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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암송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참소망
과거의 허물과 죄
플로리다 주에 가서 디즈니월드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어린이에게 꿈을 준 월트 디즈니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 신화적이고 아름다운 자서전들이 많이 쓰여졌으나, 최근에 마크 엘리엇이라는 사람이 그에 관한 새로운 전기를 썼습니다. 그 내용은 "평생을 FBI의 비밀요원으로 지냈고, 유대인에 대한 각별한 편견을 갖고 반유대주의 운동을 벌였으며, 철저한 알코올 중독자로서 밤을 지새우면서 괴로워했던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다른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며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 다. 하나님의 선언과 진단, 이 창조주와 심판자의 진단 앞에서 누가 예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악성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 내 안에 있는 연약성과 아직도 존재하는 부패성을 알기에 끊임없이 성령의 지배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한 훈련 속에 살아가는 사람." 제가 만약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의인, 위인, 성자의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몇 달 전 일본의 한 월간지가 42년 전에 있었던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의 과거사를 공개하여 그를 곤경에 빠트린 적이 있었다. 그 월간지는 모리 총리가 20세 때 윤락가에서 매춘 단속에 검거됐었다고 폭로했던 것이다. 당시 도쿄 사창가에 대한 경찰의 일제 단속으로 약 20명의 유락업자와 고객들이 검거됐는데 와세다대학 1년 생이던 모리 요시로도 들어 있었고 얼마 후 그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 월간지는 당시 단속에 관여했던 전직 경찰 간부의 증언을 소개하고 모리 총리가 매춘방지법을 위반한 범죄경력을 지닌 전과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모리 총리는 동 월간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또 월간지 측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경찰 조회를 주장했다. 그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42년 전의 전과'라는 표현을 보고 그런 식으로 과거를 뒤져낸다고 할 때 과거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시인 윤동주의 표현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게 살아온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의 허물들을 지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전과를 그분의 컴퓨터에서 지울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에스겔18:21-22)
과거의 상처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본문: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로마서 8장 11절은 두 번이나 성령을 '살리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미래의 부활을 주시는 성령님, 즉 죽은 성도의 몸을 살리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타당한 해석은 현재 살아있는 성도의 영혼과 육신을 더욱 활력 있게 만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살린다'라는 단어가 꼭 죽은 몸의 소생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에서 '살린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자녀를 낳게 될 수 있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성경에서 '살린다'라는 단어는 약하고 병든 몸에 활력이 넘치고, 원기가 회복되고,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살린다라는 말은 1) 육체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2) 강하게 하고 3) 활력이 넘치게 한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뜻입니다. 즉 성령님은 우리의 육신을 정화시키고, 강하게 하고, 활력이 넘치게 합니다. 육신의 삶을 생기 있게 만드는 진정한 원천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삶의 힘의 원천은 신경의 힘이나 근육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음식, 공기, 세포조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약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이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육신적 삶에 생기를 주는 진정한 원천은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삶에 생기는 주는 진정한 원천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 생기입니다. 육신적 삶의 원천이 성령이 사실을 알려주는 성경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의 예가 그것입니다. 그의 힘은 그의 근육과 뼈 혹은 몸무게와 덩치에서 나온 힘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의 힘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힘이었습니다.
성령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그는 놀라운 힘을 얻고, 수많은 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삼손을 떠났을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약해졌고 결국 적에 의해 눈멀고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없는 육신은 불씨만 남기고 꺼져버린 벽난로와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옆에 가도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씨만 남은 꺼져버린 벽난로에 휘발유를 뿌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불이 타올라 얼마나 실내가 따뜻해집니까? 우리의 육체가 꺼져버린 잿더미 같을지라도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단순한 진리이지만 아주 놀라운 비밀을 간직한 진리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내적 치유'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내적 치유는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논리적인 근거를 두고, 신앙상담에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학에서는 과거의 상처가 사람들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사람들을 우울한 사람,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기 때문에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울한 사람,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과 상담할 때 과거에 상처받았던 일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현재의 모습과 연관시키며, 심지어는 모태에서 받은 상처까지 얘기하며 현재를 진단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담을 들은 사람은 마치 어떤 새로운 진리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아! 내가 그래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구나!"
그런 깨달음과 함께 자기가 원래부터 나쁜 피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고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내적 치유 상담의 긍정적인 효과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성격이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현재의 고쳐야 할 성격 문제를 실제적으로 고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잘못된 성격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하면서 과거의 상처로 인한 영향력을 귀신으로 역사로 생각하고 축사(逐邪)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열심히 내적 치유 기도를 했는데 사실상 성격이 달라지지 않고 원래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를 치유해야 하는데 과거를 치유한다고 하니 과연 옳은 방향일까요?
어떤 성격에 대해 과거의 원인을 찾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타당할지 몰라도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사단의 양심'을 지나치게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과거의 잘못과 상처를 떠올리게 되고, 그런 식으로 과거의 상처를 지나치게 떠올리면 오히려 해결은 더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행동, 증상을 과거의 상처나 기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 즉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정신결정론>이 이론적으로 맞는 이론일지는 몰라도
그 이론을 너무 좋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이론을 따르기에는 우리의 현재의 삶과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의 삶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없는 사람은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압박할 수 있지만 성령이 내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상처는 흩어지는 미망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라는 발목에 붙잡혀서 찬란한 미래, 보증된 미래의 영상이 희미해집니까? 그러므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급선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 나의 삶에 살리는 영이신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과거의 상처가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 내 외모 때문에 정말 위축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외모는 부족해도 즐겁게 살아야지요. 웃고 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던데요." 성령 충만한 삶은 현재의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에 집중하며 살지 마십시오. 성령 충만한 은혜로 현재를 활기차게 살아가십시오.
가장 위험한 과거
많은 사람이 모인 어느 잔칫집에서 집주인이 열심히 부엌에서 돕고 있는 한 부인에게
미안한 듯 “뭘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세요.쉬면서 하세요”라고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 부인에게 쏠렸다.“저 분은 언제 어디서나 말없이 돕는 분인 걸요”하고 누가 말했을 때는 모두 그녀를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유달리 우쭐대며 주목받기 원하는 부인이 큭 하고 비웃었다.“그 여자,과거가 있는 여자예요” 모두 눈빛이 변했다.“과거? 무슨 과거?”라는 질문부터,“알게 뭐야 처녀 때 애기를 난 거야?”“사기를 쳤는지 누가 알아” 사설이 자자해졌다.식사 후 한 부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아주머니에게 과거가 있다고 저 분이 그러는데 정말인가요”“네” “뭔데요?” “과거에 저는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답니다”“그게 과거라는 건가요?”“네,그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과거라는 것도 있는가요?”
과거와 비교하지 마세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 (잠언 3 : 34-35)
지난해 중견 제빵 업체인 S식품 생산 반장직을 끝으로 25년 동안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야 했던 김모(49.서울 관악구 신림동)씨는 새해를 2평 남짓한 한 경비초소 안에서 만났다. '김반장님' 대신 붙은 '김씨'라는 호칭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전에 받던 2백 10만원의 3분의 1에 불과한 70만윈의 월급도 요즘 같은 때는 소중할 뿐이다. 지난해 8월 기아자동차 차장직을 마지막으로 해직 당한 뒤 서울 구로 공단의 중소 자동차 부품업체 과장으로 들어간 박모(41.서울 금천구 시흥동)씨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기업에 다녔다는 게 훈장입니까?
비록 지금은 작업용 점퍼를 입고 예전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을 받고 있지만 아직 실업자 신세를 못 면한 옛 동료들을 볼 때 전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IMF가 어디 평생 가겠습니까?"
모두가 과거 일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을 가득 담은 자루들이 옮겨질 때 교황 이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교황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보게나, 이젠 교회가 '금과 은 없어도'란 말을 하는 것도 다 과거 일이야."
그러자 아퀴나스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교회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때도 다 지났습니다."
그렇다. 교회가 안정과 편안함과 피흘림 없는 봉사의 영역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 교회는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개척할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반면 교회가 헌신적이 되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역사상 헌신적인 일들은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타인을 위해 봉사하던 사람들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산이다.(행3:6, 렘14:7)
고통의 과거는 소망의 미래로
세계의 삼대 참회록에 꼽히는 것은 어거스틴의 참회록, 루소의 참회록, 톨스톨이의 참회록인데, 그것들은 한결같이 지난날의 어리석었던 생활을 돌이켜보면서 아파하고 새 인생으로 거듭난 변화된 생활에 대하여 노래한 작품들입니다. 우리는 가끔 과거에 너무 집착하여 현실에 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과거가 아름답지 못했다고 해서 미래도 아름답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아내와 사별한 신학자 C. S. 루이스에게는 일기를 쓰는 것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슬픔 속에서 그의 영혼의 상태를 정돈하여 정신병자가 되지 않게 한 것은 기도와 간구였고 그 속에서 집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절망과 비탄 속에 시작한 그의 영의 세계는 폐허와 같은 절망의 심연을 넘어서서 신앙을 재발견하게 했으며 결국 「슬픔을 다하다」 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급강하하던 절망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시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요란한 소리는 기도와 간구의 소리입니다. 절망의 바닥에 추락하는 루이스의 처절한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던 것입니다. 거대한 곰과 사나운 사자가 내 몸과 살을 찢는 것같은 고통이라도 그것을 이겨내면 결국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당신이 절대 절명의 시간이요, 소망이 없는 절대 절명의 공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절대 소망의 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과거
많은 사람이 모인 어느 잔칫집에서 집주인이 열심히 부엌에서 돕고 있는 한 부인에게 미안한 듯 “뭘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세요. 쉬면서 하세요”라고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 부인에게 쏠렸다. “저 분은 언제 어디서나 말없이 돕는 분인 걸요”하고 누가 말했을 때는 모두 그녀를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유달리 우쭐대며 주목받기 원하는 부인이 큭 하고 비웃었다. “그 여자,과거가 있는 여자예요” 모두 눈빛이 변했다. “과거? 무슨 과거?”라는 질문부터, “알게 뭐야 처녀 때 애기를 난 거야?”“사기를 쳤는지 누가 알아” 사설이 자자해졌다. 식사 후 한 부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아주머니에게 과거가 있다고 저 분이 그러는데 정말인가요”“네” “뭔데요?” “과거에 저는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답니다”“그게 과거라는 건가요?”“네, 그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과거라는 것도 있는가요?”
실패한 과거를 잊자
우리의 생활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때로는 쌀이 떨어지고 교통비조차 없는 비참한 지경에 빠질 때도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통스런 하루하루가 이어질 수도 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일은 필연적인 운명과도 같다.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실망을 뿌리치고 실현 가능한 일에 도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나이와는 상관 없으며, 목표가 있는 사람은 사막에서도 물을 구할 수가 있다.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든지 사업에서 실패했을 때 당신은 실의에 빠져 자리에 누워 버릴 수도 있다. 초조감, 자책감으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자살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때는 무슨 일을 해도 잘되지 않는다. 형편이 좋았을 때는 간이라도 빼줄 듯하던 사람들이 당신을 외면할 것이며, 지나가던 개도 당신을 향해 짖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당신은 이런 모든 악조건을 감내해야만 한다.
지금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삶의 울타리 안에 있는 당신은 스스로 활기찬 정열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자신을 책망하고 미워해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우선 당신은 실패한 과거를 잊어야만 한다. 깨끗하게 말이다. 이제 무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어쩌면 실패의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실패는 결코 성공으로 변신하지 않는다. 그 실패의 기억이 당신의 억울한 심정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그것을 되새기고 안타까워하면 할수록 상처만 덧날 뿐이다.
모든 것을 잊어 버린 텅 빈 백지 위에 ' 희망 '이란 두 글자를 적어 넣어라. 희망은 당신에게 트인 세계를 보게 해준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서러운 과거는 지나갔다
인간의 기억 창고는 희한하기만 하다. 기뻤던 일에 대한 기억은 쉽게 희미해지지만 슬펐던 일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일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타인으로부터 섭섭한 일을 당했던 일은 마음속에 쓴 뿌리가 되어 잘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한한 기억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슬픈 과거에 매여서 살며 현재와 미래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서러웠던 과거는 어제로 이미 지나갔다. 그러므로 서러운 과거에 매여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으로 현재를 무참하게 짓밟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의 과거에 충실해야 하기도 하지만 현재에 더욱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서러움이 현재의 의욕을 상실하도록 만들지 말자! 또한 과거의 슬픔이 내일에 대한 설레이는 기대를 무너뜨리도록 만들지 말자! 왜 동양 문명이 서양 문명보다 뒤진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동양 문명이 서양 문명보다 슬픈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슬픈 일이 기록된 페이지에 자꾸만 시선을 고정시키지 말자! 하루에 할당된 일조차 수월하게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우리의 튼튼하지 못한 어깨에 과거의 일조차 지게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서러운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암울한 과거를 잊자
한 소년이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소년의 부모는 자녀교육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무뚝뚝했고 아버지는 퉁명스러웠다. 왜소한 체 격의 이 소년은 '비전 없는 아이'로 불렸다. 그의 부모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소 년을 사관학교에 입학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에겐 두 가지 인생철학이 있었다. "좋지 않은 과거는 깨끗하게 잊어버리자. 오늘 내게 맡겨진 일은 반드시 오늘 해내고야 만다." 소년은 남북전쟁 때 남다른 책임감과 용맹성을 발휘 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밝은 성격은 그의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이 모일 수 있게 했다. 소년은 장성해 육군대장을 지냈다. 그리고 미국의 18대 대통령 으로 당선됐다. 그의 이름은 유리세스 그랜트. 만약 그가 고통스런 과거에 연 연했다면 열등감과 증오의 늪에 빠져 방황했을 것이다. '책임감'과 '암울한 기억에 대한 망각'이 약점 많은 한 소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인도 선교사로 유명한 윌리엄 캐리도 본래 구두수선공이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당신은 옛날에 구두를 만드는 사람에 불과했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그는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수선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 살던 사람이었다.
여자의 과거
여자의 과거는 정말이지 좀 심하게 말하면 때려죽인대도 불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주변에서 그런 문제 때문에 결혼 생활 내내 고통을 당하며 살고있는 여성을 몇 명 알고 있다.
비단 결혼 생활뿐 아니라, 연애 중일 때도 과거 남자와의 진한 사연을 털어놓았다가는
그것이 굴레가 되어 오래오래 장애 요인이 되리라.
여름 바닷가 같은데서 무드에 마음이 약해져 진실 게임하자는 남자의 꾐에
절대 넘어가지 말기를... 여성들은 과거 문제에 대해서는 시치미 딱 떼고 앙큼을 떨 일이다.
그게 서로에게 좋다.
* 여자의 과거는 여자가 말해서도 안되지만 남자가 물어서는 더 안됩니다. 진실 규명도 힘들 뿐더러 괜한 분란과 파탄의 불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과거는 대체로 아름답고 슬픈 상처이기 쉽습니다. 그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어 새로이 신부(新婦)로 태어나게 하는 씻김굿이 곧 결혼이며, 결혼은 그녀의 과거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의 미래를 보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라
필라델피아지 편집인인 프레드 셰드씨는 옛 명언을 멋 있게 표현할줄 아는 재질을 가진 사람이다.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손을들어 보십시요." 거의 모두 손을 들었다. "그러면 톱밥을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물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물론 여러분은 톱밥을 켤 수 없지요." 셰드씨는 외쳤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이지요. 과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걱정하는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야구계의 원로인 코니 매크에게그가 진 게임 때문에 걱정을한 일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예, 나도전에는 종종 그랬었지요,그러나 그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라(염려)
필라델피아지 편집인인 프레드 셰드씨는 옛 명언을 멋 있게 표현할줄 아는 재질을 가진 사람이다.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손을들어 보십시요." 거의 모두 손을 들었다. "그러면 톱밥을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물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물론 여러분은 톱밥을 켤 수 없지요." 셰드씨는 외쳤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이지요. 과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걱정하는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야구계의 원로인 코니 매크에게그가 진 게임 때문에 걱정을한 일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예, 나도전에는 종종 그랬었지요,그러나 그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흘러간 개울물로 물레방아를 찧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찧지 못하며 도리어 당신의 주름에 톱질할 뿐이다.
모두가 과거 일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을 가득 담은 자루들이 옮겨질 때 교황 이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교황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보게나, 이젠 교회가 '금과 은 없어도'란 말을 하는 것도 다 과거 일이야."
그러자 아퀴나스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교회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때도 다 지났습니다."
그렇다. 교회가 안정과 편안함과 피흘림 없는 봉사의 영역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 교회는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개척할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반면 교회가 헌신적이 되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역사상 헌신적인 일들은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타인을 위해 봉사하던 사람들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산이다.(행3:6, 렘14:7)
'과거의 나'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10가지 충고
1. 대화에서 '나는...'이란 말을 쓰지말라. (나는 소심해. 나는 솜씨가 없어)
2. '나는 ...'이란 말을 안쓰겠다고 선언하라. (친구에게 주의를 달라고 부탁하고
스스로도 기록해보라)
3. 이제까지 했던 행동과 반대로 해 보라. (소극적이었다면 나서서 자신을 소개해 보라)
4. 지금까지 도피했던 일과 부딪쳐보라.
5. 일에 실패했을때 과거의 경험과 연결시키지 말라. (오늘부터 새로운 '나'로 변화되고
있음을 잊지 말라)
6. 타고난 성격이라는 것은 없음을 알라.
7. 어떤 일을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것임을 알라.
8. 미래의 내 모습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라.
9. 매일 매일 나의 행동의 변화를 점검해 보라. (변화된 행동과 변화되어야 할 행동)
10. 모험과 노력을 두려워 말라.
6.25를 상기하며
6월이면 6.25를 상기하게 되며 41년전 동족상잔의 비극적 엄청난 수난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삼천리금수강산은 초토화되고 동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아수라장과 같은 쓰라림과 아픔에 산천도 울었고 초목도 통곡하였으리라 여겨집니다.
남편잃은 아내, 부모잃은 고아들, 누더기를 걸치고 깡통들고 배고파구 걸하던 모습들, 시체를 밟으며 포화속에 남하해야 했던 끔직한 기억들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민족수난의 역사를 통과하면서 피흘린 순교자들의 피의 호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민족과 더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를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교회 부흥, 경제 부흥, 국민소득 5천불 시대에 접어든 축복의 땅으로 응답해 주셔서 선진국대열에 다가설수 있게 획기적으로 변화하였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
께서는 살아 역사하시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6.25를 체험하지 못한 일부에서 경거망동하여 이미 공산종주국인 소련에서도 공산주의로는 죽도밥도 안된다며 개방하는 이때에 공산주의를 찬양하며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니 이들을 깨우쳐야 할 사명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생명경시의 풍조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입니까?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삶이여야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먹고, 입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같은 경쟁사회에서는 하찮은 일에도 나의 소리를 높이려는 이기심으로 꽉 차 있으며 정치, 경제, 학원등 각 분야에서 승리자만이 성공한 사람이요 인정받고 환호를 받게되고 여기에서 밀려난 다수의 국민들은 발붙일 곳이 없게되니 사회는 혼란해지고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입시준비에 시달리는 학생들은 좌절감에 탈선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치인들이여! 참된정치가 무엇입니까?
학생들이여! 참된 성공이 무엇입니까?
경제인들이요! 참된 경제 인상은 어떻해야 합니까?
지금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웁시다.
한국교회는 오늘의 경쟁사회속에서 밀려나 절망하는 영혼들의 따뜻한 그리스도의 품, 안식처가 되어 도덕성 회복은 물론, 소망중에 스스로의 사명을 찾도록 길과 진리, 생명되신 주께로 인도할 사명이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볼때 오늘의 한국교회는 순교적 신앙을 전승하여 이정신을 일깨워야 할 사명수행이 절실한 때라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세계기독교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동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물론, 사람따라 여러가지 원인과 조건들을 열거할 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한국교회의 근저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수많은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의 피에 그 영광을 돌리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교회는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서 그 순교적 정신이 희박해지고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기독교가 참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정신, 사도들의 순교정신, 한국교회가그 리스도를 위하여 목숨바친 순교신앙을 이어 받아 일깨우는 운동으로 선교 2세기를 향한 복음적 사명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본회는 용인소재 한국기독교 순교자기념관에 순교사료 및 유품,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전국에 순교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코너도 마련하고져
합니다. 아울러 전국 각지에 순교자 기념복음화 대회를 계획중에 6월 24일-28일 저녁까지 군산중동 교회에서 군산 장항 연합복음화 대회를 개최하여 순교적 신앙을 일깨우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급변하고 다원화된 세대에 순교신앙 전승운동으로 효과적인 선교사명을 수행하여 복음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서 성숙한 한국교회 선교공동체로서의 도약을 위해 다 함께 동참하여 주시며 많은 기도와 성원을 보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안해도 다른 사람 하겠지 하는 생각은 하지 맙시다. 아무리 적은 정성이라도 모아지면 큰 힘이 됩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듯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 오늘의 희박해지기 쉬운 순교적 정신은 일깨워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과거 일로 걱적할 필요없다
이미 지나간 일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처해 있는 일로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 닥아와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앞 엣일도 할 일이 많은데 일 손이 부족할 지경인 데 어째서 우리들은 뒤엣일을 가지고 시간 낭비하는 줄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지나간 일들을 다시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시냇가에 서있다가 흘러가는 물을 뒤쫓아 가서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바람을 어디서 붙잡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흘러 내려오는 물을 떠서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생명수 강가에서 흘러내려 오는 영생수를 떠서 마십시다.
앞으로 이 땅에는 소름끼치는 일들이 닥쳐 올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깨어 기도하여 무서운 일이 닥치기 전에 영생수를 마시고 승천
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보냅시다.
과거 침략행위 용서해 주세요
日중학생, 서귀포시장에게 이색사과 편지
일본의 한 중학생이 "앞으로 일본을 훌륭한 나라로 만들테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이색편지와 반학생들과 찍은 사진을 제주도 서귀포시에 보내와 눈길.
전교생이 6백20명인 일본 나라현 카시바히가시(香芝東) 중학교에 다닌다는 마에기타 시로기군(前北廣貴·13)은 지난 11일 서귀포시장 앞으로 도착된 편지에서 "학교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했던 부끄러운 사실을 배웠다"고 썼다.마에기타군은 "역사상 은혜를 베풀어준 한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우리반 학생 37명이 한국의 37
개 시-군에 이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소개.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교회에서 한 선배님께 요즘 내가 주님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있는 한 청년을 소개했더니 그가 정색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뭐라구" 그건 안될말이야. 내가 그를 잘알아. 그는 나쁜 사람이라구. 성격도 괴팍하고 남을 잘 이용하고...나도 아주 큰 상처를 그 사람한테서 입은 적이 있어! 당장 만남을 중지해! 넌 지금 잘못하고 있는거야!" 나는 선배님이 그토록이나 그 청년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그렇지만, 그는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이고 지금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있어요. 오랫동안 지켜보았는데..그에게 약점도 있긴 하지만...선배님께서 말씀하시는...그런 나쁜 분은 아니예요". 나의 항변에 선배님이 벌컥 화를 내었다. "이 바보야! 그건 위장일 수 있어! 그는 인간성이 좋지못해! 내가 직접 당했다니까?"
"그...그래요!...근데...선배님께선 요즘도 그분을 만나고 계시나요?"
"뭐라구" 내가 그녀석을 왜 만나! 나한테 그런 큰 상처를 준 나쁜녀석을...!"
"그게 언제였는데요!". "말도마! 내가 대학 졸업한 해 였던가!"
"그럼...몇년전의일이예요?" "..한...6,7년 되나?". ".....그래요?"
나는 한참동안이나 그 선배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않고 뒤돌아서서 나왔다. 교회 바깥 골목길을 걸어나오며...마음 한 켠에서 솟구치는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옛날의 일들로 현재의 사람을 평가하다니! 불가사이한 일이다. 나는 그 선배님을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임에 틀림 없는가? 그 분의 판단과 평가는 그분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일까?
나도 내가 만나는 그 청년의 과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고 사나운 성품의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내가 선배님으로부터 그 청년의 과거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놀란 게 아니다. 나는 내가 존경했던 크리스챤인 그 선배님이 6,7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들을 지금까지 잊지않고 그 일들로 그 청년의 현재를 자신있게(?) 다른 사람(나)에게 평가할 수 있는 그 용기(?)에 놀랐다.
과거? 과거?....
나는 이단어를 떠올릴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과거".......
나는 그 청년에게 나의 과거를 낱낱이 다 고백했었다. 그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고,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모태 신앙이고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있는 신앙인이었으나 대학 2학년 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태연히 교회봉사를 하면서도 한 남학생과 계속 불륜의 관계를 맺었고 그런 삶은 1년이나 계속되었다. 나의 신앙생활은 만신창이가 되었고...결국 나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했다. 내가 나의 '과거'를 죄다 얘기했을 때, 그 청년은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직도 당신의 과거때문에 괴로워 하십니까?" 나는 솔직이,주님께 다시 돌아와 나의 잘못과 실수에 대해 자백하고 기도하였고, 따라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줄 확신하지만, 때때로 떠올릴 때마다 괴로움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그가 되물어왔다. "이미 앞서 말씀드린 저의 과거에 대해 자매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소리쳤다. "그건 지난 얘기잖아요?". 그러자 그도 역시 소리쳤었다. "그건 자매님도 마찬가지예요."
그날 나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찻집 테이블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나에게 그가 조용히 얘기해주었다. "과거를 묻는 크리스챤인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앞에 서는 자마다 고개를 자신있게 쳐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저 역시 어둡고 씁쓸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선 추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과거를 정죄치 아니하시고...오늘 날의 우리가 있기까지 우리를 다듬어 오셨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많이 주님께선 우리를 다듬어 가실 것이고 우리는 더욱 많이 다듬겨 져야 할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추하면 추할수록 우리의 지금의 감사제목은 더 크고 더 많은 법입니다."
우스운 얘기이지만 바로 며칠전에 내가 우리의 구역 권찰들이 모였을 때에 얘기했다. 우리 교회의 어떤 권사님이 그랬다고,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며느리하고 아들이 분가해서 따로 사는데 몇 달 후에 한 번 방문해서 부엌에 들어가 보았더니 전혀 밥해 먹은 흔적이 없더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해서 며느리 보고 밥은 안해 먹냐, 했더니 아침엔 우유 먹고 나가고 점심은 각자 해결하고 저녁에 회식하고... 그래서 밥을 할 일이 벌로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구!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따뜻한 밥을 해줘야지, 그래서 되겠느냐, 밥할 줄 모르느냐, 하고 잔소리를 했단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시어머니 보고 "이리 좀 들어오세요"하고는 문 딱 잠그고 한마디 하더란다. "어머니, 컴퓨터 할 줄 아세요? 영어 할 줄 아세요? 타이프 칠 줄 아세요? 피아노 칠 줄 아세요?" 다섯 가지를 물어보는데 하나도 하는 게 없더란다. 딱부러지게 말하는데 밥 하나밖에 못하면서 뭘 그렇게 큰 소리 치세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두 손 바짝 들었다고 한다. 알았다, 다시는 그런 말 안할께, 굶든 먹든 네 맘대로다, 내가 잔소리할 게 뭐 있냐 - 정신 차리세요. 밥 하나 하는 걸 가지고 뭘 재는가? 그럴 게 못된다. 세상, 자꾸 변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좀 뭘 했다, 하는 것 별거 아니다. 빨리 잊어 버리라. 어쨌든 자랑, 도대체 뭘 자랑하고 사느냐가
영웅의 증오
미국 프로야구사의 전설적 인물인 타이콥.그는 24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며 타율이 3할 이하로 내려간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열두번이나 타격왕에 올랐고 팬들은 그에게 열광적 성원을 보냈다.그러나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야구 관계자는 세명에 불과했다.참을성없는 성격으로 걸핏하면 싸웠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총살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이 타이콥을 망쳐놓은 것이다 .타격할 때마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했다.증오가 타격왕을 만들었으나 자녀들조차 그를 외면했다.
옛날의 나를 버려라
『과거의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나태나 유혹을 봉쇄하는 사람은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난 어거스틴(354-430)은 어느 날 자신을 [정욕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여인과 마주치게 되자 목례만 하고 지나갔다
.『저를 모른 체하긴가요? 보세요.저예요』 여인이 어거스틴을 붙들고 말하자 그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나는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랍니다』
후에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다.
잊고 싶은 과거
사람이 살아 오면서 한번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릴 때의 잘못은 후일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모든 잘못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그는 그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후회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 이것이 죄의 값인 것이다.
나에게도 잊고 싶은 잘못이 있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다. 2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남들은 다 잊더라도 ...
내가 중산 국민학교에 입학하고서, 어느 날부터인가 선생님은 책을 읽지 못하는 학생은 수업을 마쳐도 집에 보내 주지 않았다. 국민학교 1학년 짜리 꼬마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남으라면 남을 수밖에. 이 때부터 나는 꾸준하게 남게 되었다. 남아서 책상에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한다. 왜냐하면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도 매
우 괴로웠을 것이다. 똑똑한 아이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이 있어서 선생님께 물어 보았다면 선생님은 기쁜 마음으로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열심과 용기를 가진 아이가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 생활은 항상 일정했다. 십 리 길을 걸어 학교에 간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앉아 있는다.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은 교탁 앞에 앉아 계시고 꼬마 문맹인 열 명 정도가 책상에 남게 된다. 그리고 3, 4시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십 리 길을 혼자 외로이 ...
어린 나에게도 소위 스트레스라는 것이 나의 가슴에 쌓이고 있었나 보
다. 어느 날 이것은 하나의 폭탄이 되어 터졌다. 나는 갑자기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나의 머리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계신 교탁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오는 것을 보신 담임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셨다. 선생님은 예쁜 얼굴에 동그란 까만 안경을 끼고 계셨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나는 선생님을 노려보며 "야이! 가시나야! 집에 안보내
주나!"라고 욕을 했다. 그리고도 선생님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놀란 송아지 눈을 하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의 얼굴은 충격으로 무표정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표정도 짓지를 못했을까?
잠시 후, 선생님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아주 힘없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집에 가거라 ..." 이 소문은 학교와 온 동네로 퍼져 나갔다. 이 때부터 나의 별명은 "서가 정욕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2학기 때 밀양읍으로 전학을 했지만 나의 별명은 없어지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바뀌었다. --- "밀양 욕쟁이".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온몸은 또 전율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방인'이라는 책의 내용처럼 햇빛이 내리 비치고 있었던가? 아니면 감성리듬이 저조기(위험일)에 있었던가? 그 선생님의 성함도 정확하게 모른다. 후일 누군가로부터 강경렬 선생님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동그란 얼굴에 까만 안경낀 선생님의 놀란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법칙이 있지만 이것은 예외 법칙인 모양이다.
과거 잘못' 잇단 반성
21세기를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맞기 위해서는 20세기의 묵은 때를 과감히 벗겨내야 한다. 종교계가 다른 분야보다 앞서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의 경우 일제시대와 70, 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일부 종교인들이 보인 그릇된 행태에 대한 반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 외국 종교계는 2차대전 당시의 행위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조계종은 다음달 9, 10일 이틀간 서울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과거의 뼈아픈 잘못을 뉘우치는 자리를 갖는다. '민족문화수호와 전법(傳法)을 계종지도자회의'로 이름붙여진 이 회의에는 원로스님을 제외하고 교구본사주지, 중앙종회의원, 각종 위원회위원스님 등 조계종 지도급 승려 모두가 참석한다. 총 3백여명으로 예상된다.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민족종교로 자처해온 불교가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한 현실을 놓고 ▶승풍 (僧風)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고 ▶70, 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불교가 오히려 '어용'으로 나섰으며 ▶무분별한 불사 (佛事)로 민족문화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등 반성이 다각도로 논의된다.
불교지도자들은 이어 불사에도 문화적 요소와 환경문제를 충분히 고려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사회적으로 실천하자는 내용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할 계획이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대체로 적극적이었던 천주교에서는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했던 병인양요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났다. 최기복 신부등 인천가톨릭대 교수단은 최근 "병인양요 과정에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길안내, 통역, 정보제공 등으로 프랑스군에 협력한 것은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식민주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행동이어서 쇄국정책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고 반성했다.
이들은 아울러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인들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조속히 반환해줄 것을 프랑스 정부에 촉구했다.
이에 앞서 개신교측에서도 일제치하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뉘우치는 '한국교회 참회록'과 개신교 내부의 금권선거, 갈등구조 등을 뉘우치는 참회문이 각각 발표된 바 있다.
한편 외국에서는 프랑스와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프랑스 가톨릭의 경우 지난 9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7만5천명을 추방함으로써 이들이 나치에 희생당하게 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57년간의 침묵을 깨고 공식 유감을 표시했다.
올리비에 데 베랑제 대주교는 유대인을 나치수용소로 실어날랐던 파리 교외의 한 기차역에서 "우리는 신의 용서를 빌며 유대인들이 우리의 참회의 소리를 들어주기를 간청한다" 고 선언했다.
2차대전 전범(戰犯) 국가인 일본에서는 일본 성공회가 앞장섰다.
지난 11일 일본 종교계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성공회교회가 2차대전을 전후해 종교인들이 '일본의 식민통치와 침략을 묵인한 죄'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한 것. 현재 세계 종교계에서는 로마교황청이 과거 반(反) 유대주의에 관대했던 점, 나치의 유대인학살 당시에도 침묵을 지킨 점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내놓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거울삼아
지혜로운 사람은 실패의 과거를 통해 오늘의 성공을 만든다.
또한 실패의 경험을 통해 그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건전한 노료을 아끼지 않는다.
톱밥을 다시 켜지 말라
필라델피아지 편집인인 프레드 셰드씨는 옛 명언을 멋 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재질을 가진 사람이다.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손을 들어 보십시요." 거의 모두 손을 들었다. "그러면 톱밥을 켜 본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물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물론 여러분은 톱밥을 켤 수 없지요." 셰드씨는 외쳤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이지요. 과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걱정하는 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야구계의 원로인 코니 매크에게 그가 진 게임 때문에 걱정을 한 일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예, 나도 전에는 종종 그랬었지요,그러나 그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이미 흘러간 개 울물로 물레방아를 찧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찧지못하며 도리어 당신의 주름에 톱질할 뿐이다
후회할 것이 없는 일곱가지
1.나이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2.화가났을 때 쓴 편지를 찢어 버리는 일.
3.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먼저 사과 하는 일.
4.남에게 상처를 주는 추문을 정지시키는 일.
5.청소년들의 자아 발견을 도와 주는 일.
6.어머니에게 효도 하는 일.
7.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일.
♥돌아오지 않는 것 네가지
1.입으로 내뱉은 말.
2.날아간 화살.
3.지나가버린 인생.
4.놓쳐버린 기회.
오늘도 후회할 것 없는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