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한뫼 晶峰 조 세 용
연일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면서 기승(氣勝)을 부렸던 더위가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를 지나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로 접어들면서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여인이 갑자기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고무신 거꾸로 신고 변심하듯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든다.
드디어 가을이 소리없이 찾아왔나 보다. 어제까지만 해도 뿌옇던 하늘이 오늘 따라 유난히 눈부시도록 높푸르고 청명(淸明)하다.
나는 이렇게 좋은 날 서재에만 쭈그리고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등산복으로 갈아입고는 아파트 뒷산(광교산 신봉동 줄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따라 솔숲도 갈매빛으로 짙푸르고, 등산로 입구의 코스모스도 외출하려는 여인처럼 산뜻하고 아름답다.
한 발 두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속살을 누렇게 드러낸 밤송이들과 도토리들이 지천으로 눈에 띈다. 정비석(鄭飛石)은 <들국화>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 이효석(李孝石)은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라고 단정한 바 있으며, 당(唐) 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추흥(秋興)>이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첫 머리에서 ‘구슬 같은 이슬이 내려 단풍잎 시들어 떨어지고, 무산과 그 아래 계곡 무협의 가을빛이 쓸쓸하구나(玉露凋傷楓樹林 巫山巫峽氣蕭森)’라고 가을은 ‘조락(凋落)의 계절이요, 쓸쓸한 계절’이라고 읊은 바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 아닌, 조물주가 우리에게 산수(山水)를 이리 칠하고 저리 칠해서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를 보여 주는 ‘미의 계절’이요, 가을은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땅속 깊이 파묻고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연의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에 대해서 깊이 성찰(省察)도 해 보는 ‘사색(思索)의 계절’이기도 하며, 자연의 모든 수목(樹木)들이 기후 조건의 변화와 영양 공급 상태의 변화로 시들어 버리는 ‘조락의 계절’이기에 앞서 먼저 한여름 동안 성장된 결과를 매듭짓는 ‘결실(結實)의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갈바람에 곡식이 혀를 빼 물고 자란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모든 곡식들은 놀랄 만큼 빨리 자라서 익어간다는 뜻이다.
나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솔잎 속에 파묻혀 있는 밤송이 하나를 등산 지팡이로 끄집어내어 등산화 발 사이에 넣고 으깨어 보았다. 이 놈은 결실이 아직 덜 되었는지 잘 벗겨지지 않았다.
한참 씨름을 하다가 드디어 밤 한 알을 꺼냈다. 밖으로 살그머니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부위만 누르스름하고 껍질 속에 깊숙이 숨어 있었던 부위는 아직 덜 영글어 이제 막 어머니로부터 젖을 뗀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같이 푸르스름했다. 나는 갑자기 무슨 죄를 지은 것같이 마음이 언짢아 왔다. 가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밤나무에서 직접 딴 게 아닌데 뭐……”
하고 자위도 해 보았으나, 가엽고 불쌍하다는 생각은 좀처럼 내 뇌리(腦裏)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공연한 짓을 했어. 늙은이가 주책이야. 설익은 걸 왜 까발렸지?”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질책(叱責)하면서 목적지인 맷돌바위까지 가서 바윗돌에 털석 주저앉았다. 초가을 바람인 색바람이 불어 땀에 촉촉이 젖은 등줄기와 번민(煩悶)하고 있는 내 머리를 서늘하게 식혀 주고 있었다.
미숙(未熟)한 것은 어느 정도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A. 지이드가 <지상(至上)의 양식(良識)>이라는 글에서 ‘기다림이란 욕망이기보다는 다만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이어야 한다.’라고 언급한 말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나는 오늘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의 등산을 통해서 이 같은 진리 하나를 새삼 터득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