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46-49 어디에 무슨 집을 짓습니까? 2007. 3. 11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다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기까지 인생이라는 집을 짓고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 끝나는 날에 무슨 집이 어떻게 남아질것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사십니까?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도 없지요! 그러다가 죽으면 무엇을 남기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의 묘비에 이렇게 남기라고 유언하였답니다.
“내 우물쭈물 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라는 사람의 유언대로 이렇게 묘비에 남겨졌는데 원문보다 번역이 더 멋있습니다. 우리도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하는 그 때가 올 것입니다. 이런 유언을 보면서 사람들마다 또 해석이 분분합니다. 허비하는 인생을 보내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보람된 인생을 보내자고 합니다. 그러니 더 바쁘고 더 피곤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유대인의 지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간의 건축보다 시간의 건축에 마음을 쓰라는 것입니다. 헤셸의 안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문명의 발달은 공간을 건축하여 나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 안식을 주지 못한다면서 거룩한 한 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책이 인기 있는 책이 되었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안식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한 날이 영원과 연결되어 있기에 이 시간에 대한 의미를 잘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이 안식을 주시는 분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아직 그림자인 안식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인 안식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세계를 보게 합니다. 모두가 분주하게 공간을 점령하기 바쁜 시대에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누가복음 6:20절에서 시작한 평지설교가 오늘 본문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46-47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면서 따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48-49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집을 짓는데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는 사람과 같습니다. 큰물이 나고 탁류가 그 집에 부딪혀도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주초가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탁류가 부딪히면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건축 전문가가 아니라도 다 알아 듣습니다.
여기서 집을 잘 지어야 하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기초의 문제입니다. 기초를 어디에 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반석이냐 흙이냐의 문제입니다. 그 위에 어떤 집을 세우는가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우선 기초를 점검하고서 나중에 그 위에 집을 어떻게 지을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좋은 기초는 반석인데 이 반석위에 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해야 할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최소한의 단락은 20-45절까지입니다. 더 넓게 확대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입니다. 우선 신명기 28:1절을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28:15절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모든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면 여기서 모든 규례입니다. 모든 규례를 지키지 못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저주뿐입니다.
이제 다시 확인을 합니다. 2주전에 영적진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10문제를 제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있는 말씀으로 시험을 쳤는데 어떤 분이 조건 없이 베푸는 것에 대하여 동그라미는 안 되겠고 삼각형이라고 칠까 하다가 아니다 내가 언제 그런 적이 있는가 하면서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빵점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집을 어디에 어떻게 세워야 하는 것입니까? 우선 예수纛?말씀 앞에서 다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지어보겠다는 것은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려야 건설하며 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선지자의 계통으로 온 세례요한이 회개를 외쳤습니다. 인간들이 세운 의라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처절하게 철저하게 그 뿌리까지 뽑혀져야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실천한 의라는 것은 어떤 인간들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지키려고 하였는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부칙들마저 철저하게 지키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예수님이 배척당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기초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반석이 아니라 흙이었습니다. 반석이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함이 예수 그리스도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은혜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노력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자기 의로움입니다. 그 속에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것을 몰라도 이것 많은 옳다고 붙드는 것들이 사람들마다 다 있는 것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이것은 낫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흙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문명을 만들고 자기들이 이름을 높이고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온갖 짓을 다 하여도 그것은 다 흙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지금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그들의 신앙의 위대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세상의 영광과 힘에 대하여 무너지는 경험들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무엇을 받았습니까? 무엇을 이루어 내었습니까?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가는 것임을 알고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세상이 목적인 사람들은 세상의 공간을 정복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문화입니다. 도시 건설을 만들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바벨탑을 왜 쌓았습니까?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 바벨탑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인간세계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바벨탑들이 지금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의 탑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 기초를 바꾸는 것입니다. 통째로 옮기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전부 모래위에 세운 집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다 무너져 내릴 것들을 영원한 것 인양 목숨처럼 붙들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 인생의 주초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초, 주초가 무엇인지 조금 더 살펴봅니다. 에베소서 2: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무슨 터를 닦아 두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터를 닦아 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서 새로운 기초를 세우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0-11절을 봅니다.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다른 터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터가 됩니다. 이 기초 외에 다른 터를 닦는 것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이란 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지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2-15절입니다.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가 주님 오시는 그 날에 다 드러나게 될 것인데 이 본문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역자들에게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인 예수 그리스도위에 건축을 하는 자들이 어떻게 집을 세울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에 그 사람의 공력이 드러나는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고 세계를 날아다니면 간증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평생 개척교회를 면하지 못하고 고생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는 그날에 공력이 나타나는데 세상의 평가와 전혀 다른 심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에 태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과 은과 보석은 남지만 풀과 나무와 짚은 사라집니다. 남는 것과 사라질 것들로 구별됩니다. 남는 것과 사라질 것이 무엇으로 구별 되겠습니까? 기초와 동일한 재료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처럼 그 터 위에 무엇으로 세워져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열매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매란 예수님께 붙어 있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독립적으로 내가 이런 열매를 내어 놓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손으로 집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지음 받고 주의 뜻대로 유지되고 주의 뜻대로 결론지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수고하였다고 충성하였다고 면류관을 예수님이 세워주실 때에 그 면류관을 쓸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고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의 보좌에 돌려드리는 것이 요한 계시록 4장에 10-1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들은 지금도 주님께서 날마다 흔들고 계십니다. 잘못 지어지는 것들을 무너뜨리시고 주님의 은혜로만 세워지도록 흔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흔들어 버리시는가 하면 흔들리지 아니할 위로부터 온 것, 은혜로 온 것만 남기시기 위하여 흔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봉독” 흔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너짐이 지금 일어나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곳에 영구한 도성이 없음을 알기에 장차 올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