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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包圍)를 풀다【해위(解圍)】
○ 대륙조선사연구회 “리 영준”님의 글을 보니........전회(前回)의 서두(序頭)에 있는 “원문” 내용을 가지고, 반론(反論)을 제기(提起)하셨는데, 이 분은 “문무의 조선사” 카페 글만을 가지고 시시비비(是是非非) 따져보자는 것인지, 아니면 “대륙조선사”를 주장하는 모든 카페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져보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다.
뭐, 좋다. <우리 카페>의 글만을 가지고, 따져본다고 해서 “문무의 조선사” 카페의 활동(活動)이 위축(萎縮)되거나, 지장(支障)을 받는 일은 없으니, 상관(相關)치 않는다. 『다만 아쉬운 점은 “좀 더 성숙(成熟)되고, 객관적(客觀的)이며, 근거(根據)있는 논리(論理)로 무장(武裝)한 후에 가능한 문제”들을 익기도 전에 따 먹으려 한다.』는 점이다.
※ 조선사(朝鮮史)의 “반도(半島)영토(領土)론”이나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는 이제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큰 위안(慰安)이 된다. 원전(原典)에 의한 “조선(朝鮮)영토(領土)의 반도(半島) 땅 이야기는 더 이상(以上) 갈 곳이 없다.”는 점은 분명(分明)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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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제22권. 편서잡고 2 : 송 사 전(宋 史 筌) 고려열전(高麗列傳)편을 보면 :《 三 年。遣 行 營 道 統 使 康 兆 等。率 兵 三 十 萬。以 禦 契 丹。契 丹 主 自 將 步 騎 四 十 萬。渡 鴨 綠 江。圍 興 化 鎭。擒 康 兆 等 于 通 州。攻 西 京 不 拔。解 圍 而 東。詢 奔 羅 州。契 丹 焚 開 城 而 退。詢 還 開 城。: 3 년, 행영도통사(行 營 道 統 使) 강조 등에게, 군대 30만을 인솔하게 하여, 거란의 침입을 막도록 파견하였는데, 거란 주(契丹 主)가 직접 보병과 기병 4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흥 화 진(興 化 鎭)을 포위하여, 강조 등을 통주(通 州)에서 사로잡고, 서경(西京)을 공략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므로, 포위를 풀고 동(東)쪽으로 진격하니, 순(詢) 은 나주(羅州)로 도망하였다. 거란의 군대가 개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가자, 순이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출처 : 고전번역원의 것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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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에서, 『 攻 西 京 不 拔. 解 圍 而 東。詢 奔 羅 州. 契 丹 焚 開 城 而 退. 詢 還 開 城. : 서경(西京)을 공략하였으나 함락(陷落)시키지 못하자, 포위(包圍)를 풀고, 동쪽(東)으로 진격(進擊)하니, 순(詢:고려왕)은 나주로 도망을 하였다. 거란(契丹)이 개성에 불을 지르고 물러가자, 순이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위 글 중 “해위이동 : 解 圍 而 東” 이란 구절(句節)의 “해위(解圍)”의 뜻을 “포위를 뚫고(다)”라고 번역(飜譯)을 해야 『옳은 것이다』라는 반론(反論)을 제기(提起)하였다.】이 말은, <고전번역원의 번역>은 『포위를 풀고』라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긴데,
본인(本人) 역시 『고전번역원의 번역>이 옳은 것이다.』라고 주장(主張)한다.
○ 한자숙어를 보면,
㉠ 해위(解圍) : 포위한 것을 풀다.
㉡ 해위(解圍) : 사방(四方)을 둘러싸고 있던 것을 풀어 줌. <역사용어> : 유배(流配)된 죄인(罪人)이 거처(居處)하는 곳을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를 없애 줌.
㉢ 解圍(해위) : 포위(包圍)한 것을 풂. 위리를 풀어 줌
○ 위의 글에서 : 거란(契丹)의 보기(步騎) 40만이 서경(西京)의 황성(皇城)을 포위(包圍)하고, 몇 날 며칠 공격(攻擊)하였으나, 고려(高麗)군의 끈질긴 수비(守備), 방어(防禦)와 성(城)의 견고(堅固)함 때문에 함락(陷落)치 못하자, 거란(契丹)이 작전(作戰)을 변경(變更)하여, 직접(直接) 황도(皇都)인 개경(開京)을 때리기로 하고, 서경(西京)을 포위(包圍)하고 있던 모든 보기(步騎)에게, 말머리를 동(東)쪽으로 돌려, 개경(開京)으로 향(向)하게 끔 한 것이다.
서경(西京)을 포위(包圍)하고 있던 거란(契丹)의 병사(兵士)들은 이 명령(命令)이 떨어지니, 포위(包圍)를 풀고, 동(東)쪽으로 진군(進軍)하게 되는 것이다.
곧 서경(西京)의 포위(包圍)를 푼 것은 몇 날 며칠【 역사서(歷史書)에는 “5일 동안 공략(攻略)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하였다.】을 공격(攻擊)해도 함락(陷落)시킬 수 없으니, 포위(包圍)를 풀고, 그 병사들을 데리고 동(東)쪽의 개경(開京)인 “동경(東京)”을 공략(攻略)키로 작전을 변경(變更)하여 진군(進軍)하니, 고려왕(高麗王) “순”은 놀라서 비빈(妃嬪)들과 함께 남(南)쪽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개경(開京)이 동경(東京)”이 된 것은,
『후량(後 梁) 균 왕 (均 王 말제(末 帝)를 가리킴) 용덕(龍德) 2년이다. 태조 5년 태봉(太 封)의 왕(王) 궁예(躬 乂)가 살펴보건대, 동사에는 태봉(太 封)이 태봉(泰封)으로 되었고, 궁예(躬 乂)가 궁예(弓裔)로 되었다. 성품이 잔인하자, 해군통수(海軍統帥) 왕건(王建)이 이를 죽이고, 스스로 왕(王)이 되어 다시 고려왕(高麗王)이라고 칭하였으며,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왕건(王建)은 검소하고 관대(寬大)하였으므로 백성(百姓)들이 편안(便安)하게 여겼다. 《자치통감》』으로 확인(確認)할 수 있다.
아래의 글을 더 보자. 요(遼)와 고려(高麗)가 어떤 방향(方向)에서 서로 대치(對峙)하고 있었는지를.........!!!!!!!!!!!!!!!!!!! <해동역사본문(海東繹史本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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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遼) 성종(聖 宗) 통화(統 和) 원년 성종 2년> 10월에, 장차 고려(高麗)를 정벌하고자 하여 ‘성종’이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 말지(耶律 抹 只)’가 거느린 병마(兵馬)를 친히 사열(査閱)하였다. ‘병 오’에 ‘선 휘 사 겸 시중(宣 徽 使 兼 侍中) 포 영림(蒲 領 林)’ㆍ‘아 긍 덕(牙 肯 德)’ 등에게 명하여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동(東)쪽으로 고려(高麗)를 토벌하게』 하고는 기고(旗鼓)와 은부(銀 符)를 하사하였다. 《요사》
○ <3년 성종(聖宗) 4년 7월> 초하루 ‘갑 진’에 모든 도(道)에 조서를 내려 군사(軍士)와 무기(武器)를 정비하여 『동(東)쪽으로 고려(高麗)를 정벌(征伐)』하러 가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8월 계유에 요 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고려(高麗)를 정벌(征伐)하는 일을 파(破)하였다. 《상동》
○ 3년에 <성종 5년> 북쪽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거란(契丹)을 정벌하였다. 【본인 주 : 송(宋)나라가 요(遼)를 쳤다는 말이다.】고려(高麗)가 거란과 국경(國境)을 접하고 있으면서 항상 거란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이에 감찰어사 한국화(韓 國 華)를 보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조서는 예문지에 나온다. 이보다 앞서 『거란이 여진(女眞)을 칠적에 고려(高麗)의 경계(境界)를 거쳐 군사를 출동하였기 때문에 여진(女眞)은 고려(高麗)가 거란의 군사를 유도하여 화근을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
○ (중략). 하물며 『거란은 요해(遼海)의 바깥에 끼어 있고 또 대 매하(大 梅 河)ㆍ소 매하(小 梅 河)의 두 강으로 막혀 있으며』, 여진ㆍ발해는 본래 일정한 주거지가 없으니, 어떤 경로를 통해 오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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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에 고려(高麗)의 수장(守 將) 탁 사정(卓 思 正)이 요(遼)나라 사신(使臣) 한 희손(韓 喜 孫) 등 10명을 살해(殺害)하고는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나와서 항거(抗拒)하였다. ‘고정(高 正)’이 도중에 머물러 있다가 ‘탁 사정’에게 포위(包圍)되었다. ‘고정’이 형세 상 고려(高麗)의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휘하(麾下)의 장사들과 함께 포위망(包圍網)을 돌파해 나왔는데, 죽거나 부상당한 사졸이 아주 많았다. 이에 ‘마보우’ 등이 되돌아왔다. ➡ ‘을 름’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서 ‘탁 사정’을 치게 하니, ‘탁 사정’이 마침내 ‘서경(西京)’으로 도망쳤다. 5일 동안이나 포위(包圍)하고 있으면서도 함락(陷落)시키지 못하였다. 성종(聖 宗)이 성(城)의 서쪽에 주필(駐蹕)하였다. 고려(高麗)에서 예부 낭중(禮部 郞 中) 발해타실(渤 海 陀 失)이 와서 항복하였다. 경자에 성종이 ‘소배압’과 ‘야율 분노’ 등을 파견하여 개경(開京)을 공격하였는데, 서령(西 嶺)에 이르러서 고려(高麗) 군사를 만나 격파하고서, 수천 급을 참수하였다. 고려왕(高麗王) ‘왕순’이 변성(邊城)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성(都城)을 버리고 평주(平州)로 도망하였다. 이에 ‘소배압’과 ‘야율 분노’ 등이 개경(開京)으로 들어가서 왕궁(王宮)을 불사른 다음 백성(百姓)들을 위무(慰撫)하고서 청강(淸江)으로 와 있다가 회군(回軍)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위의 본문(本文) 내용으로 보면, “해위(解圍)”는 “거란(契丹)”군이 “서경(西京)의 포위(包圍)를 푼 것이다.” 따라서 “포위를 뚫고”라는 번역은 잘못이며, “포위를 풀다.”가 정답(正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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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역사본문(海東繹史本文)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성종(聖宗)’ 때 여섯 성을 쌓았다. 거란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입(侵入)해 오자, ‘왕 순’은 ‘여진(女眞)’과 더불어 기병(奇兵)을 매복해 요격(邀擊)하여 거란 군사를 거의 모두 죽였다. ‘왕 순’이 또 압록강(鴨綠江) 동(東)쪽에 성(城)을 쌓아 내원 성(來 遠 城)과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그러고는 강(江)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은 다음 군사(軍士)를 매복(埋伏)시켜 새로 쌓은 성(城)을 튼튼하게 하였다. 《송사》
※ 고려왕(高麗王) ‘왕순’【王詢 : 8대 현종(顯宗)】이 쌓았다는 『압록강(鴨綠江) 동쪽 성(城)』이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압록강(鴨綠江)은 동(東)쪽에서 서(西)쪽 방향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이므로 “동쪽”이란 발원지(發源地) 측을 말한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동(東)쪽에 성(城)을 쌓으려면, 하천(河川)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일 때>, 곧 요(遼)가 압록강(鴨綠江) 서안(西岸) 어느 지점에 내원 성(來遠城)을 쌓아, 고려(高麗)를 견제(牽制)하려 하니, 고려(高麗)에서도 압록강(鴨綠江) 동안(東岸)의 내원 성(來遠城)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성(城)을 쌓아 놓고, 다리를 놓아 그곳에 병사(兵士)들을 매복(埋伏)시켜, 성(城)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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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통화 29년 현종 2년> 정월 초하루, ‘을 해’에 고려(高麗)에서 군사(軍士)를 철수(撤收)시키자, 항복(降伏)하였던 고려(高麗)의 여러 성(城)들이 다시 반란(叛亂)을 일으켰다. ‘귀 덕 주(貴 德 州)’의 남쪽 산악(山岳) 지역에 이르렀을 때 큰비가 연일 내렸는데, 날씨가 개고서야 겨우 강(江)을 건널 수 있었으며, 말과 낙타(駱駝)가 모두 피로(疲勞)하여 병기(兵器)를 대부분 버렸다. 기축에 압록강(鴨綠江)에 주둔(駐屯)하고, 임진에 조서를 내려 군사들을 파(破)하였다.
※ <귀 덕 주(貴德州)>는 어디에 있었던 땅일까? 위의 글로 보면, 강(江)을 건너기 전(前)이라 했으니,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에 있었다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을 보더라도 “귀 덕 주(貴德州)”란 지명은 찾을 수 없다.
元 史 卷 63 , 志 第 15 , 地 理 6 / 河 源 附 錄을 보면 : 《 河 水 北 行, 轉 西 流, 過 崑 崙 北, 一 向 東 北 流, 約 行 半 月, 至 貴 德 州, 地 名 必 赤 里, 始 有 州 治 官 府. 州 隸 吐 蕃 等 處 宣 慰 司, 司 治 河 州 。 思 本 曰 :自 乞 里 馬 出 河 與 黃 河 合, (中略), 又 折 而 東 北 流, 過 西 寧 州, 貴 德 州, 馬 嶺 凡 八 百 餘 里, 與 邈 水 合. 邈 水 源 自 青 唐 宿 軍 谷, 正 東 流 五 百 餘 里, 過 三 巴 站 與 黃 河 合. 中略. 》에 나오는 “귀 덕 주(貴德州)”와 똑같다.
더하여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보니 : 『이곳은 요(遼)나라에서 설치(設置)한 “귀 덕 주(貴德州) 녕 원군”이라 했다. 또 귀 덕(貴德)현을 설치하여 현(縣)에서 다스렸다. 옛 고성(古城)은 봉천(奉天) 철 령(鐵嶺)현 동남(東南)에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 원사(元史) 하원부록(河 源 附 錄)에 기록된 “귀 덕 주(貴德州)”는 “청해 성(靑海省)의 서녕(西寧)주” 옆에 있으며,
㉡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의 “귀 덕 주(貴德州)”는 “봉천(奉天) 철 령(鐵嶺)현 동남(東南)”에 있다.
※ 어느 곳에 있었던 간에 “반도(半島)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에는 없었던 지명(地名)이란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이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지방’이라 했을 때, 현 만주(滿洲) 봉천(奉天)의 철 령(鐵嶺)현 주위에는 압록강(鴨綠江)이 없으니, 이곳은 해당되지 않는다. ㉠에서 설명한 곳이 지세(地勢)로 보면, 타당성(妥當性)이 많다.
이런 곳이라면, 전쟁(戰爭)에 낙타(駱駝)군단(軍團)을 동원(動員), 군수물자(軍需物資) 수송(輸送)을 전담(全擔)하기에 적합(適合)한 곳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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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병인에 상온(詳 穩) 장 마 류(張 馬 留)가 고려(高麗)에 대해 잘 아는 여진(女眞) 사람을 바쳤다. 황제(皇帝)가 고려(高麗)에 대해 물으니, 답하기를, “신이 3년 전에 고려에 포로로 잡혀 낭관(郞 官)으로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개경(開京)에서 동(東)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開京)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州)에서 보내오는 진 귀(珍貴)한 물품(物品)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 라 주(勝 羅 州) 등의 살펴보건대, 승 라 주가 《송사》에는 승 라 주(昇 羅 州)로 되어 있다. 남(南)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城砦)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物品)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萬若) 대군(大軍)이 전로(前路)를 따라가서 ‘갈 소 관 여진(曷 蘇 館 女 眞)’의 북쪽 길을 취하여 곧장 ‘압록강(鴨綠江)과 대하(大河)’를 건넌 다음 올라가면 곽 주(郭 州)에 이르러서 큰 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위에서 설명(說明)한 지형지리(地形地理)를 잘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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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에 현종 6년 등주(登州)에 조서를 내려서 해변에 관(館)을 설치하고 사신을 접대하게 하였다. 그해에 또 고려(高麗)가 어사민관 시랑(御 事 民 官 侍 郞) 곽 원(郭 元)을 보내와서 조공하였다. 곽 원이 스스로 본국(本國)의 국경(國境)은 남쪽에서 북쪽까지가 1천 5백 리이고 동쪽에서 서쪽까지가 2천 리라고 하였다. 곽 원은 언사와 용모가 공손하고 단정하여 잔치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손수 사표(謝表)를 지었는데, 자못 문장이 좋아 조정에서도 후하게 대접하였다. 《송사》
○ 요 개 태 6년 현종 8년 2월 정축에 조서를 내려서 국구 장(國舅 帳)의 상온(詳 穩) 소외와(蕭 隗 洼)에게 본부(本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東)쪽으로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5월 초하루 무술에 추밀사(樞 密 使) 소 합 탁(蕭 合 卓)을 도통(都統)으로, 중국 사람인 행궁도부서(行宮 都 部 署) 왕 계 충(王 繼 忠)을 부 도통으로, 전전점검(殿 前 點 檢) 소 굴 렬(蕭 屈 烈)을 도감(都監)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9월 을묘에 소 합 탁 등이 고려의 흥 화 군(興 化 軍)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군사를 철수하였다. 《요사》
○ 7년 현종 9년 8월 병진에 조서를 내려 동 평 군왕(東 平 郡王)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전 전 도 점검(殿 前 都 點檢) 소 허 열(蕭 虛 烈)을 부 총(副 摠)으로,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 팔가(耶律 八 哥)를 도감으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였다. 이어 고려의 수리(守 吏)들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스스로 귀순하여 오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내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항거하는 자는 뒤늦게 후회하여도 소용없을 것이다.’고 유시하였다. ○ 12월에 소배압 등이 개경(開京)에 이르자, 적들이 무너졌다. 이에 군사들을 풀어 사로잡고 노략한 다음 돌아왔다. 군사들이 다 타 이 하(茶 陀 二 河)를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高麗)의 군사들이 쫓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高麗)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야율 팔가 혼자서만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인바, 이는 위태로운 방법이다. 그러니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다. 적군이 양쪽에서 화살을 쏘아 대어 요나라 군사들이 불리하자, 소배압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천운(天 雲)과 우 피실(右 皮 室) 두 부대의 군사들 가운데 강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천운군의 상온(詳 穩) 해리(海里), 요련(遙輦)의 상온 아 과달(阿 果 達), 객 성사(客 省 使) 작고(酌 古), 발해(渤海)의 상온 고 청명(高 淸 明) 등이 모두 진중에서 죽었다. 《이상 모두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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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예빈성(禮 賓 省)에서 복건전운사(福建 轉 運 使) 나 증(羅 拯)에게 이첩하기를, “본조의 상인 황진(黃 眞)ㆍ홍만(洪 萬)이 와서 말하기를, ‘복건전운사가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려(高麗)와 접촉(接觸)하여 통호(通好)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 군현에서는 고려의 사절(使節)을 접대(接待)하는 옛 준례가 없어서 백성들이 자못 괴로워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의약(醫藥)을 구하고 화 소공(畫 塑 工)을 파견하여 고려 사람들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나 증(羅 拯 : 복건전운사(福建 轉 運 使))에게 조칙을 내려 고려(高麗)로 가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募集)하도록 하였다. 《상동》
2012년 02월 18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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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는 객관적 사료대입과 가설설정이란 관점에선...최두환선생께서도 객관성을 이젠 많이 잃으셨다 봅니다.
중앙아시아나 지중해가 조선의 중심이란 설은...파격적이고 선도적인 가설일 순 있어도...
그 객관성에선 기본적인 모순을 해결치 못한다 보입니다.
중앙아시아나 지중해가 조선의 중심이라면...
낙타가 고려&조선의 주 교통수단으로 황조에서 탁타관리 목장이나 관리관을 두고 관리하는 례가 수두룩해야 맞고...
주 생산물이 목축물이요...쌀 등의 미곡류가 조세와 군납의 지표가 아닌,..
마소,양 낙타등의 축산물이 조세기준 품목이 돼야 조선&고려의 중심이 중앙아&지중해라 할 조건이 됀다 보입니다.
제가 보기엔 최선생님도...조선&고려의 서쪽 별지나...
단군조선의 자손이긴 마찬가지인 조선&고려의 아종이면서...적국이기도했던...흉노,서요(거란)등의 서역진출근거를...
즉, 대륙조선문명의 서역 변방 아류를...대륙조선 문명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무리수라 보입니다.
최선생님의 대륙조선 학설은
최초엔 정확한 사서해석을 기본으로한...참으로 경탄을 금치못할 충격으로 전 흥분했습니다.
정확히 현 중원 어디가 조선사서의 어디다란 해석은 정말 객관성과 논리적 근거가 명확한 주장들이셨습니다.
문젠, 박용숙 교수님의 지중해 고조선설이 나오면선...
계속 지중해쪽으로 조선의 중심이 이동돼는데...그건 사료의 정확한 고증은 희박하고...
언어적 미미한 연관성 만으로 조선중심을 서역세계 어디나 다 가져다 붙일 수 있는식의 애매한 위치비정...
기존의 중원이 조선의 중심이란 최선생님 스스로의 수 많은 이전 주장들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으셨단게
객관&합리성에 문제가 많단 제 생각입니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시겠지요.
신경은 안씁니다. 다만 너무 안스러운 마음이 들거든요.
딱한 마음도 들고요.
그 분들도 본 마음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다만 다른 분들이 그 글을 읽고 정말 잘못된 번역인가? 할까봐 답변형태의 글입니다. 댓 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구요.
이현진님의 문무님 비판은...
오로지 한자해석에 의한 말장난류인게...일반적으로 쓰이는 한자해석이 아닌...
역시 그분이 신봉하시는 현 중원공산당의 지명사전류를 철저히 진리의 교본으로 정하여 놓고...그것도 단어적 해석의 일반적이지 않은 사용을 전체적 일반적 해석인양 무리수를 두는 형식이니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젠 정신병 단계에 이른듯 합니다.
대조연은 얘기할 가치가 없는 카페로 전락했습니다. 철저한 반도조선연구회입니다.. 최박사님의 연구결과도 다 일리가 있고, 중국조선사도 다 일리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다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이는 모두가 일제의 철저한 역사왜곡으로 인한 증거자료가 소멸되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