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念佛)을 실천하는 데엔 장애가 없다.
염불은 번뇌와 죄악이 깊고 무거움을 묻지 않습니다.
스스로 번뇌를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염불을 실천하는 데는 계정혜(戒定慧)의 장애가 없습니다.
이미 지은 악업과 지관(止觀)이라는 깨달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결정된 믿음을 요구할 뿐입니다.
염불은 고뇌와 죄악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 나는 삶을 원하여 본원력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일으키도록 합니다.
염불 행자는 삼계에 윤회하거나 악도(惡道)에 떨어질 일이 없습니다.
번뇌와 죄악과 일체 고통이 자비 광명에 섭수(攝受) 되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은 광대무변한 자비 광명에 섭수(攝受) 되어 평등과 자유와 안락이 보장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지혜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염불은 부처님의 지혜를 의심 없이 믿고 행해야 그 이익을 온전히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지혜를 의심하면 불제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염불을 선택하여 진실한 믿음을 일으키면 누구든지 구제받을 수 있습니다.
번뇌와 죄악이 심중하여도 장애를 입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극악의 범부(凡夫)도 구제받습니다.
염불 행자는 태생(胎生)에 나지 않고 화생(化生)으로 정토에 왕생합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믿음을 온몸으로 소화한 신앙의 빛이 자비 광명에 섭수(攝受) 되기 때문입니다.
자비 광명은 정토의 수승(殊勝)한 경계이며 그렇게 믿는 것은 믿음으로 일으킨 종교적 지혜입니다.
염불은 소소한 계율(戒律)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청정한 정토를 원하면서 계를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범부(凡夫)의 삶의 구조에서 온전히 계를 지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염불 수행은 계정혜(戒定慧)를 온전히 닦을 수 없는 범부(凡夫)를 구제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만약 계를 지키면서 염불한다면 한량없는 공덕을 얻을 것입니다.
염불은 욕망과 기복(祈福)을 버리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욕망과 기복의 에너지를 신앙의 빛으로 전환하고
정토를 원하여 결정된 믿음을 일으키도록 합니다.
염불 수행으로 자비 광명에 대한 신해(信解)가 깊어지고
일체 인연과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 욕망과 기복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자비 광명에 대한 신해로 일체 경계를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마주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혜와 복덕은 증장(增長)하게 됩니다.
염불은 고행을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불은 결정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염불은 남녀노소 직업과 근기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가능하며 무량한 이익을 얻습니다.
염불은 자연과 대중과 일상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수행입니다.
염불은 일체 생명과 더불어 광명의 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닦아야 합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얻는 작은 깨달음이 삶에 유익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염불을 어느 정도 익히면 삶을 떠나서 행하는 고행이 필요치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염불 수행의 깨달음은 인가(認可)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염불은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신앙의 빛으로 [경(經)]과 [논(論)]에 의지하여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깨달음의 경계가 [경]과 [논]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신앙의 빛으로 자비 광명을 신해(信解) 하는 신심(信心)은 인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수행 과정에서 경론에 근거한 약간의 지도가 필요할 뿐입니다.
염불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염불은 그 이익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으며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마음의 과학입니다.
염불을 실천하는 데는 일체 장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일으키고 실천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정목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