이가 앉아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예전에 ‘세모’ 라는 회사에서 한강 유람선으로 만든 건데, 무섭고 불쾌감을 준다는 여론에 밀려 이곳으로 실려 와서는, 대공원 마당을 뱅뱅 도는 기차 역할도 하다가 이젠 조각 작품인 척 하고 동물원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미술관으로 들어가 멤버십 카드를 만들었다.
일 년 동안 전시작품도 마음대로 보고 카페, 아트샵은 할인도 된다.
우선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사서 빵과 야곰야곰 먹으며 서가에서 스코트 니어링의 자서전을 꺼내와 펼친다.
사진들이 고전 영화처럼 눈에 익다.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는 일을 멀리할 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 날 그 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세울 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 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 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내가 쓴 2009년의 나날세움인 양 두근거려하며 빨갛고 작은 수첩에 옮겨 적고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않은 채 새 그림책 계획을 세워 나갔다. 꿀맛인 샌드위치는 꿀처럼 혀에서 녹아내렸고 단감도 파리지옥이 삼킨 갑충처럼 스르르 녹아 없어져 버렸다. '나'라는 책을 읽는 시간도 꽤나 달콤하다. 서늘한 숲이 보이는 미술관 카페에서라면.
주변에 미술관 나들이 온 가족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물밀듯이 들어와 곧 귀안에 가득차자 벌떡 일어나 전시회를 둘러보았다.
박재곤 유작전, ‘미스테리오’
‘미스테리오’란 스페인어로 ‘신비’라는 뜻이다.
'인간의 지력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까닭 없음, 그리고 그 까닭 없음의 성스러움과 그에 대한 경외감이 강하게 내포되다. 즉, ‘미스테리오’는 단순히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알 수 없음이 전달하는 놀라움과 두려움, 매혹을 함께 전달한다.'라는 글자가 흰 벽에 박혀있다.
박재곤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을 떠나 20여년의 시간을 아마존, 칠레, 페루등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한다.
100여점의 그의 그림에서 거친 열정의 숨소리와 바람을 닮은 발자국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특히 바틱 작품들이 나는 좋았다. 유랑, 순례의 길을 지나 가벼운 처음으로 돌아가 계실 작가에게 나의 꿈꾸는 눈빛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그 분이 평생 추구한 신비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남미의 고대문명들과 우리의 옛 상징무늬들이 봄의 새처럼 꿈꾸며 날았다.
다음으로 ‘젊은 모색전’을 봤는데, 부스에서 페인트 냄새도 많이 나고 그림들도 어지러웠다.
직설화법으로 쏟아내는 말들이 너무 강해 오감을 괴롭혔다. 아이디어만은 젊은이다웠다.
작가, '고등어' 의 불온하고 불안정한 그림들은 아름다워 두세 번 꼼꼼히 보다 아트샵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람은 많은 데 취할 건 다양하지 않은 건 카페와 마찬가지.
공예 쪽에서 이 책 저 책 펼쳐보다가 미술관을 나왔다.
춥고 배고파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바느질감을 그리며 셔틀버스에 올랐다.
오늘 나의 ‘네 시간’은 느리고 평화로웠다.
첫댓글 가온님 새날 힘차게 여셨지유? 충청도 사람은 다 웃긴다믄서유? 개그감각 늙지 않게 총기 머금고 살어유, 우리~
지난해 여름 입산캠프를 마치고 해민해랑 외할아버지 서재에서 세간에 스쳐듣던 헬렌/스콧 니어링부부의 자전을 보았시유. 누구나 완벽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이 살았던 조화로운 삶의 부분을 분홍할미꽃님과 이웃 후두둑샘은 이미 살아가고 계시다는 생각이 드네유. 말투 만큼이나 느리고 평화로운 분홍할미꽃님의 삶도 세속과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놓을 것을 놓을 줄 아는 놓음이 있어서 이겠지유. 올해도 세상의 누구보다 풍요로운 새날을 열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