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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씨 성(姓)을 말살하는 피바람 |
조선 개국과 동시 고려 왕씨를 말살하는 피바람이 시작 |
조선 개국과 동시에 고려 왕씨(王氏)의 성(姓)을 말살하는 피바람이 시작된다.
1394년 태조 3년 4월 왕씨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관원들을 삼척(三陟), 강화(江華), 거제도(巨濟島)에 보낸다.
동년 2월 27일 사헌부에 명하여 강화도에 있는 왕씨 일족의 거취를 감시토록 명하다.
4월 15일 윤방경(尹邦慶) 등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甲申/尹邦慶等投王氏于江華)
4월 20일 손흥종(孫興宗) 등이 왕씨(王氏)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 (己丑/孫興宗等投王氏于巨濟之海)
같은 날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令中外大索王氏餘孼, 盡誅之)
4월 26일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 (乙未/令前朝賜姓王氏者, 皆從本姓。 凡姓王者, 雖非前朝之裔, 亦從母姓)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그가 찬(撰)한 ‘추강냉화(秋江冷話)’에, ‘고려의 왕씨가 망하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했더니, 모신(謀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 하였다.
그러자 민심이 더욱 악화된다. 이에 ‘1397년 10월 10일 상장군(上將軍) 노조(盧珇)로 특진 보국 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마전군(麻田郡) 귀의군(歸義君)을 습봉(襲封)하고,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면, 盧씨 성을 쓰던 王씨가 다시 王씨로 돌아왔고 성씨는 임금의 재량에 의해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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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6년(1397)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묘(廟)를 세우고, 그후 태조와 7왕(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현종)을 제사지냈다. 숭의전이라 한 것은 문종 2년(1452)부터이며,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 곳을 관리하게 하였다.
1426년 세종 8년 5월 19일 예조에서 도화원(圖畫院)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계하기를, “도화원에 간수된 전조 왕씨(前朝王氏)의 역대 군왕과 비주(妃主)의 영자초도(影子草圖)를 불태우기를 청합니다.”하니, 명하여 정릉(貞陵)의 반영(半影)도 아울러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나 1576년(선조 9) 선조는 풍기(豊基)의 용천사(龍泉寺)에 소장된 왕 태조(王太祖)의 진영(眞影)을 역군을 조발하여 요여(腰輿)에 싣고 마전(麻田)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안치시키되, 경유하는 모든 고을에서는 의장(儀仗)을 갖추도록 명하였다. 또 이안제(移安祭)를 지내게 하였다. 이 또한 민심 이반을 고려한 고도의 정책 결정이 아닌가.
절대 군주제도 아래에서는 ‘성을 갈아 버릴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속칭 “깜”도 안되는 백성들이야 ‘그렇다’고 할 수 밖에 없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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