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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꾸는 다락방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옥수
1960년 초 역도산(왼쪽)이 경기를 펼치기 위해 링에 올라서 있다.
한 조를 이룬 역도산의 친구나 다름없었던 모토가 역도산에게 귓속말로 얘기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서 이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김일이다.
역도산 사진 앞에서 참피언 밸트를 들고 있는 김일 선수 1929년:전남 고흥 거금도 출생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corea8124&folder=33&list_id=11912759 먹고 살기 힘들었던 60~70년대 호쾌한 박치기로 거구들을 쓰러뜨리며 전 국민을 흥분시켰던 프로레슬러 김일은 국민적 영웅이었다..요즘처럼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등 변변하게 즐길 거리가 없었던 시절에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끌어 모았던 최고의 인기종목이었고 그 중심에는 김일이 서 있었다. 프로레슬링이 벌어지는 날이면 만화 가게와 다방은 레슬링 중계를 보려는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다방들은 '오늘 김일 레슬링'이란 간판을 세워놓고 손님을 끌었고, 만화 가게에서는 만화를 보던 꼬마 손님들을 다 내보낸 뒤 다시 TV 손님을 받았다. TV 앞에 모인 사람들은 호랑이와 등쪽에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나타나는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했다. 손에 땀을 쥐고 TV를 보던 사람들은 김일 선수가 상대의 반칙에 피를 흘리면 "박치기" "박치기"를 외쳤고, 김일이 박치기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순간 환호했다. 라이벌인 안토니오 이노키, 압둘라 부처와는 매번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으며 혈전을 치렀다.사마귀처럼 머리를 뒤로 젖혔다 돌진해 박치기로 세계의 레슬러들을 쓰러뜨리는 김일은 국민의 영웅이었다.당시 프로레슬링은 축구.권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인기 스포츠였고, 김일 선수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0달러에 불과했던 당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준 스포츠 영웅이었다. 김일은 처음에 역도산이 지어준 '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프로무대에 데뷔했지만, 스승이 타계한 뒤 다시 한국인 '김일' 선수로 돌아왔다.스승 역도산이 일본 야쿠자의 손에 숨진 2년 후인 1965년 7월 신문들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레슬러인 김일이 8년만에 일본에서 돌아와 국내활동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김일은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조국에 왔다고 밝힌다. 65년 8월에는 수재의연금을 내놓았고 곧이어 벌어진 일본 요시노와의 극동헤비급 프로레슬링에서 완승을 거둠으로써 국민영웅으로 자리를 굳혔다.이어 66년 일본 도쿄에서 올아시아 태그 챔피언에 올랐고, 이듬해인 67년 '마크 루인'을 꺾고 WWA(World Wrestling Association) 제23대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등극, 최고의 인기와 전성기를 누렸다.1965년 한국으로 건너온 김일은 80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3천여 회에 걸쳐 국내외 경기를 치르며 세계 타이틀을 20여 차례 방어했다. 하지만 김일의 말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렸던 김일은 87년 17세 때 결혼한 아내도 결국 백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레슬링에 입문한 막내 동생(김광식)마저도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떠나보내야 했으며,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자신도 줄곧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군대에 보낸 막내 아들마저 불의의 의문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 보내면서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종종 후배들의 프로레슬링이나 각종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왕년에 링에서 호령했던 박치기왕 김일의 모습도 더 이상 찾아 보기 어려웠다. 70년대 후반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김일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사업을 벌이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좌절을 맛봐야 했고 지병은 점점 악화했다.그러던 중 김일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을 접한 삼중 스님과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권유로 94년 1월 일본에서 국내로 건너온 뒤 을지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으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은퇴 후 혹독한 훈련과 치열한 경기의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후배들을 격려하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던 김일은 오랜 투병 끝에 2006년 10월 26일 오전 12시17분 눈을 감았다..이때 나이가 77세였다..당뇨에 고혈압, 하지 부종, 신부전증 등 각종 질환을 앓았던 고인의 최종 사망원인은 만성신부전증과 심장 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 아들 수안(56)씨와 첫째 딸 애자(61)씨, 둘째 딸 순희(59)씨, 제자인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 30여 명이 임종을 지켜봤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르네상스를 연 '박치기의 명수' 김일... 김일 뒤에는 천규덕(왼쪽)과 장영철(오른쪽)이 서 있다. 김일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만들어 국내 프로레슬링 중흥에 앞장서며 장영철과 함께 레슬링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끝까지 후계자를 양성하고 그 맥을 이어온 장본인이다(장영철 선수가 "레슬링은 쇼"라고 말했다는 언론 기사로 프로레슬링의 인기 가도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당시 김일과 함께 프로레슬링을 국민스포츠로 만든 선수들은 당수의 명인으로 유명한 천규덕(탤런트 천호진의 아버지), 알밤까기의 왕 여건부,김일의 사위가 된 남해산, 그외에도 김덕,박성남,박승모,오대균 등이 있다. 김일은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75년 '김일 체육관(후에 정동문화체육관)'을 개관하면서 후계자로 이왕표를 비롯해 후배들을 길러냈다. 재일교포 출신이자 '알밤까기'로 유명했던 여건부, 막내동생인 김광식(교통사고로 사망), 양승희(역발산), 임대수 등이 김일의 제자이다. 이왕표와 양승희 김광식 임대수는 체육관 1기생들이다.또한, 체육관 지원하사금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제자로 입문한 백종호는 영화 <반칙왕>의 실제 모델이었다.(백종호는 은행원으로서 30여년전 김일이 김일체육관 건립금을 타은행에 예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 계기였다.프로레슬링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프로레슬러로 링에 나섰다. 동료 레슬러들은 그가 경기도 이천 지점장을 하고 있을 때도 이천까지 와서 은행거래를 했다고 한다. 백종호는 프로레슬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소중했던 것은 이러한 동료들의 의리였다고 한다)..그리고 2004년 백종호와 함께 은퇴경기를 치른 김도유도 같은 고향출신 제자였다. 프로레슬러들의 산실이 되었던 이 체육관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몰수되었고 정동문화체육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여러 용도로 운영됐지만 2006년 이마저도 헐리고 말았다. 세계 속의 김일 ▲ 팔로 다리를 꼰 루 테즈의 기술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김일의 모습 ▲ 김일과도 맞붙었던 전설적 레슬러인 철인 루테즈와 함께..김일 선수의 바지에 일본 이름인 大木(오오키)가 보인다 김일 선수와 경기를 치른 외국의 유명 프로레슬러로는 스승 역도산의 제자였던 안토니오 이노키오,자이언트 바바를 비롯하여 루테즈,마크 루인,프래디 블래시,보보브라질,앞둘라 더 부처 등등이 있다. 1965년 4월 김일은 세계 헤비급 챔피언 철인(鐵人) 루테즈 선수에게도 도전하여 선전했으나, 링 밖에서 날아온 의자에 머리가 찢어져 분패(憤敗)했다..김일이 다 이긴 경기였는데 누군가 고의로 의자를 던져 김일의 머리를 찍는 바람에 지고 말았다. 만약 홈링이었던 일본과 한국에서 경기를 치렀다면 김일의 승리가 확실했을 것이다.(미국서 세 경기를 치른 후 김일은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결심을 하며 한국과 일본이 국교 수립 발표만 남겨 놓았던 6월 10일 귀국한다. 김일이 귀국한 12일 뒤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됐다)..루테즈는 WWA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95년 4월 2일 일본 도쿄 돔에서 열렸던 김일 은퇴식에는 루 테즈 회장이 휠체어에 앉은 김일을 손수 밀면서 링까지 보조했다..루 테즈 - 김일이 맺어온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레슬러의 우정’은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루테즈는 2002년 4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7년 4월 29일 WWA 세계 헤비급 타이틀 경기가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당시 김일에게 챔피언 벨트를 빼앗긴 선수는 '슬리퍼 홀드'라는 목(기도) 조르기 기술로 유명한 마크 루인이었다. 마크 루인은 당시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던 루테즈를 꺾은 신흥 강자였다. 그러나 그도 김일 선수의 박치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반칙왕'으로 '물어뜯기'가 특기였던 프레디 블래시 선수도 있었다. 그는 WWA 초대 챔피언을 지냈으며 2회에 걸쳐 챔피언을 지냈고 1971년 7월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김일 선수와 격전을 치렀다. 당시 시합은 피바다를 방불케 하는 혈전을 벌인 끝에 김일 선수의 2-1 폴승으로 끝났다. 그 외에 '검은 그림자'로 불리던 흑인 거구 보보 브라질 선수가 있었다. 인터내셔널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이 사망한 이후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를 거쳐 챔피언으로 등장한 선수였다. 당시 185㎝, 140㎏의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였으며 한때 역도산과 루테즈도 꺾을정도로 세계를 제패했던 선수였다. 1972년 12월 일본의 히로시마 현립체육관에서 김일은 보보브라질과 대결을 펼친다.인터네셔널 헤비급 초대 챔피언이었던 역도산의 사망이후 8년 만에 한국인 김일이 도전한 인터내셔날 헤비급 챔피언은 ‘검은 그림자’ 보보 브라질이 가지고 있었다. 초대 챔피언 역도산 이후로 루테즈, 자이언트 바바 등의 세계적 스타들이 챔피언 자리에 오른 인터내셔날 챔피언 벨트는 당시 185cm, 140kg의 흑인 거구이자 역시 ‘박치기의 대가’ 보보 브라질이 쥐고 있던 상황.. 김일은 1차전에서 보보 브라질의 흉기로 얻어 맞아 1승을 내 줬지만 2,3차전에서 강력한 보디 프레스와 새우등꺾기 기술로 브라질을 제압해 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밖에도 김일 선수는 현역시절 3000여회의 시합을 가졌으니 국제무대에서 상대한 세계적인 스타들은 이들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타이거 마스크, 도리 펑크, 니스라우스 즈비스코, 마이크 디비아시, 미스터 아토믹 등 당시 세계 레슬링계를 평정했던 강호들과 맞붙어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노키와 압둘라 부처 경기 장면(좌)..서울 을지병원으로 문병차 찿아온 이노키(우) (옆의 사진은 김일 선수와 혈전을 자주 벌였던 '압둘라 더 부처'와 선수시절을 회상하며 모션을 취하고 있다..70년대 김일과 네 번 싸워 모두 비긴 앞둘라 더 부처는 김일이 살아있을때 친구처럼 각별한 우정을 나눴다.) 압둘라 부처는 전성기 시절 몸무게가 200㎏에 육박했으며 레슬러 중 가장 난폭한 레슬러로 손꼽힌다. 1958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프로 레슬링을 시작했으며 2008년 12월 13일 72세의 나이에 은퇴했다..최근까지도 현역으로 활약한 프로 경력 50년 차인 베태랑 이였다. 미국 애틀랜타에 거주하며. 미국 16개 지역에서 ‘부처 프렌차이즈’ 음식점,레슬링 전문 케이블 방송국,헬스장,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또 레슬링 매니저로도 이름을 내걸고 있다.압둘라 부처의 아내는 한국인 이인자씨 이다.앞둘라 부처는 순복음 안산교회 김원철 목사와 의형제며. 이 교회 안수 목사이기도 하다. 김일과 압둘라 더 부처의 혈전 김일과 자이언트 바바 74년 10월 도쿄 국기관에서 김일과 이노키의 대결 김일,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 김일의 회고록 '굿바이 김일'... 스승 역도산 사망 후 2개월여 만에 일본에 돌아온 김일이 안토니오 이노키와 악수를 하고 있다. 김일(가운데 벨트 찬 사람)이 자이언트 바바(왼쪽)와 안토니오 이노키(오른쪽) 등과 함께 우승 기념 건배를 하고 있다. 세 사람은 역도산 사후 일본 프로레슬링 영웅이었다.역도산의 산하엔 소위 ‘4대 천왕’ 이라는 수재자들이 있었는데 ‘자이언트 바바, 김일(오오키 긴타로), 안토니오 이노끼, 맘모스 스즈끼’ 가 바로 그들이다. 역도산 문하 1기생으로 꼽히는 김일,자이언트 바바,안토니오 이노끼 (사진 좌)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김일,요시무라. (사진 우)김일과 이노키의 팔씨름 일본에선 역도산의 사망 후 단체들이 갈라지면서 결국 자이언트 바바의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안토니오 이노끼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양대 산맥이 엄청난 라이벌 관계를 만들었는데, 비록 일본에서의 인기가 그 둘에 미치진 못했지만 김일 선수는 셋 중에서는 실전에서 가장 강했다고 한다. 태그팀을 이루어 경기할때의 태그매치 콤비- 김일과 이노키
김일을 떠올리면 숙적이었던 안토니오 이노키를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역도산의 제자였던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간의 경쟁심과 적개심의 대리자가 되어 부지런히 싸웠다. 둘이 맞붙은 건 38차례였고 김일이 9승1패28무승부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노키는 누구인가?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11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출생. 김일과 이노키는 같은 집에 살며 경기가 끝나면 함께 빨래를 하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다. 이노키는 밤이 되면 또 한번 게임을 치러야 했는데, 다름 아니라 김일의 코고는 소리였다. 잠을 못이룬 그는 이불을 세 개씩 덮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쓰러져 가는 역도산의 일본프로레슬링, 상승세를 타던 신일본프로레슬링....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 이 두 사람은 74년 10월 10일 자신들이 속한 양 단체의 명운을 걸고 경기를 펼치게 된다. 어느새 레슬러로써 확고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레슬링의 본 고장인 미국의 3대 헤비급 타이틀 중 하나인 NWA 챔피언 밸트를 거머쥘 정도로 급성장한 이노끼를 상대로 김일이 정식 타이틀 도전장을 내민다.챔피언 이노키에게는 NWA 6차 방어전이였다. 그날 경기에서 김일은 이노키의 장기인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려 경기 시작 13분 13초 만에 허리 통증을 참지 못해 항복했다. 이노키는 데뷔 후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했던 김일을 처음으로 꺾었던 것이다..이후 이노키가 이끄는 신일본레슬링은 아사히TV와 정규 방송 계약을 맺는 등 승승장구하게 된다. 김일이 분투하던 일본프로레슬링은 급격한 몰락을 맞는다.둘은 이듬해 75년 한국의 장충체육관과 도쿄에서 경기를 했다. 두 번 모두 `링 아웃`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후 둘이 링에서 맞붙은 적은 한 번도 없다. 76년 2월에는 유도 세계 챔피언 윌리엄 르스카와 싸워 이겼고, 그해 6월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맞붙어 졸전이긴 했지만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역도산 문하 1기생으로 김일과 한솥밥을 먹었던 자이언트 바바와 안토니오 이노키 그리고 김일.이노키와 함께 역도산 문하 1기생으로 꼽히는 선수가 지금은 고인이 된 자이언트 바바(99년 1월 사망)다. 세사람은 도쿄의 역도산체육관에서 10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레슬링계를 주름잡았다. 나카타에서 태어난 바바는 레슬링 입문 전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였다. 김일보다 열 살 아래로 `자이안트`라는 이름만큼이나 체격도 컸다. 키가 208㎝인데다 발도 워낙 커 16문(384㎜)짜리 신발을 신었다. 그 큰 발을 이용한 '16문 킥'은 공포의 주무기였다.그 킥 때문에 상대 선수들은 곤혹을 치렀다. 거대한 몸집에 마른 체형이지만 이노키와 라이벌 구도로 일본 레슬링계의 전설이었고 '신일본 레슬링'에 대항하는 '전일본 레슬링' 단체의 창시자로 정통파 레슬링을 구사하는 실력파 오대천왕(미사와. 카와다. 타우에. 아키야마. 코바시)을 중심으로 정통성에 기반한 경기를 주로 하여 명경기들이 많았다. 바바와 이노키 두 사람 모두 전설적인 역도산의 영향을 받아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 프로레슬링을 호령했던 명선수들이다.
1956년(28세):일본으로 밀항, 체포돼 1년간 투옥
1957년(29세):역도산체육관(동경)문하생 1기로 입문하면서 레슬링을 시작
1958년(30세):일본 프로 레슬링 데뷔
1963년(35세):스승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려 사망
1963년 12월:WWA 세계 태그 챔피언(L.A)
1964년 4월:노스 아메리카 태그 챔피언(텍사스 아모레로)
1964년 5월:록키 마운틴 챔피언(텍사스)
1964년 10월:NWA 세계 헤비급 타이틀 도전권 리그전 우승(텍사스)
1965년 6월(37세):영구 귀국 (1965년 4월 귀국 직전:미국에서 킬러 카부콕스,루 테즈와 경기했으나 모두 반칙으로 패배당함)
1965년 8월:극동 헤비급 챔피언(서울)
1966년 2월:올 아시아 태그 챔피언(동경)
1967년 4월(39세):WWA 제23대 세계 헤비급 챔피언(연맹공식기록)
1968년 11월:올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서울)
1972년 12월(44세):인터내셔날 세계 헤비급 챔피언
1994년 4월: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1995년 4월(67세):일본 신문사 기자단 주최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공식 은퇴식 거행(약 6만명의 관중 운집)
2000년 3월(72세):장충체육관에서 국내무대 은퇴식 거행(문광부, 체육진흥공단, 대한체육회후원),체육훈장 맹호장 수상
2006년 10월 26일(78세):타계(신기하게도 김일이 가장 존경한다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같은 날자에 타계)
2006년 10월 28일: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1929년 전남 고흥의 한 섬마을에서 태어난 김일은 당시로서는 장신인 180㎝의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마을 씨름대회를 휘어잡았다. 동네 장사로만 남을 수 없었던 김일은 한 잡지에서 세계프로레슬링 챔피언에 등극하며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1956년 일본으로 떠날 결심을하게 된다.
하지만 밀항을 통해 일본에 입국한 김일은 곧 경찰에 잡히게 되고 1년간의 형무소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김일은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링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고 이에 역도산은 보증을 서 김일을 형무소에서 빼내게 되고 1957년 김일을 문하생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이후 김일은 지옥훈련을 견디며 박치기 기술을 연마했고 1963년 12월 스승인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렸다는 소식을 듣고 아픔을 겪으면서도, 스승 역도산이 괴한의 흉기에 찔린 12월 8일 다음날인 12월 9일(일본은12월 10일) 미국 LA에서 생애 최초로 WWA(세계레슬링협회) 태그 챔피언 타이틀을 프로레슬링계 데뷔 6년만에 따낸다.역도산은 1963년 12월 15일 갑작스럽게 숨을 거둔다.
국내에 머무르면서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 사업에 힘을 쏟아 붇기도 한 김일은 95년 4월 일본 도쿄돔에서 일본 무대 공식 은퇴식을 갖기도 했다. 국내 은퇴식은 2000년 3월 장충체육관에서 가졌다.프로레슬링 경기나 관련 행사가 있을 때면 김일은 어김 없이 모습을 나타냈고 30년 이상 된 애제자 이왕표와 수시로 접촉하며 레슬링 발전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김일은 특히 남은 여생을 프로레슬링과 관련한 기억을 되돌아 보며 지내기도 했다.
2005년 2월에는 언제 다시 찾을 지 모르는 스승 역도산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고, '레슬링 쇼' 파문으로 41년간 서로 등을 돌리고 지내왔던 '백드롭의명수' 장영철을 방문해 뒤늦게 화해하기도 했다.김일과 함께 60대를 풍미했던 장영철은 김일이 세상을 떠나기 두 달여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프로레슬링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2005년 김일은 대장을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으며 한 때 생명이 위태롭기도 했으나,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왕표씨의 간병 등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정도로 회복돼 사회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2006년 9월 10일에는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경기에 앞서 특별 시구자로 나서 휠체어를 탄 채 공을 던졌고 이것이 팬들 앞에 선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저런 몸으로 거친 프로 레슬링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픽' 웃는 모습이 얼마나 순진하게 보였는지. 그가 1960~80년대까지 세계프로레슬링계를 쥐락 펴락 했던 안토니오 이노키다. 지금은 일본격투기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거물중의 거물이다.그와의 만남은 역도산 도장에서 이렇게 시작했다. 난 1958년 이후 지난 30년여간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그와 얽힌 사연은 너무도 많다.
이노키는 스승이 직접 스카우트 한 레슬링 선수다. 어쩜 스승이 외국에서 스카우트한 1호가 아닌가 싶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스승은 1959년도 제1회 월드리그전에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폭발시킨 다음 1960년초 브라질 원정 경기를 떠났다.
그 원정경기에서 이노키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브라질에서도 스승은 널리 알려졌다. 특히 브라질에 이민 간 일본인들에게 스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민자들은 늘 서럽기 마련이다. 스승은 그 이민의 설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브라질 선수와의 경기에서 가라데 촙으로 덩치큰 브라질 거구들을 무너뜨렸다. 당연히 이민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안토니오 이노키 원래 이름은 '이노키 간지'였다. 그는 이름을 개명했다.이노키는 브라질로 이민간 일본인이었다. 그가 브라질로 이민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차 대전 패전 국가인 일본이 1950년대 중반까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자 가족들이 이민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가나카와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 출신인 이노키는 11남매의 6남이다. 그는 14세 때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갔다. 덩치가 무척 컸던 그는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어떤 운동을 해도 성공할 것 같았던 그는 브라질에서도 운동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브라질 육상선수권대회(주니어 부문)의 원반던지기와 투포환에서 우승, 올림픽 출전을 꿈꿨다. 당시 브라질로 경기하러 갔던 스승은 일본인 교포 소년이 투포환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을 접했고, 그에게 레슬링에 입문하도록 권했다. 이노키도 역도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승의 권유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와의 추억은 참으로 많다. 그는 역도산 도장에 입문한 이후 부터 나와 한 방을 사용했다. 그가 오면서 여러모로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는 밥 짓는 것과 빨래하는 것에 대해 익숙치 못했지만 우린 역할을 양분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의 턱은 참 인상적이었다. 한국식 표현이라면 그런 그의 턱을 '주걱턱'이라 부르지 않던가. 난 그를 주걱턱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넌 복싱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권투 선수가 됐다면 턱이 여러번 부러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며 픽 웃는다.
습관처럼 잘 웃었던 그는 나를 친형처럼 잘 따랐지만 그의 속은 야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노키는 입만 열면 "선배 전 반드시 세계레슬링계를 석권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샌드백을 치면서 혹은 역기를 들때도 세계챔피언을 외쳤다.
나의 꿈도 세계프로레슬링을 석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챔피언은 두명이 될 수 없다.
이노키가 그런 말을 하면 난 농담같은 진담으로 "너와 난 훗날, 하나는 하나를 꺾어야 하는 라이벌이 되겠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면 이노키는 "선배에겐 져야죠"라고 농담도 했다. 훗날 난 각종 타이틀을 놓고 이노키와 혈전을 벌였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안토니오 이노키는 운동 선수가 지녀야 할 체격 조건을 다 갖췄다. 일반적으로 체격이 좋으면 몸의 유연성이 떨어지지만 이노키는 그렇지 않았다. 유연성·순발력·민첩성, 거기에다 파워까지 막강했다.
스승 역도산은 처음부터 이노키에게 프로레슬링 기술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에게 근력 운동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약간 마른 체질이어서 우선 근력이 붙도록 했다. 근력 운동을 시킨 것은 시각적 효과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예컨대 레슬링 선수는 옷을 벗었을 경우 근력이 좋아야 한다. 근력이 좋다는 것은 상대 선수에게 강인함과 팬들에게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노키가 근력 강화를 위해 하는 것은 돼지처럼 먹고, 운동하는 것이었다.
몸에 근력이 붙으면서 이노키는 서서히 레슬링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굳이 나와 이노키 훈련의 차이점을 비교하라면 매였다. 스승은 나는 그렇게 때렸지만, 이상하게 이노키는 때리지 않았다. 난 스승의 매에 이골이 나 이노키에게 이런 귀띔을 했다. "이노키! 스승의 매를 견뎌야 한다. 스승에게 맞더라도 서운해 하지 마라. 스승이 널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헌데 나의 이런말은 거짓말이 된 셈이다. 스승은 이상하게도 이노키는 때리지 않았다. 조선인을 그렇게 때리고 일본인은 때리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스승에게 맞지 않았던 이노키는 스승을 무서워하거나, 어려워 하지 않았다.
이노키의 레슬링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했다. 이노키는 몸에 근력이 생기고 이런 저런 기술을 익히면서 자신만의 특기를 갖고 싶어 했다. 레슬링 선수에게 특기는 자신의 '히든 카드'나 다름없다.
자신만의 고유한 특기가 있어야만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롱런 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스승은 가라데 촙이 특기다. 또 난 박치기였다.
이외 스승의 제자중 유도로 단련된 자들은 대부분 꺾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승도 이노키가 프로레슬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특기를 가져야 한다며 그에게 특기를 연마토록 했다. 워낙 운동신경이 발달했고, 몸의 유연성과 민첩성이 좋기 때문에 이노키는 어떤 기술이든 다 소화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슬램기술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이노키는 보디슬램과 파워슬램을 곧잘 구사했다. 하지만 그것은 레슬링 선수라면 기본으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기술이다.
상대방의 두 다리를 잡고 반동으로 들어 올려 던지는 슬링 샷 기술도 탁월했다.
이런 기술은 상대에게 순간 충격은 주지만 완전히 압도하는 기술은 아니었다. 스승과 함께 이노키가 고안해낸 기술은 '코브라 트위스트'다. 올드팬들의 기억 속에 이노키 하면 코브라 트위스트가 떠오를 정도로 그는 이 기술을 자기만의의 전매특허로 만들었다.
상대방을 앞에 놓고 오른발로 상대의 오른발을 걸고, 오른팔로 상대의 오른팔을 걸면서 상대의 옆구리를 눌러 허리를 옆으로 꺾이게 한다음 팔을 뒤로 젖히는 기술이다. 이노키가 이 기술 습득에 매진할 때 즈음, 첫 시합 날짜가 잡혔다. 1960년 9월말이었다.
경기 날짜가 잡혔지만 스승은 이노키에게 첫 시합 상대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스승은 내게도 그랬다.
궁금한 것은 당연히 이노키 였다. 이노키는 내게 "선배 첫 상대자가 누구입니까" 슬쩍 묻기도 했다.
나 역시 첫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 말해줄 수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스승이 나를 불렀다. "오오키 긴타로, 네가 이노키 첫 상대자다!" 난 깜짝 놀랐다. 냉혹한 사각의 링 승부에서 한명이 한명을 꺾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지만, 이노키의 첫 상대가 나 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스승이 이노키 첫 시합 상대로 문하생중 한명을 지명한다고 했을 때 난 내가 아니기를 바랐다. 난 나름대로 팬도 확보했다.
소위 뜨는 프로레슬러였다. 그런 내게 이제 갓 레슬링에 입문한 이노키 첫 상대가 되는 것이 솔직히 떨떠름 했다.
이겨도 본전, 패하면 망신인 이 경기에 이노키 첫 경기 상대로 나를 지명한 스승의 저의가 궁금했다. 스승은 그 많았던 문하생중 하필이면 나를 지명했을까. 스승이 나를 이노키의 상대로 붙인 것은 훗날 라이벌이 될 것임을 예상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은 강자와 상대케 해 이노키의 담력을 키워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나이로 봐서도 이노키 보다 열 세살 위였다. 이노키 대선배다. 그와 경기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현실을 비켜갈 순 없었다.
한데 사람이란 참 이상했다. 서로를 라이벌로 생각한 적이 없었던 나와 이노키는 경기 날짜가 확정되면서 약간 경계하는 듯 했다. 난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이노키 입장에선 같은 방을 쓰고, 또 나를 형처럼 따랐기에 그 역시 나와 경기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레슬링은 다른 운동과 달리 상대의 신체를 공격해야 한다. 그런데 선배인 나를 공격하는 것이 좋을리 없었을 것이다.
이노키는 경기를 앞두고 "선배 잘 부탁한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지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는 나와 경기 일정이 잡힌 후 레슬링 연습에 더욱 매진 했다. 경기가 잡힌 후 부터 가끔 저녁에 늦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어디갔다 왔느냐"라고 물으면 "친구들 만나 늦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선 땀냄새가 났다. 그는 남몰래 연습한 것이다. 또 새벽 일찍 일어나 로드웍을 하고 도장도 가장 먼저 갔다.
원래 도장은 내가 가장 먼저 가서, 가장 늦게 나왔다. 언제부턴가 이노키가 그 바톤을 이어받았다.
난 그런 것까지 이노키와 경쟁하는 것이 싫었다. 그가 마음껏 운동할 수 있도록 일부러 그보다 늦게 도장에 나갔고 일찍 들어왔다.
그가 밤늦게 운동해서 들어오면 너무 불쌍해 보였다. 당시 이노키 나이는 스물도 안됐다. 그 또래 친구들은 부모님 뒷바라지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과 떨어진 채 나와 생활하면서 거친 레슬링을 했으니 그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지쳐 쓰러져 코골며 자는 그의 모습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했다. 그런 이노키 모습을 보면서 져 줄까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다. 내가 설령 스승과 맞붙더라도 누군가 하나는 져야한다. 사소한 감정은 결국 나를 한단계 올려놓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어 승부만큼은 인정사정 봐 주면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1960년 9월30일 도쿄의 타이토 체육관. 우린 같은 로커룸에 있었다. 이노키는 약간 긴장했고, 말이 없었다. 표정에선 비정함이 묻어났다. 그는 로커에서도 쉬지않고 러닝도 하고, 허리를 돌리면서 몸풀었다. 로커 스피커에선 안토니오 이노키 입장이란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어 내가 호명됐고, 링으로 올라갔다.
이노키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한 후 픽 웃었다. 아마도 공격하더라도 이해해 해주고, 미안하다는 느낌같았다. '땡'하는 공이 울리자 우린 서로를 공격하지 못했다. 심판이 '파이터'라 외치자 그제서야 선·후배 관계를 잊었다. 이노키의 묵직한 팔이 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안토니오 이노키와 숙명의 첫 경기를 펼친 1960년은 아마도 일본 전후에 일본에 얽히고 설킨 문제들이 과포화 상태까지 다다른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960년 5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미국에의 일본 종속을 강화하는 미·일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도쿄대생 간바 미치코가 경찰과 충돌, 국회 안에서 사망했다. 그 뿐만 아니다. 일본 노동계의 미이케 투쟁, 일본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등 대형 사건이 신문을 도배했다.세계적으로는 로마올림픽이 열렸던 해였다. 또 존 F 케네디가 미대통령에 당선됐고 컬러 텔레비전이 처음으로 판매됐다. 컬러 TV 시판은 프로레슬링 흥행의 신호탄이나 다름 없었다. 스승 역도산은 이런 일본 사회의 변화를 읽고 사업 수단에 활용했다. 스승은 레슬러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로서도 재능을 펼쳤다. 프로 레슬러로서 거친 싸움 노선을 폈던 스승은 자신과 다른 유형의 젊은 레슬러들을 경쟁시켜 누가 경쟁에서 이길지 흥미롭게 지켜 보며 그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이노키는 스피드와 투지가 넘쳤지만 레슬링 입문 겨우 6개월에 지나지 않아 기술은 약간 떨어졌다.
공이 울리자 그는 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러나 별로 위력적이지 않았다.
난 재빨리 빠져나와 역기술을 시도하며 그의 허리를 잡았다. 그에게 다리 걸기를 시도 매트에 눕힌 후 위에서 눌렀다.
이노키의 거친 숨소리라 귓가에 들렸다. 그는 '이얍'하는 기합 소리를 내면서 투지를 불살랐다.
그의 눈빛이 내가 선배가 아니고 링에서 쓰러뜨려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나의 누르기에서 빠져 나온 그는 팔 꺾기를 시도했다.
경기는 엎치락 뒤치락 했다. 난 경기를 일찍 끝낼 수 있었지만 일부러 경기를 좀 더 끌었다.
그는 첫 시합이라 노련미가 역시 떨어졌다. 마치 곡예사처럼 튕기기만 할 뿐 본격적인 기술은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가 시간이 지나니 박력도 없어졌다. 이노키와의 첫 대결은 시합이라기 보다는 사나이들의 의지를 건 결투를 스승이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격정·흥분·광포·아수라장으로 대비되는 레슬링 시합과는 달랐다. 이노키는 어깨 부딪치기를 감행하며 힘을 썼다.
그것이 먹혀 들지 않자 곧 때리고 발로 차면서 나를 화나게 했지만, 나는 맞아도 흥분하지 않았다.
난 힘을 낭비하는 밀어치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착실히 정공법으로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이노키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지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를 집중공격했다. 보디슬램·꺾기·당수를 날리면서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의 기력이 한계가 왔음을 느꼈다. 난 그의 몸을 덮쳤다. 심판의 카운터에 그는 몸을 밀치지 못했다.
7분6초만에 나의 승리이자 이노키의 패배였다. 매트에서 일어난 이노키는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다.
나 역시 첫 경기에서 패했을 때 얼마나 낙담했는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우린 거의 동시에 라커로 들어갔다. 이노키는 별말이 없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 "잘 싸웠다"며 악수를 건넸지만 그는 '픽'웃고만 말았다.
'투혼과 투지가 없는 자는 프로 레슬링계에서 떠나라!' 이것은 비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온 스승 역도산의 지론이다. 나 역시 이 지론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한국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면서 강조했던 것이 투혼과 투지였다. 레슬링 선수에게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죽은 선수나 다름없다.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경기에서 내가 승리했던 것은 그보다 투혼과 투지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노키는 레슬링에 입문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 데뷔전을 치렀기 때문에 투혼과 투지가 덜 했을 것이다. 연습에서 투혼과 투지를 키우는 것과 막상 링에 올라가 투혼과 투지를 불사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노키는 나와의 경기에서 기술도 중요하지만 결국 투혼과 투지가 없다면 기술과 체력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노키는 그날 경기에서 나의 이중성을 발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너 죽고 나 산다'는 사각의 링에서만큼은 난 그의 선배가 아니었다. 내가 유령의 탈을 쓴 인간인지, 진짜 유령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링에선 다른 모습의 인간이었다. 이노키는 그런 나를 떠올리기만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선배라며 진저리를 쳤을지 모른다. 이것은 두사람간의 혈투에서 승부를 내야만 하는 비정한 프로레슬링의 세계다.
그리고 그날 경기에서는 또 한명의 전설적인 레슬러가 데뷔전을 치렀다. 키 216㎝. 올드팬들에게 낯익은 얼굴일게다.
스승은 이날 혈투장에 또 한명의 프로 레슬러를 등장시켰는데 그가 올드팬들에게 16문킥의 보유자로 알려진 '자이언트 바바'였다.
1960년 9월30일 도쿄 다이토 체육관에서 데뷔전을 치렀던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는 향후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좌지우지 했던 인물이다.
바바는 나보다 아흡살 적었다. 아마도 1938년생으로 기억된다. 이날 바바의 데뷔상대는 다나카 요네타였다.
그는 유도로 잔뼈가 굵은 레슬러였지만 바바는 5분만에 승리했다. 그의 등장과 승리로 일본 프로레슬러계는 흥분했다.
대부분 일본 프로레슬러들의 키는 180㎝ 내외였다. 그런데 그의 키는 210㎝에 육박했다. 프로씨름 선수에서 격투기 선수로 변신한 최홍만 선수의 키가 218㎝였으니 바바가 얼마나 키가 큰지 짐작될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자이언트(거인)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의 등장은 프로레슬링의 또하나 흥행 보증수표였다.
흔히들 키 큰 사람은 싱겁다라고 한다. 바바도 싱겁긴 마찬가지다. 싱거운 바바는 마음씨가 너무 좋다.
난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를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바는 링에 서면 다르다. 인정 사정이 없다.
그는 키를 이용한 기술이 많다. 16문킥이 대표적이다. 로프로 밀친 후 반동으로 튕겨져 나오는 상대를 큰 발로 킥한다고 해서 붙여진 기술이다. 또 런닝 넥브레이커 드롭·노텐·32문 로켓포·카와즈 오토시(러시안 레그스윕)등.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기술들이다. 거인같은 그가 링에서 이런 기술을 펼치면 열광하지 않은 팬들이 없었다.
그런 바바는 한많은 레슬러였다. 원래 그는 프로야구선수로 대성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지금 일본서 이승엽 선수가 활약하는 요미우리 자이언트 출신의 투수였다. 야구선수가 프로레슬링 선수가 된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일게다.
스승 역도산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일본 프로야구 후배 선수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프로야구 선수 중 거인이 한명 있다. 그는 목욕탕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그를 방출했다. 그는 다이요팀으로 이적하려고 했는데 성사가 안돼 상당히 낙심하고 있다. 그를 프로레슬링 선수로 스카우트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스승은 이 말에 귀가 솔깃했다. 레슬링 선수이자 프로모터로서도 재능을 펼쳤던 스승은 당시 안토니오 이노키 뿐만 아니라 맘모스 스즈키 등 개성있고 특출한 선수들을 마구 스카우트해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지금은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선수들의 키가 기본적으로 180㎝를 넘지만 당시에는 그정도도 안되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런데 자이언트 바바의 키는 2m를 훨씬 넘었다. 스승은 당연히 그에게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자이언트 바바는 닉네임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바바 쇼헤이다. 스승은 그가 워낙 거인이라 자이언트 바바로 불렀다.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더이상 야구를 할 수 없었던 바바도 자신이 프로레슬링 선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야구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어 상당히 낙담했던 바바에게 스승은 프로레슬링에 입문하라고 권유했다.
걸림돌은 팔이었다. 스승은 바바의 부상이 의심스러웠다. 바바는 부러진 팔을 제대로 치료 받지 않아 뼈가 굳는 바람에 팔이 펴지지 않았다. 아무리 바바가 신장이 커도 레슬링 선수가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기술 습득에 상당히 애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바바는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거인이 아닌가. 스승은 훗날 바바가 레슬링의 흥행보증 수표가 될 것으로 믿어의심치 않았다.
스승은 그에게 레슬링 입문을 권유했지만 바바의 판단과 의지에 맡기기로 했다. 바바의 팔이 장애라도 프로레슬링을 하고 싶다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이었다. 스승은 바바에게 "'내가 부상을 당했으니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겠다'라는 식의 가벼운 생각으로 입문한다면 안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스승은 또 프로야구와 프로레슬링은 운동 스타일과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스승은 "프로 레슬링은 굉장히 힘들고 거친 스포츠다. 링에서 죽을 수도 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겠다는 바바의 결심과 의지는 대단했다. 바바는 "전 프로야구에서 탈락한 인간이다. 그렇다고 안이한 마음으로 프로레슬링의 문을 노크하는 것은 아니다. 저도 남자다. 제자로 받아준다면 링 안에서 죽을 각오로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바바는 아무리 어려운 수련이라도 참고 견뎌내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스승은 바바가 충분히 고민한 끝에 결심한 흔적이 역력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스승은 참으로 대어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일본 언론에선 바바가 프로레슬링 선수로 전환하자 큰 관심을 보였다.
바바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로레슬링 선수로 대성해 반드시 세계챔피언이 되겠다"라고 밝혔다.
바바의 호언장담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비록 한쪽 팔은 자유스럽지 못했지만 레슬링을 하겠다는 열정만은 대단했다. 공포의 16문킥과 스승은 바바에게 대포알 같은 가라데 촙을 전수시켰다. 바바는 맹위를 떨쳤다. 그의 등장은 이노키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또 한명의 숙적이 나타난 셈이다. 그와도 수없이 많은 혈전을 벌였다.
나,자이언트 바바,안토니오 이노키,맘모스 스즈키...스승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의 또다른 흥행을 위해 '신 4인방 체제'를 구축했다.
네 사람중 가장 연장자는 나였다.
하지만 냉혹한 프로레슬링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는 숫자일뿐이고 경쟁에선 나이가 밥먹여 주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링 밖에선 나를 선배로 깍듯이 모셨지만, 링만 올라 가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그러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링밖에선 이들이 후배로 보였지만, 링위에선 반드시 꺾어야 할 적수였다.
네 사람은 자신만의 독특한 전매특허 기술을 갖고 있었고, 개성이 남달랐다.
나의 트레이드 마크는 박치기였다. 또 자이언트 바바는 로프로 밀친 후 반동으로 튕겨져 나오는 상대를 큰 발로 킥하는 16문킥, 이노키는 코브라 트위스트, 맘모스 스즈키는 보디슬램이 탁월했다.
스승은 네 사람을 각자의 특기를 살린 기술 배양에 앞장서도록 했지만 늘 강조한 것은 투혼과 투지였다.스승은 프로 레슬링 선수의 첫째 조건으로 체격을 강조했다. 기술은 그 다음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끈기와 투지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덩치가 크고, 키 큰 선수들은 투지와 끈기가 약간 떨어진다. 스승은 그 끈기를 갖도록 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훈련시켰다. 스승이 구두를 신을 때 네 명 중 한명은 잘 신을 수 있도록 신발을 앞에 내놓는다. 그러면 갑자기 발로 얼굴 혹은 몸통을 가격하곤 한다.
또 윗옷을 주더라도 그렇다. 옷을 드리면 옷을 입는 척 하고 팔꿈치로 상대를 가격한다. 사실 이런식으로 한방 맞으면 기분이 상한다. 스승이 이렇게 갑자기 때리는 것은 레슬링은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비의 습관화를 길러준 것이었다.
이런 것은 또 인내심이 요구된다. 인내심을 기르도록 하기 위해 스승의 훈련은 도장이든 밖이든 훈련의 생활화가 되도록 했다. 자고로 스승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서로가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 했다. 이는 존경의 의미도 있지만 옆에 있으면 날벼락을 맞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1960년 9월30일 이노키와 바바가 데뷔전을 치른 후 스승은 네 사람을 국제적 선수로 키우기로 결심을 굳혔다. 프로레슬링의 참된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난 스승의 트레이닝 스타일을 잘알아 그런대로 참고 견뎠다. 하지만 세사람은 달랐다. 오죽 그 훈련이 가혹했으면 스즈키는 달아나기도 했다. 또 바바도 "프로야구 훈련도 힘들지만, 프로레슬링이 이렇게 힘든 운동인 줄 몰랐다"면서 "솔직히 그만 두고 싶다"라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어린 이노키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때면 난 이들에게 "이런 시련을 견디지 못하면서 무슨 레슬링을 하겠다고 하느냐"며 질책과 격려를 했다. 선수가 훈련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프로레슬링 선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야구나 축구 등 다른 운동 종목 선수들도 불만을 제기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스승이 훈련시키는 것은 국제적 선수로 키우기 위한 일환이었지 별뜻은 없었다.
14세 때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
브라질 육상선수권대회(주니어 부문) 투원반 및 투포환 우승.
1960년 브라질을 방문 중이던 당시 프로레슬링 세계 선수권자 역도산에 스카우트되기 전까지 안토니오 이노키의 이력이다. 올림픽 출전을 꿈꾸던 거구의 육상 소년이었던 이노키는 역도산에 이끌려 그해 4월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에 입문한다. 이노키는 역도산 1기 문하생으로 같은 방을 쓸 정도로 가까웠던 김일과 1960년 9월 30일 처음 대결한다. 이노키에게는 데뷔전이었고 데뷔전 상대가 김일이었던 것이다.
63년 12월 스승 역도산이 야쿠자에 의해 살해된 뒤 이노키는 자신의 이름을 안토니오 이노키로 개명한다.이어 72년 1월 28일 신일본프로레슬링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만들면서 점차 레슬링 대부로 급상승세를 타게 되며 역도산의 일본프로레슬링에는 김일만이 남아 고군분투하게 된다.이노키는 73년 NWF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것을 비롯해 숱하게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노키는 89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이 된다. 그해 4월 소련(당시) 당국과 제휴해 토쿄 돔에서 일.미.소 레슬링 대회를 연 것이 계기였다. 대회 3개월 뒤 스포츠평화당을 결성해 출마한 것이다. 이듬해 그는 걸프전 이라크 인질 석방 운동에 참여했고, 캄보디아.소말리아.모잠비크 파병 등에도 목소리를 냈다. 95년에는 북한 당국과 평양에서 문화.체육축전을 공동 주최했다.
98년 4월 토쿄 돔에서 프로 레슬러 인생 38년 은퇴식을 하면서 그는 `세계 격투기연맹` 구상을 발표했다. 이후 프로듀서.프로모터 자격으로 연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은퇴사에서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도전을 그만두었을 때 늙어가는 겁니다. 이 길로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면 길은 없습니다. 일단 한 발 내디디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