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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년 6 월 5 일 목요일 흐리고 비
나이가 들어서도 음식을 탐하고
술을 벗삼다 보니 몸도 함께 부실해져가는 모양이다.
새벽별을 한번씩 보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 늦은 오후부터 내리던 비가
밤새도록 내리더니 새벽에도 그치질 않고
오늘도 하루종일 계속 되었다.
차분하게 비도 오는 김에
푸욱 쉬고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계절의 리듬을 정확히 따라가는
농사일을 놔두고 편히 쉴수 없는 농부의 마음이 되어
바람에 흔들리는 고추모를 위하여
작업장에서 애들에게 고추말뚝을 손질하라 이르고
풀천지 따라다니기 좋아하는 뻔순 아내를 데리고
복분자밭에 쓸 막대 파이프를 구입하러
안동으로 데이트 삼아 다녀오기로 했다.
도착해서 부탁하니 비가와서 절단이 안된단다.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제에 부딪쳤을때
해결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대처할수 있어야 한다.
가장 많이 통하는 방법이 끈기일 것이다.
안되는 문제도 확신을 가지고 끈가있게 부탁하면
귀찮아서라도 곧잘 해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끈기를 부릴수록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우습게 되어버릴때가 있기도 한다.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닌 경우에는
구태여 악착같이 끈기를 부릴 필요가 없다.
복잡한 세상이 되면 될수록 규칙에 얽매이게 되는 법이니
규칙을 지키려는 소심한 사람들에게
악착같이 고집을 부려본들 설령 문제가 해결 되더라도
씁쓰레한 느낌을 지을수 없기 때문이다.
해줄듯 말듯 망설이는 여직원에게
내돈주고 필요한 물건 사면서 괜한 사정 하기 싫어
두말없이 싹싹하게 비가 그치면 다시 오겠다 이르고
미련없이 발길을 돌렸다.
풀천지의 시커먼 속셈은
모처럼 데이트 삼아 따라온 아내에게
맛있는걸 사주고 싶어 굳이 지금 사지 않아도
하늘을 보니 비가 잦아들고 있어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본 것이다.
물론 평소대로라면
풀천지의 성격상 그대로 물러나오진 않았을 테지만...^^
풀천지가 도시를 싫어하는 이유중에
언제나 속상한 일이 하나 있다.
넘치는 유혹을 자랑하는 화려한 음식점 간판의 홍수속에
모처럼 만족할만한 외식을 위하여 한군데를 결정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일년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참으로 깨끗하고 건강한 농산물들로
최고의 식탁을 날마다 대하게 된 이후
더욱 간판만 화려한 음식점의 음식들이
도통 성에 차지 않는다.
지나친 건강의식이 앞선 영향도 있지만
외식을 하면서 건강의식을 생각하는 멍청이는 없는 법이니
맛있으면 되는데 고르고 골라 들어간 음식점마다
왜 갈수록 실망만 하게 되는 것일까 ?
해물 냄비우동을 먹으려다가
바로 저만큼 인테리어가 좋은 뷔페집이 있길래
겉에서 보니 사대부 부페집으로 그럴싸하게 이름지어 놓고
입구에 펼처놓은 현수막에 한식 중식 양식을 어우르는 풍성함이 믿기도록
보통 한식 부페에서 오천원 정도 하는 음식값도
팔천오백원 하길래 혹시나 만족할까 큰맘먹고 들어가 보았더니
첫번째 손님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시간을 따지기 이전에 음식점에 손님이 하나도 없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법이다.
두번째 한식 중식 양식은 거의 보이지 않고
요즘 한창 문제가 되는 고기들만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양심적으로 고기부페라고 해 놓았으면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세번째 부페집에서 주인 아주머니인듯한 여자 직원이
지나치게 친절한 안내를 하며 자리까지 마련해 준다.
부페집에서 앉아서 먹을 자리를 친절하게 알려주다니
아무리 촌놈이지만 웃기는 일인줄 금방 알수가 있다.
네번째 마뜩찮은 표정으로 엉거주춤하는 우리가
혹시나 마음이 변할까봐
눈에 보이지도 않는 김밥도 있다며 친절하게 알려주더니
샌드위치도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권한다.
지금 내가 있는곳이 김밥천국집이란 말인가 ? ^^
다섯번째 이미 이번에도 후회를 더하게 됨을 각오하게 되었고
들어오자마자 둘러보지도 않고 화장실부터 달려가
볼일보고 손을 깨끗이 씻고 좋아하는 고기 앞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가오는 뻔순 아내의 얼굴을 본 순간
차마 냉정한 발길을 돌릴수가 없었다.
안도하는 카운터의 샌님같은 안경쓴 주인아저씨의 탄성과 함께...^^
여섯번째 그래도 명색이 부페집인데 고르는 재미나 맛보려고
폼나게 접시를 들고 한바퀴를 돌았는데
접시위에 올려진게 하나도 없다.
이럴수가 있을까 ?
어떤 부페집에서 먹는걸 가리지 않는 잡식성인 풀천지가
분명히 한바퀴를 돌았는데 접시 위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못하다니
다시 한번 실망을 넘어 절망이 다가온다...^^
일곱번째 심상치 않은 낌새에 주인여자인듯한 앞치마두른 아줌마 직원이
다시 한번 샌드위치를 권하며 기름에 범벅된 잡채 뚜껑을 열더니
김밥을 말아 오겠다며 주방으로 달려간다.
난 지금 어디에 서있는걸까 ?
여덟번째 그나마 위안인건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뻔순 아내가
침착하게 생고기들을 접시에 담고 있다.
딸랑 샌드위치 하나 놓고 기다리는 나에게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뜨더니 고기를 구우라며 접시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야채와 밑반찬들을 가지러 간 아내 역시
한바퀴를 돌고도 기껏 가져온게 된장과 마늘을 담은 작은 접시하고
상추와 치커리 뿐이다.
제기랄 정육점에서 생고기를 구워먹어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다...^^
아홉번째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에 소주를 시켜 한잔을 들이키고
조류독감으로 요즘 유명한 닭찜을 한조각 안주로 씹으며
침착하게 다시 살펴볼것을 아내와 의논하였다.
일인당 팔천오백원의 본전을 생각하여 정신을 다시 수습하고
아내가 다시 한바퀴 돌고 가져온 접시에는
마요네즈로 버무려진 양배추와 오이뿐인 야채샐러드 뿐이었다.
그리고선 김치도 없다며 코를 씩씩 불어댄다...^^
열번째 느끼해서 어떻게 고기를 먹을수 있겠나며 뻔순 아내가
연구실에나 있어야 어울릴법한 안경쓴 주인 아저씨에게
머스타드 소스를 요구하자
오히려 그게 무엇이냐며 우리에게 물어온다.
할수 없이 겨자라도 있으면 좀 가져다 달라 부탁하자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이 엄청 오랫동안 와사비를 개고 있다.
열한번째 이제는 먹을만한걸 찾는것이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간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보니
그제서야 군내나는 묵은김치가 한쪽 귀퉁이에 헝크러져 썰어져 있고
된장에 버무리고 간장에 절여진 고추들이 반갑기 조차 하다.
지금 우리는 한식 중식 양식이 그리운 낯선 사막에 와있는 기분이다...^^
열두번째 광우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입 소고기가 틀림없는
그래도 명색이 소고기인데 어차피 본전 생각에
소고기를 갖다가 구워서 먹어보니
먼저먹은 풀천지가 질겨서 삼키지를 못하고 뱉어놓자
교양없는 행동에 눈을 흘기던 아내가
뒤따라 뱉어내며 하도 어이가 없으니 헛웃음을 웃는다.
'
열세번째 술을 먹을때 가장 좋아하는 풀천지의 안주는 밥이다.
특히 고기를 싸먹을때 된장찌개와 밥을 같이 싸먹기를 좋아한다.
식어빠진 된장찌개의 맛은 두번이상 떠먹을수 없고
밥통을 열어본 아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건져내온 밥이
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죽인지 밥인지 마지막 절망을 안겨 주었다.
열네번째 속도 느끼하고 기분도 느끼하고 주인 얼굴도 느끼하여
커피를 청했더니 총알처럼 친절하게 커피를 뽑아다 갖다주는데
그나마 인스탄트 커피를 먹으니 잠시나마 서러움이 가신다...^^
열다섯번째 소주 한병값까지 2 만원을 계산하고 신발을 신으니
현관까지 따라나와 배웅을 한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안동 시내에 어쩌다 알게된 사람의 집에
2 만원어치 삼겹살과 소주 한병을 들고 찾아가
그집 냉장고에서 간장과 된장을 꺼내어 먹고 남은 김치와 함께
아주 간단하게 구워먹다가 그집 아들이 먹다가 남은
김밥 몇개와 샌드위치 한조각을 얻어먹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먹고 나오면 그만인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엄청난돈 쏟아붓고 인테리어 해 놓은 부페집에 스스로 갇혀 고문당하는
공부만 했던 주인 아저씨의 슬픔은 누가 위로해 줄것인가 ?
설령 이명박 대통령이 기적을 이루어 조국의 경제를 살려낸다 하더라도
사대부 부페집은 역사의 그늘 속으로 완전히 시들어 갈것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이름도 거창했던 사대부 부페집을 나와
파이프를 사기 위해 다시 찾아가니 괜히 반가운 사람이 되어
안된다던 여직원이 발벗고 나서 일처리를 하여준다.
절단을 하고 나서 자세히 살펴보니 가느다란 파이프가 너무 얇은것 같다.
작년에 전문 파이프집에서 구입한 파이프보다
미리 알아본 가격은 똑같은데 물건이 다른것 같다.
이미 절단을 하였으니 모든 미련은 버려야 한다.
기껏 세금 계산서를 안받겠다며 부과세를 깎는걸로 위안을 삼으며
여전히 오락가락한 비로 얼룩진 굽이굽이 안동길을
비틀비틀 다녀왔다...^^
무뚝뚝한 경상도 시골로 내려와
실로 오랜만에 주인 아줌마 아저씨의 정성스러웁고 따뜻한 서비스 속에
속으로 울었던 사대부 부페집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것 같다.
그집 부부도 우리처럼 귀농을 하면 정말 좋을텐데...^^
첫댓글 돈 쓰고 기분 나쁜 하루를 보내셨군요
명색이 사대부라면서 허울만 좋은, 속빈 강정같은......
모든 먹거리가 병들어 있는 세상에 매번 당하는 일이라 새삼스러울건 없지만 어떡해서든 돈만 벌려 애쓰는 모진 세상 탓이겠지요....^^
그야말로 눈물의 부페네요...ㅎㅎ 그래도 우리는 재밌게 읽을수 있으니 위로 삼으레요...ㅎㅎ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억지부페였습니다 ~ 서투른 글로나마 즐거이 위로해 보았습니다...^^ 언제한번 구경시켜 드릴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