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아굴라와 브리스가 원문보기 글쓴이: 아굴라
추사 김정희(金貞喜)의 세한도(歲寒圖)와 장무상망(長毋相忘)
국보 180호 <歲寒圖(세한도) /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34세 문과 급제 후 탄탄대로 중에 억울한 탄핵으로 제주도에서 9년 ‘유배’중에 그린 것으로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짐. 이상적이 중국 연경에서 명사들에게 받은 제문과 발문을 이어붙여 전체길이는 10m가 넘는다. 소나무 한 그루, 잣나무 세 그루. 집 한 채. 배경도 없고, 화려한 색채도 없는... 황량한 데다 한기마저 느껴지는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린 <세한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를 두고, 옛 그림 연구에 업적을 남긴 동주 이용희 선생은 “일견 퍽 싱거운 그림”이라고 말했습니다. 소나무가 있고, 엉성하게 보이는 집이 한 채 있을 뿐 아마추어가 보면 왜 좋은 그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추사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본격 비평서인 ‘완당평전’에서 유홍준 교수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0점짜리”라고 평했습니다.
그럼에도 ‘세한도’를 추사 예술의 극치로 꼽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니라 사의(寫意), 즉 뜻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구도와 묘사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림과 글씨, 글의 내용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가치가 있다는 설명입니다. ‘세한도’를 보면, 그림과 발문(跋文)이 각각 담긴 두 장의 종이를 이어붙이고 경계 부분의 아래쪽에는 ‘阮堂(완당)’이라고 새겨진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두 장으로 되어 있지만 하나의 그림이라는 뜻이겠지요. 실제로 세상의 시비에 여간해서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엄정한 필치의 발문이 없다면 ‘세한도’는 다소 심심한 그림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 108.3㎝짜리 ‘세한도’를 제대로 전시하기 위해서는 10m가 훨씬 넘는 쇼케이스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세한도’ 두루마리에는 이 그림을 감상한 인물 20명이 직접 쓴 감회가 줄줄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2006년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에서도 두루마리를 모두 펼쳐놓을 수 없었다고 하니 두루마리까지 풀버전으로 본 일반인은 아마 국내에서 손에 꼽을 듯 합니다.
김정희 선생은 왜 이리도 쓸쓸한 그림을 그린 걸까요?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를 맞은 1844년 제자인 우선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것입니다. 중인 출신 역관인 이상적은 추사가 낙마하여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된 상황에서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아 스승을 감격케 했습니다. "
조선 최고의 명필로 이름이 알려진 추사 김정희 선생. 사실 김정희 선생은 붓글씨뿐 아니라 문장력까지 뛰어난 천재 중의 천재였습니다. 효명세자의 스승으로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청산하고 위태로운 조선 후기 사회를 바로 세우려했던 개혁가이기도 했죠. 당시 청나라엔 '금석학'이라는 학문이 유행했는데 금석학이란, 금석(비석)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하는 학문으로, 청나라 대표학자 '옹방강'과 교류하며 금석학을 익힌 김정희는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의 정체를 밝혀내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청나라에서는 진흥왕 순수비를 밝혀낸 '김정희'에 대해 열광하기 시작하고 청나라 연경의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교류하기를 희망했고, 김정희가 쓴 글을 기다리기도 했다 합니다. 김정희는 당대 최고의 천재 학자에다 조선을 대표하는 한류스타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1840년, 영원할 것만 같던 김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맙니다. 김정희를 믿고 지지해주던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안동 김씨 세력은 김정희에게 대역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사실, 안동 김씨 가문은 그 전부터 추사 김정희 선생을 견제하고 있었습니다.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대역죄인으로 몰린 추사 김정희 선생, 끝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 김정희에게 제주도에서의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김정희는 유배형 중 가장 무거운 형인 위리안치형(*위리안치 : 죄인의 집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 출입을 제한시키는 것)에 처해집니다. 국내를 넘어 해외를 넘나들었던 그에게 그 공간은 너무나 좁고 답답했을 겁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풍토병에 시달렸고, 음식과 의복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배생활을 하던 중 김정희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김정희 곁을 떠납니다. 절친한 친구 김유근 그리고 부인 예안 이씨가 유배생활 중 세상을 떠난 데다 서울의 친구들 또한 점차 소식이 끊어집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김정희.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한줄기 빛이 있었습니다. 바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자 이상적입니다.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 서적들을 구해다 추사에게 보내주고 청나라의 최신학문과 동향을 전해줍니다. 권력에 의해 땅 끝까지 내쳐진 스승을 끝까지 믿고 따라주는 제자라니.... 어지간한 정성으로는 어려운 일일뿐 아니라 대역 죄인으로 몰려 귀양 간, 그야말로 끈 떨어진 갓 신세인 사람에게 지극정성으로 책을 보내는 일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력자에게 바치면 출세를 보장받을 수도 있는 귀한 책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깊은 감명을 받은 추사는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붓을 듭니다. 바로 이 <세한도>를 그리기 위해서죠. 1년 중 가장 추운 날. 세한. 추사는 가장 추운 날을 그려 그 고마움을 전한 겁니다. 조그만 집 하나와 앙상한 고목, 집에 비스듬히 기댄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몇 그루를 담은 세한도를 그려 이상적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長毋相忘(장무상망,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인장도 찍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쓸쓸하고 썰렁한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의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논어에서 인용된 구절은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청나라 학자들도 극찬한 '세한도'에 담긴 뒷이야기입니다.
세한도 오른쪽 밑에 찍힌 도장, 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말자.” 이상적은 김정희로부터 ‘세한도’를 전달받은 해에 동지사 이정응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습니다. 그는 이듬해 정월 중국인 친구 오찬(吳贊)이 베푼 재회축하연에서 청나라 명사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16명으로부터 제문(題文)과 발문을 받습니다. 이상적은 장목(張穆)의 제문을 표지삼아 그림과 제발을 한 축의 두루마리로 표구한 뒤 가져왔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추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두루마리는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이 물려받아 끄트머리에 감상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후 ‘세한도’는 민영휘의 집안이 소유했다가 일본인 추사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오(藤塚隣)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이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1944년 거금을 싸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3개월 동안 아침저녁으로 병석에 누운 후지쓰카를 문안한 끝에 받아들고 돌아왔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훗날 국회의원에 출마한 손재형은 ‘세한도’를 저당잡히고 선거자금을 끌어다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낙선하여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림은 미술품수집가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손창근 선생(90세)은 2010년도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하고 있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와 「불이선란도」 등 다수의 국보급 서화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손재형은 1949년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과 대한민국 초대부통령 이시영,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글을 받아 두루마리에 이어붙였습니다. 손재형은 오세창 등의 발문을 이어붙인 뒤에도 ‘세한도’ 두루마리에 90㎝ 정도의 공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누군가 그림을 품평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을 만나면 발문을 받겠다는 생각이었겠지요.
하지만 발문을 이어붙이는 전통은 끊어지고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세한도’는 1447년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이어 두번째 많은 제문과 발문이 붙은 조선시대 그림이 되었습니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발문을 비롯하여 22명의 글 23편이 두루마리 두 축에 표구되어 있습니다.
그림에 감상문을 붙여 후세에 물려주는 풍습은 서양의 캔버스 미술문화에서는 불가능한 두루마리 그림문화만의 특징입니다.‘세한도’처럼 그림 자체의 품격도 품격이지만 발문을 쓴 사람이 누구이고, 그 문장의 수준이 어떠한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 그림이 갖고 있는 묘미의 하나일 것입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말. 추운 날이 되고 나서야 느낀 따뜻한 정.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림이 달라보이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이 그림은 추운 그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그림일지도 모릅니다. [ 추사의 삶] 1786년 추사는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김노경. 추사는 24세에 생원시,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형조 참판. 충청도 암행어사를 지내는 등 날로 지위가 높아졌고 임금의 총애도 받았다. 마침내 1840년(헌종6년) 6월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청나라행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탄핵을 당하고 이어 모진 국문을 받게 된다.
탄핵을 주도한 것은 안동 김씨이지만 그 선봉장은 김우영으로 비인(지금 서천군) 현감시절 암행어사로 내려간 추사에게 적발되어 파직된 악연이 있는 인물. 그러니까 개인적 원한이 많을 것이다. 김우영은 먼저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을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고 이어 자신을 파직시킨 추사를 공격한 것. 이렇게 하여 불행히도 죽음 직전까지 간 추사는 조인영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 제주도 대정읍에서 9년의 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억울하고 분노가 치미는 가운데 추사는 제주도 유배기간 만세에 빛낼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여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세계적 찬사를 받았고 지금도 글씨의 1인자로 존경받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유배지 제주도에까지 찾아와 중국에서 새 서적들을 구입해 전해주고 하던 제자 이상적에게 써준 '세한도(歲寒圖)’는 국보180호로 지정돼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차가운 겨울 바닷바람에 떨고 서있는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의 초라한 집, 긴 설명이 없어도 그림 앞에 서있으면 추사의 그 고독함 그리고 그 삶의 회한(悔恨)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조선 후기사회를 변화시킨 북학(北學)사상을 정리했으며 그런 가운데 9년의 유배가 풀렸으나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야했고 1856년, 71세에 파란 많은 삶을 마감했다.
세한(歲寒),장무상망(長母相忘)을 바랐던 외로운 선비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시대 후기 최고의 천재로,그의 학문적 열정은 선현들이 이뤄놓은 연구를 바탕으 로 동아시아권을 포괄하는 청출어람(靑出於藍)’ 의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의 삶은 부귀영화에서 유배상활에 이르는,빛과 어둠을 넘나드는 한 평생이었다. 당대 최고 세도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씨이자,영조의 부마가문의 자손으로서, 가문의 배경과출중한 실력은 정치적인 삶에서 빛의 중심에 서게 했고,또한고통어린 질곡의 삶으로도 보내졌다. 김정희는 전라도 고금도,제주도,북청 등 세 차례 유배 길에 올랐는데,제주도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시련이 되었던 곳이 었다. 1840년,한달 여에 걸쳐 도착한 제주섬 남쪽 끝 대정현으로 유배된 김정희는 9년간 귀양살이를 했는데,그는 가장 가혹 하다는 유배 형벌인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했다. 위리안치는 죄인이 유배 장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유배처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것으로,추사는 고도(孤島) 속의 외로움을 이 가시 울타리 속에서 보냈다.
제주의 삶은 몸과 마음의 고통에 둘러싸였고 죄인 추사의 삶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제주의 삶은 세상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 를마련해 주었고,여기에서 바로 마음을 예술로 승화시킨 걸작을 남기게 된다. 귀양간 스승은 제자가 보여준 변치 않는 의리와 절개에 감사하며,그림과 글로써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이것이 1844년(헌 종10년)에 완성된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歲寒圖)’ 글씨 옆에는 ‘우선시상(藕船是賞)’,즉 “우선(藕船)(이상적) 감상 하시게” 라고 예서로 쓰여 있다. 추사의 제자의 이상적(李尙迪,1803〜1856)은 외로운 처지의 스승이 꾸준히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중국의 귀한 서책들을 유배 기간 동안 스승에게 보냄으로써 자신만의 스승에 대한 한결같은 존경과 사랑을 이어갔다. 이상적은 스승의 영향으로 서화,금석,골동에 대한 조예가 높았다. 역관(譯官)이었던 그는 시문의 대가이기도 했는데,중국의 당대 지성들과의 교유로 이름이 높았고,스승의 학문적 건재함을 청나라의 지식인에게 알려줌으로써 학문의 교량 역할을 계속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외로움 속에서 책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스승을 위해 자신의 방식으로 한결같이 스승을 섬겼다. 구부러진 가지의 소나무 한 그루와 앙상한 잣나무 세 그루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집,먹물기가 별로 없는 까실까실한 붓으 로 쓱쓱 그려나간 이 그림은 여백 속에 간결하게 존재하여 마치 한겨울의 눈 덮인 공간을 연상하게 된다. 추사는 글 속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신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소나무 잣나무는 계절이 변해도 여전한데,성인께서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까닭은,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그 전에라도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도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나무의 굳센 정절뿐 아니라,추운 계절 세한(歲寒)’ 이라는 “그 시절”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림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는 뜻을 담은 ‘장무상망(長母相忘)’ 이라 새긴 인장이 소나무 같은 제자를 위해 찍혀 있다 스승의 마음을 읽은 이상적은 ‘삼가 세한도 한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흐르는 것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너무나 분수 에 넘치는 칭찬이어서 감격이 절절하였습니다.’ 라는 감사 편지와 함께 중국 연행길에 연경의 자신의 친우들에게 세한도를 보여줌으로써,세한도를 세상의 보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에 대한 서글픔을 그대로 내보임으로써 추사는 그의 가슴 아픈 현실을 발문 말미에 이렇게 썼다.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어질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적공(翟 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추사가 세 번의 고된 유배를 겪으며 변한 것은 그의 마음뿐이 아니 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이성과 학문으로 무장된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의 젊은 시절 빛의 중심에서 패기에 넘친 자신감을 상징하던 그의 글씨는 점점 돌의 거친 표면과 닮은 강하고 날카로운 필치를 강조하고,살이 빠진,멋을 기교가 제거된 모습으로 변했다. 이때부터 그의 글씨를 추사체’ 라고 부른다. 이 시절 추사는 과거 빛 속에서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제자를 키웠듯이,제주 대정에서 제주의 인재들을 키웠다. 그리고 세월 그 대로,이제는 노년의 원숙함은 세상의 진리는 평범한 삶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을 상징하듯,그의 글씨는 평범함과 단순함으로 귀결되어 순(純)하고 진(眞)한 원(圓)’ 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세한송백 장무상망(歲寒松柏 長毋相忘)
"우선(藕船), 고맙네!. 내 결코 잊지 않음세!. 우리 서로 오래도록 잊지마세!."
이 인장에 쓰인 장무상망(長毋相忘)은 한나라 때 동경(銅鏡)에 보이는 장무상망 장상사 무상망(長相思 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잊지 않다) 불구상견 장무상망(久不相見 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보지 않아도 길이 잊지 않다) 견일지광 장무상망(見日之光 長毋相忘, 떠오르는 햇빛처럼 길이 서로 잊지 않다. 등의 글귀와 감천궁(甘泉宮)에서 출토된 장무상망이 새겨진 기와에서 빌어온 것으로 인장의 형태를 네모나게 하고 자법(字法)을 반듯하게 바꾼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毋(무)자는 ‘없다’ ‘말다’라는 뜻으로 無자와 통하는 글자입니다. 이 인장은 추사는 물론이며 추사의 스승인 담계 옹방강(覃谿 翁方綱, 1733-1818)과 추사와 동갑내기인 아들 성원 옹수곤(星原 翁樹崑, 1786-1815)에게도 같은 글귀의 인장이 있습니다. 또 추사의 평생지기인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1859)과 추사 학예파의 형당 유재소(蘅堂 劉在韶, 1829-1911),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 1831-1879) 등도 이 글귀의 인장을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헌종이 소장한 인장을 모은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에도 비슷한 인장이 많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이상적이 청나라 문인들이 세한도(歲寒圖에 남긴 글을 낱장으로 베껴 놓은 둘째 장과 셋째 장 그리고 송나라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의 사(詞) 축영대근(祝英臺近)을 낱장으로 쓴 둘째 장과 셋째 장을 잇는 부분에도 같은 인장을 찍었습니다. 세한도속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장무상망(長毋相忘)의 붉은 색 네 글자는 스승에 대한 제자의 도리는 무엇이며 또 세속 권력이나 이익과는 무관하게 몸과 마음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듯한 인장입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은 이처럼 스승 추사 김정희와 우선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와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장입니다.
[출처] 추사 김정희(金貞喜)의 세한도(歲寒圖)와 장무상망(長毋相忘)|작성자 뫼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