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의 영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들
1. 자기의 판단에 근거하여 잘못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허물어뜨리는 것을 자신들의 주요한 사역으로 봄 - 이런 사람의 사역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매를 맺는 지속적인 사역들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파괴를 가져오게 된다.
2. 특히 자신보다 더 열정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질책이나 충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 당신을 교정해주려고 누군가가 시도했던 지난 최근의 몇 차례 동안 당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라.
3. "하나님께만 귀를 기울이고 사람들로부터 듣지 않겠다"는 철학을 가지는 것 - 하나님께서 자주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명백한 착각익 심각한 영적인 교만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4.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교회의 옳은 것보다 잘못된 것을 더 많이 보려고 하는 버릇이 있는 것 - 요한은 계곡에서 바벨론을 보았지만, 그가 높은 산으로 옮기어졌을 때 그는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계21:10). 우리가 오직 바벨론만 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보는 시각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 참된 비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의를 사람이 행하는 것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맞추게 될 것이다.
5. 주님의 표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죄의식에 압도당하여 지배받는 것 - 이것은 종교의 영의 뿌리인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우리의 교제의 근거를 십자가에 두려고 하기 보다 우리의 행함(performance)에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조건을 충족해 주셨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취하시려고 찾으시는 완성된 사역이 바로 그분이시다. 삶에서 우리의 전체적인 목표는 단순히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6. 자신의 영적 생활에 대한 점수를 채점하는 습관 - 이것은 우리가 더 많은 집회에 참석하고, 더 많이 성경을 읽고,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관해 느끼게 되는 더 나은 듯한 느낌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은 고귀한 노력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적인 성숙의 진정한 잣대는 주님께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7. 모든 사람들을 교정해 주도록 자신이 지시 받았다고 믿는 것 -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스스로 임명받은(self-appointed) 파수꾼, 또는 보안관이 된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세우는 데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만일 그들이 심각한 분열을 야기 시키지 않을지 모르지만 교회를 계속하여 동요와 선동의 상태에 있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8. 다른 사람의 약함 또는 실수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며, 군림하는 보스 스타일의 지도력을 가지는 것 -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9.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가깝다는 느낌을 갖거나, 자신들의 삶 또는 사역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 - 예수님을 통하여서라기보다 자신들의 어떠함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기만의 징후이다.
10. 특히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될 때, 영적 성숙과 훈련에서 한껏 자부심을 가지고 또한 거기에 도취하는 것 - 진정한 영적 성숙은 그리스도 안으로 성장하는 것을 포함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한다면 진정한 목표이신 예수님을 시야에서 놓쳐 버린 것이 분명하다.
11.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최선두"(cutting bdge)에 자기가 서 있다고 믿는 것 -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에 자신이 관계하고 있다는 생각도 포함된다.
12. 기계적인 기도 생활을 유지하는 것 - 자신의 기도 시간이 끝나거나, 기도 목록을 따라 기도를 마쳤을 때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그는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가 끝났을 때 그는 결코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13.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 -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우상숭배의 징후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섬기는 종교로 귀결되게 된다.
14. 감정주의를 과도하게 반박하는 것 -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을 만날 때, 하나님의 생명은 그들에게 대개 과도하고 감정적이며 육적으로 비추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정은 종종 감정적이며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 그가 나타내 보여주었던 것처럼 매우 표현적(demonstrative)이다(삼하6:14-16을 보라).
15. 성령의 사역의 대체물로서 감정주의를 사용하는 것 - 이것은 앞에서 지적했던 내용과는 모순된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종교의 영은 자신을 보호하고 높이기 위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을 종종 취할 것이다. 이러한 감정주의의 이용은 회개의 증거로써 흐느낌과 울부짖음을 요구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만져주심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권능 아래 쓰러짐 같은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진정한 성령 사역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영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러한 현상들을 요구할 때이다.
제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나단 에드워드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가장 거칠고 가장 거역적이던 몇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서 24시간 동안 거기 그대로 있었던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런 후에 그들은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성령의 현상들이 대각성 운동의 원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부흥을 방해하는 원수들보다 이런 현상들을 날조하여 꾸며낸 사람들에 의해서 대각성 운동이 끝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16. 다른 사람들의 사역보다 자신의 사역이 뛰어나 보일 때 용기를 얻는 것 - 다른 사람의 사역이 자신의 사역보다 더 뛰어나 보이거나 더 빨리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반대로 용기를 잃게 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17.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행하시고 있는 일에서보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일에 더 영광을 돌리는 것 -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다. 휘장은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어느 누구보다도 못지 않게 오늘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종교의 영은 단순히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기보다는 언제나 일(work)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18. 새로운 운동들이나 교회들에 대해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 - 이것이 질투의 명백한 증거이며 하나님은 자기들을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새로운 어떤 일도 행하지 않으실 거라는 막연한 주장들은 종교의 영으로부터 말미암는 주된 한 가지 열매인 교만이다. 그런 정신성을 가진 사람들은 새 일을 행하시는 주님께 거의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19.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현상들에 대해 거부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 - 자신의 의견이 하나님의 의견과 똑같다고 간주하는 것은 교만함과 오만함의 징후이다. 진정한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며 열린 마음의 태도를 유지하게 해준다. 또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인내성이 있게 열매를 기다리도록 해준다. 진정한 분별은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을 기다리며 소망하도록 해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나쁜 것이 아니라)을 취하라"(살전5:21)는 교훈을 받게 되는 것이다.
20. 교회 안에서 육적인 세속성(camality)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 심지어 가장 비판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교회 안에는 훨씬 더 많은 육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성령의 운행하심은 매우 적은 것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육으로부터 벗어나서 성령님께 대한 우리의 복종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그런 것들 사이에서 우리가 분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비판적인 사람들은 아직 60%정도의 육적인 사람들을 없애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작년에는 95%정도 육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성장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이 영적인 여정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 줄 수 잇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21. 교회에서 미성숙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 - 주님께 받아들여질만한 미성숙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이 네 살 된 아이는 나이 열네 살 된 아이와 비교했을 때 당연히 네 살된 아이가 훨씬 미성숙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다. 사실 그 아이는 두 살 된 아이와 비교하면 매우 성숙해 있을 수 있다. 이상주의적인 종교의 영은 다른 중요한 요인들을 고려하는 일없이 오직 미성숙만 바라본다.
22. 하나님의 승인에 대한 증거로서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지나칠 정도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 이것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계속해서 채점하는 것의 또 다른 한 가지 형태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위대한 기적들 가운데 어떤 것들, 가령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은 불고 몇 사람밖에는 보지 못했다. 그분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분의 일을 행하고 계셨던 것이지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 자신의 사역과 명성을 증진시키고 세우기 위해 기적들을 증거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길에서 심각하게 이탈해 온 것이다.
23. "완전하거나, 거의 완전한 것"이라고 자기가 여기지 않는 어떤 일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 - 주님께서 타락한 인류에 참여하셨고, 자기의 생명을 타락한 인류를 위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그분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품성도 또한 그러하다.
24. 종교의 영에 대해 과도하게 편집광적인 것 - 우리가 종교의 영을 두려워함으로써 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그것을 이김으로써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또는 "그분께서 성취하신 것"이나 "그분의 어떠하심"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영광을 돌리려는 경향이 있는 것 -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분이 성취하신 것, 또는 그분의 어떠하심(who He is)이 아닌 다른 것 위에 우리의 삶이나 사역, 또는 교회를 세우고 있다면 우리는 어려움이 올 때 견디지 못하는 불확실한 토대 위에 세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