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상입장 470번지에서 출생
1943년 노은면의 노은국민학교에 입학
1955년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
1956년 대학 3학년때《낮달》,《갈대》,《석상》등이
『문학예술』지에 추천되어 등단함.
1957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65년 침묵 끝에 서울로 돌아와 작품활동 재개.
그 동안에 온갖 일(농사, 공사판 노동, 광산일, 등등..)몸소 경험
1974년 제1회【만해문학상】수상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
1981년 제8회【한국문학작가상】수상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 역임
1990년 제2회【이산문학상】수상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 가난한 사랑의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오월은 내게
오월은 내게 사랑을 알게 했고
달뜨는 밤의 설레임을 알게 했다
뻐꾹새 소리의 기쁨을 알게 했고
돌아오는 길의 외로움에 익게 했다
다시 오월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다
저자거리를 메운 군화발소리 총칼소리에
산도 강도 숨죽여 웅크린 것을 보았고
붉은 피로 물든 보도 위에서
신조차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오월에 나는 증오를 배웠다
불없는 지하실에 주검처럼 쳐박혀
일곱밤 일곱낮을 이를 가는 법을 배웠다
원수들의 이름 손바닥에 곱새기며
그 이름 위에 칼날을 꽂는 꿈을 익혔다
그리하여 오월에 나는 복수의 기쁨을 알았지만
찌른 만큼 찌르고 밟힐 만큼 밟는 기쁨을 배웠지만
오월은 내게 갈 길을 알게 했다
함께 어깨를 낄 동무들을 알게 했고
소리쳐 부를 노래를 알게 했다
- 비 오는 날
물 묻은 손바닥에
지난 십년 고된 우리의 삶이 맺혀
쓰리다
이 하루나마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아내의 죽음 위에 돋은
잔디에 꿇어앉다
왜 헛됨이 있겠느냐
밤마다 당신은 내게 와서 말했으나
지쳤구나 나는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비틀대는 걸음
겁먹은 목청이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소매끝에 밴 땟자국을 본다
내 둘레에 엉킨
생활의 끄나불을 본다
삶은 고달프고
올바른 삶은 더욱 힘겨운데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오히려 당신이 내게 외쳐대는
이곳 국만산 그 한골짜기 서러운 무덤에
종일 구질구질 비가 오는 날
이 하루나마 지쳐 쓸지려는 몸을 세워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 팔월의 기도
내 목소리로
내 노래를 부르게 해 주십시오
내 말로
내 얘기를 하게 해 주십시오
내 형제를 형제라 부르게 해 주시고
내 원수를 원수라 미워하게 해 주십시오
온 땅에 깔린
하늘에 바다에 강에 널린 넋들이여
오월의 넋들이여 팔월의 넋들이여
내 꿈은 작고 소박합니다
사십년 동안 갈라져 있던 형제들 동무들 모여
아흔 낮 아흔 밤을 목놓아 우는 것
이 땅을 짓이기고 뭉개는 구둣발을
갈가리 갈라놓고 찢어놓는 총칼을
내 노래 내 얘기 폭풍되어
몰아내게 해 주십시오
형제를 형제라 부른다 해서
원수를 원수라 미워한다 해서
뭇매질하고 발길질하는 더러운 발들을
동해바다 한복판에 쓸어넣게 해 주십시오.
- 길
길을 가다가
눈발치는 산길을 가다가
눈 속에 맺힌 새빨간 열매를 본다
잃어버린 옛 얘기를 듣는다
어릴 적 멀리 날아가버린
노래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갈대 서걱이는
빈 가지에 앉아 우는 하얀 새를 본다
헤어진 옛 친구를 본다
친구와 함께
잊혀진 꿈을 찾는다
길을 가다가
산길을 가다가
산길 강길 들길을 가다가
내 손에 가득 들린 빨간 열매를 본다
내 가슴 속에서 퍼덕이는 하얀 새
그 날개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과 어울어진 내
노래 소리를 듣는다
길을 가다가.
-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
삐걱이는 강의실 뒷자리에서
이슬 깔린 차가운 돌 층계 위에서
우리들은 처음 만났다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에서서 온 친구들
비와 바람과 먼지 속에서
처음 우리는 손을 잡았다
아우성과 욕설과 주먹질 속에서
충무로 사가 그 목조 이층 하숙방
을지로 후미진 골목의 대폿집
페허의 명동
어두운 지하실 다방
강의실에 찌렁대던
노교수의 서양사 강의
토요일 오후 도서관의 정적
책자을 넘기면 은은한
전차소리
그해 겨울 나는 문경을 지났다
약방에 들러 전화를 건다
달려 나온 친구
분필가루 허연 커다란 손
P는 강원도 어느 산읍에서
생선가게ㅣ를 한단다 K는
충청도 산골에서 정미소를 하고
이제 우리는 모두 헤어져
공장에서 광산에서 또는 먼 나라에서
한밤중에 일어나 손을 펴 본다
우리의 핏속을 흐르는 것을
보다 솟구쳐 오는 아우성 소리
어둠 속에 엉겨드는 그것들을 본다
제주도 강원도 경기도에서
비와 바람과 먼지 속에서
향수와 아쉬움과 보람 속에서.
-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건 우리뿐.
올해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목계나루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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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목계 나루' 중 / 고은
신경림 (申庚林.63) 시인의 호가 목계 (牧溪) 이듯
시인의 고향 언저리 목계 나루가 시로 아로새겨져 16행을 이뤘다.
어느 부분을 따로 잘라내기 어렵게 알찬 작품이다.
문득 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 를 연상시키는데
목월의 그것이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이면
목계의 이것은 어디 하나 헛디디는 데가 없이 단정하다.
보아라, 자연환경과의 이만한 혈친 (血親) 이 어디 쉬운 노릇이겠는가.
- 파장 (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 2001년을 보내면서 )
어지러운 눈보라 속을 비틀대며 달려온 것 같다
긴긴 진창길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것 같다
얼마나 답답한 한 해였던가
속 터지는, 가슴에서 불이 나는 한 해였던가
일년 내내 그치지 않는 배신의 소식
높은 데서 벌어지는 몰염치하고 뻔뻔스러운 발길질에
드러나는 그들 무능과 부패에
더러운 탐욕과 위선에
분노하고 탄식하고 규탄하기에도 지쳐
이제 그만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싶었으나
우리가 탄 이 거대한 열차가
그들의 난동에 달리기를 멈추면 어쩌나
철교가 무너지고 철길이 끊겨
어느 산허리를 돌다가 산산조각나면 어쩌나
불안하고 초조해서 너무도 초조해서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겠다고 목청을 높이고
남북 사이에 낀 짙은 먹구름에
멀리 밖에서는 쉴 새 없는 전쟁과 폭력의 울부짖음
창 너머 먼 하늘의 별을 보며
잠 못 이룬 밤이 또 얼마였던가
이제 지는 해를 향해 서서 가슴을 쓸어내릴 때다
그래도 우리는 무사했으니
혼돈 속에서도 많은 것을 이룩하고
많은 것을 쌓았으니
지는 해를 향해 서서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 끌고 가는 것은
큰 몸짓과 잘난 큰 소리가 아니라는 걸
추운 골목의 쓰레기를 치우는 늙은 미화원의
상처투성이 손을 보아라
허름한 공장에서 녹슨 기계를 돌리는
어린 노동자의 투박한 손을 보아라
새벽 장거리에서 생선을 파는
머리 허연 할머니의 언 손을 보아라
비닐 하우스 속에서 채소를 손질하는
중년 부부의 부르튼 손을 보아라
열사의 천막 속에서
병사의 다리에 붕대를 감는 하얀 손을 보아라
해가 지고 있다
내일의 더 밝은 햇살을 위하여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 달
달이 시원스레 옷을 벗었다
첨벙첨벙 수로 속에 들어간다
희뿌연 젖가슴을 드러낸 채 멱을 감는다
가없는 옥수수 밭에 바람이 인다
수로에서 나왔지만 옷이 없다
내놓을 수 없는 곳만 손으로 가리고
초가집을 찾아들어가 숨는다
달이 초가집 속에 갇혔다
초가집이 환하게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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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달' 전문 / 정철훈
시인이 중국 연변 조선족 촌을 찾아간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저녁이라지만 날은 무더웠던지 옷 벗고 멱을 감다가
물 속에 달과 자신이 함께 들어있음을 보았다.
달빛을 받아 희뿌연한 몸뚱이.하늘에 달이 떠있건만
그 빛을 받은 몸이 달 행세를 한다.시인은 환갑을 보낸지 세해를 넘어섰다.
그 주름진 알몸으로 시인은 초가집을 환하게 밝혀놓는다.
정녕 사람이 달인가.
-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차고 누진 네 방에 낡은 옷가지들
라면 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너희들의 힘으로 살쪄가는 거리
너희들의 땀으로 기름져가는 도시
오히려 그것들이 너희들을 조롱하고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 협박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벚꽃이 활짝 핀 공장 담벽 안
후지레한 초록색 작업복에 감겨
꿈 대신 분노의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투박한 손마디에 얼룩진 기름때
빛 바랜 네 얼굴에 생활의 흠집
야윈 어깨에 밴 삶의 어려움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골 장바닥 뒷골목에 처박혀
그 한겨우내 술놀음 허송 속에
네 울부짖음만이 온 마을을 덮었을 때
들을 메우고 산과 하늘에 넘칠 때
쓰러지고 짓밟히고 다시 일어설 때
네 투박한 손에 힘을 보았을 때
네 빛 바랜 얼굴에 참삶을 보았을 때
네 야윈 어깨에 꿈을 보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네 울부짖음 속에 내일을 보았을 때
네 노랫속에 빛을 보았을 때
- 파도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바람에 몰려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리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 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들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