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北漢山836m)
효자리 효자비 부근에서 바라본 숨은 벽 전경
국립공원 북한산은 삼국시대 때까지 엄마 등(白雲峰)에 업힌 벌거숭이 아이(仁壽峰) 같다 해서 부아악(負兒嶽)이라 불려졌다. 개성에 도읍을 정한 고려 때에 왕도 개성 또는 임진나루에서 이 산을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불꽃같이 보이기도 해서 화악(火嶽)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었다. 불은 인간생활에서 잘 다루면 유용하지마는 잘못다루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때문에 불을 가까이 하더라도 조심해야 하고 논밭갈이 소를 부릴 때는 유용하지마는 소의 뿔을 조심해야한다. 혈압이 높은 사람은 남과 다툴 때 열(熱)받아 부아(負兒)가 치밀면 남을 다치게 하거나 스스로 쓰러진다. 가까이 하더라도 항상 경계의 대상이니 조심해야할 대상을 뿔이라 한다. 뿔 같은 3개의 백운봉(白雲峰 836.5m), 인수봉(仁壽峰 810.5m), 망경봉(望京峰 799.5m)이 솟아올라 보여 삼각산이라 했다.
그러던 것이 조선중기 이후부터 한강 북쪽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있는 산이라 해서 이 산을 북한산이라 불려 지게 됐다. 지금은 북한산이 공식 명칭이지만 아직도 북한산 주변의 음식점 숙박업소등 상호에 이산의 본명인 삼각산이란 이름이 남아있다. 이산 남쪽에는 조선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니 지금의 서울이다. 북한산 남쪽기슭 북악(北岳342m) 아래에 경복궁이 있고 청와대가 있다. 처음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축성하여 조선숙종37년(1711년)에 개축한 14개의 성문을 둔 길이 12km의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이 있고 비봉(碑峰560m)에는 신라진흥왕 순수비 유지(新羅 眞興王 巡狩碑 遺址)가 있다.
북한산 정상 백운봉으로 부터 우이능선을 따라 도봉산정상까지 4시간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 거리고 북한산은 도봉산과 함께 국립공원이 되었다. 수도서울의 진산으로 세계 어느 나라 수도에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산이 없다. 정상에 서면 서울 시가지와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그리고 맑은 날은 북녘의 산들도 조망된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입장객수가 가장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北漢山, 牛耳洞에서 佛光洞까지
헬기장이 있는 무명봉에서 바라본 도봉산
예정보다 늦은 07시30분 우이동이다. 우이동은 시내버스 차고지가 있는 버스종점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쳐다보인다. 여기서 도선사~하루재~북한산 정상 백운대로 오르는 길과, 우이암~도봉산정상 자운봉으로 오르는 길, 우이령으로 오르는 길 등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때문에 등산객들의 등 하로시에 이용하는 먹거리 시설지구가 있다. 우이동에서 북한산정상 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대개 도선사주차장까지 도선사 전용버스가 있으나 신도에 한하므로 등산객은 승요차나 택시로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선사주차장 백운탐방지원센타에서 정상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는 1시간30분이면 오를 수 있지만 나는 굳이 거리도 멀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육모정과 영봉을 거치는 길을 택한 것은 자칭 북한산 종주산행을 하기 위함이다.
일기예보에 오늘 날씨는 맑겠다고 했으나 기온상승으로 봄철 황사현상처럼 연무가 잔뜩 끼었다. 우이령 방향으로 진입한다. 초입부터 대규모 먹거리 시설 공사가 한창이다. 시야도 침침한데 어지러운 공사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공사장 인부가 멀리서 돌아가라고 손짓을 한다. 길이 분명치 않아 내게는 공사장이 장애물로 보였다. 공사장을 통과하니 전에 도봉산에 오르던 우이계곡 한일교 다리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 송전탑이 있는 능선 길로 오르면 도봉산 우이암이다. 나는 우이령 방향 소귓길(牛耳路)로 직진한다. 음식점과 숙박업을 하는 업소들이 이어져있는 길을 따라 선운사까지 왔다.
여러 암자들과 굿당들이 있는 곳을 통과하여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어 북한산과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우이능선에 오르니 육모정 고개다. 여기서 정상에 오르는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지도상에 이름이 표기되지 않은 무명봉에 오른다. 정상에는 군사용 벙커가 있고 옆에 헬기장이다. 벙커위에 올라가보니 조망이 좋아 가까이 도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이령이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가 되는데 북한산자락에서 도봉산을 조망하는데 가장 가까운 곳이다.
영봉에서 바라본 인수봉
영봉(靈峰604m)이다. 산(山)이 살아야 사람이 산(山)다. 병든 자가 의원을 찾아도 못 고치면 마지막으로 산을 찾는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산을 숭상하여 영산(靈山)이다, 영봉(靈峰)이다 했겠다. 이곳에서 삼각산 정상을 향해 제를 지내고 신령한 정기를 받아 누렸으리라. 이 봉우리 자체는 빼어난 경치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삼각산의 3개 봉우리 전경을 가까이서 감상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지금까지 연무현상으로 흐리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맑은 하늘아래 단풍까지 곁들인 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는 북한산을 수차례 오르내리면서 항상 수도 서울에 이런 멋진 산이 있다는 것 신의 축복이거니 했다. 누가 내게 서울에 살고 싶다면 그 첫 번째 이유를든다면 서울에는 북한산과 같은 좋은 산들이 많아서라고 주저 없이 말하겠다. 오늘 이 길을 처음 밟은 나는 영봉에 올라보니 그저 입이 딱 벌어지고 눈길도 발길도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북한산 종주계획을 세우면서 접근성이 좋은 불광동에서 시작하여 우이동으로 하산하지 않고 굳이 우이동에서 시작하여 불광동으로 하산 계획을 세운 것도 오후가 되면 산그늘이 져서 진면목을 볼 수 없기로 아침 해가 뜰 무렵 09시 이전에 영봉에 오르고 16시까지 쪽 두리 봉에 도착하여 황혼에 물든 낙조를 보겠다는 계획을 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시인이 아니어서 시 한수를 남기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삼각산과 목은 선생의 시를 번갈아 감상하면서 시계를 본다. 가야할 길은 먼데 훌쩍 30분이 흘러버렸다.
三角山 (삼각산) 목은 이색 (牧隱 李穡 1328~1396)
三峰削出太初時 (삼봉삭출태초시) 세 봉우리 깍은 듯이 솟은 것 아득한 태고 적 일
仙掌指天天下希(선장지천천하희) 신선의 손바닥 하늘 가리키는 그 모습 천하에 드물리
自小已知眞面目(자소이지진면목) 소년시절부터 이미 이 산의 진면목을 알았거니
人言背後玉環肥(인언배후옥환비) 사람들이 하는 말 등 뒤엔 양귀비 살찐 모습이 라네
인수대피소 부근에서 쳐다본 인수봉
영봉을 내려와 하루재다. 도선사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북적인다. 여기서부터는 많이 다녀본 낮 익은 길이다. 단풍도 좋은 인수대피소에 내려섰다가 다시금 백운대로 오른다. 돌길과 계단길이 이어지는 오르막이다. 인수봉은 아침 해를 받아 더욱 희지만 골짝은 그늘진 숲속이라 아직도 어둑어둑하다. 옛사람들의 시구에는 단풍 붉어 숲속은 어둡지 않다고 했는데 말이다.
가까이서 본 인수봉
백운대피소다. 정상에 오르기 전 마지막 휴식처다. 이곳 대피소 옆에 숨은 벽을 거쳐 효자리 밤 골로 하산하는 길이 인수봉 방향으로 나있다. 그 길을 따라 계획에 없는 인수봉 쪽으로 가까이 접근해 본다. 인수봉은 암벽등반의 메카인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인적이 뜸하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가? 항상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인수봉은 아무나 오르는 봉우리가 아니다. 로프 하나로 목숨을 걸어야하는 체력과 담력 그리고 기술력이 구비된 자로 히말라야 원정대가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 릿지 등반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다시 내려와 백운대로 오른다.
북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문인 위문 앞이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단풍철이라 매우 혼잡할 줄로 알았는데 예상 밖에 한산하다. 위문에서 백운대 정상까지는 불과 200m 밖에 안 되어도 항상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혼잡하여 장사진을 이루는 까닭에 왕복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이 걸리는 수도 있다.
오르면서 보니까 어른을 따라온 어린아이들 중에는 겁을 먹고 우는 아이도 여럿 보았다. 그러나 그 부모는 진짜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체력과 담력 인내심 도전정신 등 학교에서 할 수 없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10시30분 거대한 바위의 성체 백운대정상이다. 우이동에서 육모정~영봉~하루재~인수대피소~백운대피소~위문~백운대까지 7.9km에 정확히 3시간 소요됐다. 예전 같으면 정상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인데 오늘은 여유롭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가까운 도선사에서 오른다 해도 09시 이전에 산행을 시작해야 이 시각에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다. 사방을 한 바뀌 휘돌아본다. 태조 이성계가 배산임수의 터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삼각산을 빼고 한양을 말할 수 없었고 한강을 빼고 한양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삼각산에서 내려다보면 한강수가 보이고 한강수에서 쳐다보면 삼각산이 보인다. 한강은 넓고 삼각산은 희어 한양(漢陽)이다. 때문에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다가 척화신(斥和臣)으로 몰려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가면서 부른 노래, 청음 김상헌 (청陰 金尙憲1570~1652)의 충의가(忠義歌)에도 삼각산과 한강수가 등장한다.
忠義歌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보마 한강수(漢江水)야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何)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하여라.
결국 병자호란은 47일간에 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1636년~1637년)으로 남한산성에 머물던 조선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나루터)에서 청 태종 앞에 나아가 무룹 꿇고 항복례(降伏禮)을 올리는 굴욕을 당했다. 오랑케들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도강하기 좋은 결빙기에 처 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식량을 약탈해 갈 때에 이 땅의 백성들은 줄줄이 상을 당했고 눈밭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보호색인 흰옷을 입었으니 이것이 곧 상복이요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된 원인이다. 또, 수많은 조선의 어 여뿐 처녀들이 청나라로 잡혀갔고, 끌려가던 처녀들이 도망쳐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평안도지방에 머물러 살아 남남북녀(南男北女)와 조혼풍습(早婚風習)의 원인이 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온 처녀들은 본의 아니게 환향년(還鄕姩)이라는 눈총을 받기도 했다.
백운대에서 바라본 인수봉, 멀리 도봉산(왼쪽)과 수락산(오른쪽)
아직도 산 아래는 연무현상으로 서울시가지와 한강은 물론 먼 산은 잘 보이질 않고 가까운 도봉산이 보일 뿐이다. 동쪽으로 보이는 인수봉 뒤 북쪽 숨은 벽에는 한낮이 다되어가도록 그늘이 져 있어도 가까이서 내려다보니 단풍도 곱다. 하얀 바위봉우리 인수봉(仁壽峰810m), 조선후기의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1712~1781)선생은 산수고 (山水考)에서 “신라 때 부아악(負兒岳)이라 하였는데 북한산상봉 백운대 곧 백운봉(白雲峰836.5m)을 중심으로 만경대(萬景臺799.5m)), 인수봉{仁壽峰810.5m)이 붙어있어 마치 벌거벗은 아이(仁壽峰)를 엄마(白雲峰)가 업고 있는 형상이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저 인수봉(仁壽峰)의 이름은 “인자요산 인자장수(仁者樂山 仁者長壽)라 하여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그런 사람은 장수 하느니라” 했다. 그래서 인수봉(仁壽峰)이라 이름 한다 했다. 사실이지 병원에서 못 고치고 포기하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곳이 산이다.
백운대에서바라본 만경대
백운대에서 건너다본 만경대 남쪽으로 건너편 만경대(萬景臺800m)는 오르기도 어렵지마는 층층이 얹혀있는 바위들이 언제보아도 불안하게 기우뚱하여 곧장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추락사고 다발 지역이라 출입통제구역으로 위문 앞에 초소까지 세우고 단속반원들이 지키고 있다. 만경대 서쪽에 노적봉(露積峰716m)도 추락사고 다발지역으로 출입통제구역이다. 노적봉은 수년전 나도 앞서 두 사람이 올라가기에 안전시설도 없는 금지구역에 겁도 없이 힘들여 뒤따라 올라갔다. 문제는 내려올 때였다. 무릇 지혜로운 사람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를 먼저 생각한다는데 미련하게도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쉬운 줄 알았겠다. 바위절벽에 매달려 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렵게 내려오긴 했어도 그때 진퇴양난에 직면하여 위험천만하게도 좋은 경치감상하려다가 천국구경 할 뻔 했다. 이렇게 북한산은 아름다운 산이면서도 그만큼 안전사고도 잦다. 그래서 항상 내가 긴장하는 산이 바로 이산이다.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면 출입을 아니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남의 고생을 시키지 않아서도 좋다.
백운대의 서쪽 절벽 풍경
노적봉의 풍경
백운대를 내려와 위문을 통과하여 노적봉으로 향한다. 계단을 내려서 만경대 서쪽 바위사면 길이다. 길을 가다가 방금 올랐던 백운대를 쳐다본다. 위문에서 쳐다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거대한 통 바위절벽에 수놓은 단풍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시간가는 줄 모른다. 위문애서 백운대정상까지 200m 거리를 왕복하는데 무려 30분 이상 소비했는데 이러다가는 넉넉히 잡았던 산행계획이 늦어질 것만 같다. 진행방향 노적봉을 바라본다. 산 아래서 쳐다보면 마치 노적가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노적봉은 출입금지구역인데도 꼭대기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한두 사람 올라가 있는 것이 보인다.
노적봉에서 용암문으로 가는 길 단풍
노적봉 쉼터를 지나 단풍 좋은 숲길을 따라 용암문에 이르니 도선사에서 올라와 휴식을 취하는 사람과 내려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은 주능선길고 동쪽으로 도선사방향, 서쪽으로 북한산대피소, 대서문, 산성입구로 통하는 네거리 갈림길이다. 여기서부터 내게는 익숙한 산성 길을 따라 시단봉 동장대로 향 한다. 이름 없는 봉우리다. 여기는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용암봉 그리고 멀리 도봉산이 한눈에 드는 곳이다. 눈을 들어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며 감상을 하고 있는데 구조 헬기가 뜬다. 저기 노적봉동쪽에 헬기가 대기하고 연막탄이 피어오른다. 필시 사고가 났구나했다. 헬기는 구조에 실패한 듯 노적봉을 한 바뀌 돌아 다시 그 위치에서 구조해갔다. 나도 산에 다니는 사람인데 남의일 같지 않아 구조장면을 끝까지 지켜봤다. 뒤 따라오던 한 사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추락사고가나 다리가 부러진 듯 구조대원이 응급처치를 하고 있더란다. 산악사고는 직업운전자도 교통사고를 내듯 산행경험이 많다고 장담을 못한다. 늘 초보처럼 자만하지 말고 조심을 해야 한다.
시단봉 동장대
문수봉 오름길에 건너다본 보현봉의 단풍
12시30분 시단봉(柴丹峰610m) 동장대(東將臺)이다. 군 지휘부가 위치하였던 서장대, 북장대와 더불어 북한산성 3대장대의 하나로 북한산성 전역이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장대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장대다. 대동문을 지나서 칼바위능선 시작지점에 올라섰다. 이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면 수유동과 정릉동으로 하산할 수가 있다. 내려서 보국문, 대성문을 지나 대남문이다. 대남문에서 보면 남쪽 형제봉능선으로 청와대 뒤산 북악산 (北岳山342m)으로 이어지는 최고봉 보현봉 (普賢峰714m)이 바로 앞에 보인다. 일기예보에 오늘은 날씨가 맑다고 했는데 한낮인데도 구름이 잔뜩 몰려와 시야가 흐리다. 아직 갈 길은 먼데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으나 사진을 담아내는 데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문수봉을 향해 오르막길을 오른다.
문수봉 풍경
문수봉(文殊峰727m)이다. 한마디로 멋진 봉우리다. 문수봉은 안개가 자욱한 여름날 내가 처음 북한산 단독산행을 왔을 적에 산성입구에서 의상능선을 따라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부왕암문, 나월봉, 나한봉을 거쳐 문수봉에 오르고 여기서 백운봉, 하루재, 도선사, 우이동까지 산행을 한 기억이 있다. 그때는 짙은 안개로 길만 보고 걸었고 산행 중 사람을 만나지 못해 물어 볼 데도 없었다. 문수봉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오늘 문수봉을 보게 되니 이렇게 멋진 봉우리인줄을 비로소 알겠다. 한마디로 멋진 봉우리다. 날씨가 흐리긴 하지만 북악과 남산이 보이고 하산할 비봉능선에 멋진 봉우리들이 보석처럼 맺혀있는 풍경을 한눈에 굽어본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아쉽다.
문수봉에서 내려다 본 비봉능선
문수봉에서 의상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부왕동 암문(扶旺洞暗門) 갈림길이 나온다. 북쪽방향 북한산성계곡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6,25때 관리소홀로 붕괴된 부왕사지가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선생은 이런 시를 남겼다.
扶旺寺(부왕사)
看山何處好 (간산하처호) 산구경은 어디가 좋은 고 하니
扶旺古禪林 (부왕고선림) 부왕이라 옛날의 선림이 라네
日落峰如染 (일락봉여염) 해지니 봉우리는 물든 것 같고
楓明洞不陰 (풍명동불음) 단풍 밝아 골짝은 어둡지 않네
鍾漁來遠近 (종어래원근) 풍경소리는 원근에서 들려오는데
禽鳥共幽深 (금조공유심) 온갖 새들 유심을 함께 즐기네
慙覺頭頭妙 (참각두두묘) 머리 머리 절묘함을 차츰 깨치니
靈區愜道心 (영구협도심) 영구는 곧 도심과 서로 맞는 구나
청수동암문에서 내려서 본 문수봉아래 의 단풍
사모바위 모습
지금시각 14시10분 이곳 문수봉에서 초행길인 비봉능선을 따라 불광역까지는 5.5km 거리에 2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이는데 마음은 바쁘나 몸이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지름길을 두고 문수봉을 반 바뀌 돌아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으로 향한다. 암문을 통과하니 단풍 좋은 숲이다. 추사선생은 단풍 밝아 골짝은 어둡지않다고 했지만 숲속에 드니 어둑어둑하다. 30분쯤 내려가니 승가봉이 있어 바위굴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름하여 통천문(通天門)이라 칭한다. 여기서 사모바위가 멋지게 보인다. 조금가면 사모바위다.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올라가있다. 가까이서보니 정말 멋진데 날씨가 맑았으면 정말 좋았겠다. 바위아래 헬기장에서 바라보는 비봉이 참으로 멋지다. 거기에도 사람이 올라가 있는데 빨리 가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는데 그러나 사모바위 아래 커다란 넓쩍 바위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바위다. 이 바위동굴에서 1968년 1월21일 김신조 (金新朝) 일당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은신하며 무장점검을 했던 장소가 있다. 아무리 바빠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배낭을 짊어진 채로 동굴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고 컴컴하여 31명이 은신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때 청와대 담장 옆 세검정 자하문부근에서 검문을 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감이 순직했고, 일당 31명중 생포된 김신조(金新朝) 외 전원이 사살되었다.
비봉 북쪽에서 바라본 비봉풍경
마침내 내가 꼭 한번 오르고 싶었던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던 그 유명한 비봉(碑峰560m)이다. 균형 잡힌 돌탑처럼 반듯하게 생긴 멋진 봉우리다. 정상에는 신라 진흥왕순수비 유지 (新羅 眞興王巡狩碑 遺址)가 있다. 진흥왕이 신라의 강역을 설정하면서 세웠으나 비문이 마모되어 읽어내기 힘들었던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선생이 신라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했다 한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할 적에 무학대사를 시켜 도읍지를 찾아 살펴보도록 했다. 그때 무학대사는 삼각산 정상 백운대로부터 산맥을 따라 비봉에 왔다.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곧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른다!” 는 도선국사가 쓴 비문을 보고 다시 백운대로부터 정남으로 산줄기를 따라 북악에 이르러 지형을 살펴 도읍을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 (太祖 李成桂 1335년~1408년) 의 시 한편을 감상해보자.
漢陽 조선 태조 이성계1392~1398년 재위
突兀高峰接斗魁 (도올고봉접두괴) 우뚝 솟은 봉우리 북극성에 맞닿았고
漢陽形勝白天開 (한양형승백천개) 한양의 빼어난 경치는 천지개벽부터 있었네
山盤大野擎三角 (삼반대야경삼각) 뭇 산이 에두른 큰 들은 삼각산을 받들고
海曳長江出五臺 (해예장강출오대) 바다로 뻗어간 긴 강은 오대산에서 발원 한다네
비봉능선 남쪽에서 바라본 비봉
지금 시각은 15시30분 이곳 비봉에서 불광역까지는 약 3,5km 거리에 암릉 길이라 1시간30분 이상은 걸린다. 해지기전에 하산을 완료 해야겠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당장 비가 쏟아 질것만 같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올라가본다. 예상보다 까다롭다. 안전시설이 안 되어있어 매우 위험하다. 자칫 바위절벽에 추락하면 병원에 실려 갈 시간도 없겠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이 올라가있다. 남이 올라간다고 아무나 따라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런 꼭대기에 어떻게 비석을 세웠는지 궁금하다.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빗돌을 들어 올리고 오르내렸나?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선생은 노산문선(鷺山文選) “北漢山巡狩碑” 편에 기록하기를 서두에 “위험한 바윗길로 기듯이 오르는 길이라, 빈 몸으로 오르기도 이같이 어려운데, 여기 이 봉정에다 비석을 세우다니” 라고 하고는 어떤 이가 마모된 비문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는 것을 보고는 “눈뜬 소경의 점자판이 되었구나” 라고 썼다. 비봉에서 내려와 관봉을 지나고 향로봉(香爐峰535m) 직전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돌아서 가는데 그만 예보에 없었던 비가 그만 후 두둑 쏟아진다. 이제2.5km에 1시간 남짓 더 가면 되겠는데 마지막이 힘들게 생겼다. 길게 올 비는 아니나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는 걸로 봐서 당장 우의를 입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그렇지만 기온이 올라가면 대기가 흐려지고 비가 올 확률이 많더라. 더운 날씨에 우의까지 입고 나니 더 덥고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족두리봉의 풍경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쪽두리 봉(367m)이다. 예정보다 1시간이나 늦은 17시10분이다. 날씨가 좋을 걸로 예상하고 당초 16시까지 이곳에 도착하여 낙조를 보기로 했었다. 이미 해는 지고 비구름이 몰려와 낙조를 기대할 수 없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남쪽으로 서울은평구 일대가 흐릿하지만 분지형태로 시야에 들어온다. 한강도 가까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남산과 북악산이 보이고 시청부근 어느 건물의 전광판 불빛도 보인다. 날씨만 좋았다면 아름다운 저녁노을도 감상 할 수 있었으리다. 하나님이 내게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 한 번 이곳에 오고 싶다.
불광동(佛光洞)이란 지명이 그러하듯 불교적인 느낌이 강하나 알고 보면 불빛을 의미한다. 서울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동네, 아침 해 뜰 무렵이나 저녁 해질 무렵에 붉게 물든 불광동 일대의 노을을 감상한다는 것,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아쉬움을 뒤로한 체 내려와 갈림길 쉼터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곳은 마지막 갈림길, 직진하면 불광역, 서쪽은 연신내, 동쪽은 구기동 방향이다. 늦은 시각이라 등산객이 뜸하다. 여기서 불광역까지는 1.5km에 30분이면 갈수 있어 헤드 렌턴까지 준비된 상태라 남은 길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인근주민으로 보이는 등산객 한사람이 내려온다. 한적한 산길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 연인을 만난 것 같이 반갑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보니 같은 방향이다. 안내자를 만났으니 내게는 큰 도움이다. 가파른 바위 능선길이다. 발자국 표시가 나지 않아 낯선 바위 길은 헛 걸음 하는 수가 많다. 어둑어둑한 바윗길을 한 발짝도 헛걸음 없이 정확히 내 딛는 그의 뒤를 따라 내려오니 불광동 대호아파트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나서 이제 비가 그쳤으니 우의도 벗고 배낭도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17시50분 북한산종주 우이동에서 불광동까지 오늘 최종 목적지 불광역이다.
2012년 10월20일 토요일 맑은 후 흐림
첫댓글 아름답고 雄壯한 北漢山 山行記 잘 感想했습니다.
저는 北漢山을 5차례 登山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最近은 6년전 숨은 벽 稜線이 自然休息年制에서
풀리자 登山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인수봉을 배경으로 백운대에서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가 저입니다.
아 ~ 옛날이여!! I NV U, 산이좋아님!! 漢詩^^*
감사합니다. 6년전까지 수 차례 북한산 산행을 하셨다니 오래되셨군요.
지금까지 그때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신걸 보니 감회가 깊겠습니다.
추억사진 감상 잘 했습니다. 道光 선생님 거듭감사 드립니다.
北漢山 山行記 잘 읽고 풍광도 잘 봤습니다. 올라본지 10여년 지난거 같습니다.
이젠 못올라 가니 더욱 그립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북한산에 오르신지 무척오래 되셨군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건강을 회복하시어 재 도전 하시기를 바랍니다.
백번도 더 다녀왔던 북한산 이지만 자세한 설명과 사진으로 다시보니 새롭네요 즐겁게 감상 합니다.
저는 아직 100회를 넘긴 산이 오른산 전체에서도 몇 안됩니다.
북한산은 이제 겨우 10회를 넘겼는데 100회나 오르셨다니요! 존경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산이 좋긴 좋군요 ^^*
巨村선생님 ! 보실 만 하셨는지요? 날씨만 좋았더면 더 좋았을 텐데요.
쪽두리봉에서 불빛 마을 佛光洞의 저녁노을를 보여드리지 못해서요.
등산이 일반화 되기 이전이군요.요즘은 등산이 생활의 일부여서 등산객 차림의 사람들을 흔히 보게됩니다.
서툰 글이지만 가급적 산행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써 봤습니다. 등산도 체력이 되지않으면 더 힘들어집니다.
체력이 이 만큼이라도 남아 있을 적에 열심히 다녀야겠는데......무언가 도움이 되셨다니 오히려 감사를 드릴 따름 입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지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