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辰斯王 *
백제 진사왕
[諱辰斯 枕流王弟] 在位七年
[휘는 진사, 침류왕의 동생] 재위 7년.
○丙戌 元年[羅三十年 麗二年]
병술 (AD386년) 원년 [신라 30년, 고구려 2년]
二月 王令國中 徵男女十五歲以上 大設關防 自靑木嶺北距八坤城 西至大海 而衛戍
2월, 왕은 나라안에 令(령)을 내려 15살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關防(관방)을 크게 설치하였다. 靑木嶺(청목령)에서부터 북쪽의 八坤城(팔곤성)까지인데 서쪽으로 大海(대해)에 이르렀고, 戍(수)를 방어하였다.
八月 麗王發兵攻濟 王遣鮮于老 說麗王曰 "兩國之民罷於兵革 四境蕭然 未可以武決雄 願結和親 欲以慰天下之心 大王策安決在乎" 麗王默然良久 遂許和親 而返旆[見東史]
8월, 고구려왕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은 鮮于老(선우로)를 보내 고구려왕을 설득하며 말하길, "양국의 백성들은 전쟁으로 고달프고, 사방의 국경은 조용하니, 武(무)로서 決雄(결웅)할 수 없습니다. 和親(화친)을 맺기를 원합니다. 천하의 민심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大王(대왕)의 계책이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달려 있잖습니까?" 라고 하였다. 고구려왕은 아주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마침내 화친을 허락하고 旆(깃발)을 되돌렸다. [견동사]
○丁亥 二年[羅三十一年 麗三年]
정해 (AD387년) 2년 [신라 31년, 고구려 3년]
九月 王拜眞嘉謨爲達率 以韓豆知爲恩率 使伐靺鞨戰於關嶺 久圍不決 王乃使使持節引兵 而還 [見濟史]
9월, 왕은 眞嘉謨(진가모)를 拜(배)하여 達率(달솔)로 삼았고, 韓豆知(한두지)를 恩率(은솔)로 삼았다. 말갈을 치게 하여, 關嶺(관령)에서 싸웠다. 오래동안 포위를 했으나 승패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왕은 이내 使持節(사지절)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돌아오게 하였다. [견제사]
○庚寅 五年[羅三十四年 麗六年]
경인 (AD390년) 5년 [신라 34년, 고구려 6년]
八月 王 以眞嘉謨爲車騎都尉 將兵數千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男女二百人而還 王大說 拜嘉謨爲兵官佐平[見濟史]
8월, 왕은 眞嘉謨(진가모)를 車騎都尉(거기도위)로 삼았다. 병사 수천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서, 都坤城(도곤성)을 함락시켰고, 남녀 2백명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嘉謨(가모)를 拜(배)하여 兵官佐平(병관좌평)으로 삼았다.
○辛卯 六年[羅三十五年 麗七年]
신묘 (AD391년) 6년 [신라 35년, 고구려 7년]
正月 王修宮室 鑿池造佳山 多種名花 養奇禽華獸 以悉耳目之所好 窮心志之所樂矣
1월, 왕은 宮室(궁실)을 수리하였다. 연못을 파고, 佳山(가산)을 만들고, 이름있는 꽃들을 많이 심고, 기이한 새들과 화려한 짐승들을 길렀다. 눈과 귀가 좋아하는 것을 갖추고, 마음이 즐거운 것을 추구하였다.
四月 靺鞨襲擊濟北鄙 掠石峴城[見濟史]
4월, 靺鞨(말갈)은 백제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石峴城(석현성)을 빼앗았다. [견제사]
○壬辰 七年[羅三十六年 麗八年]
임진 (392년) 7년 [신라 36년, 고구려 8년]
正月 麗王遣使於新羅 修聘禮 羅王遣太子謝於麗 而爲質
1월, 고구려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수빙례를 하였다. 신라왕은 태자를 보내 고구려에 사죄를 하고 볼모로 삼게 하였다.
二月 麗王 令國中 崇拜佛像 而救命福 又命有司 創立國社[祭名] 修宗廟
2월, 고구려왕은 나라안에 명하여, 불상을 숭배하게 하고 명복을 빌었고, 또한 有司(유사)에게 명하여, 국사[祭名]를 만들어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였다.
三月 麗王薨 太子卽位 是爲淡德王
3월, 고구려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다. 이는 담덕왕이다.
七月 麗王親帥精兵伐濟 王以兵拒之 三戰三北 自知智窮兵敗 遂堅壁不出 於是麗軍乘勝長驅 所向無敵 攻取石峴等十餘城 漢水以北皆投降矣
7월, 고구려왕은 친히 精兵(정병)을 이끌고 백제를 쳤다. 진사왕은 병사로 이를 막았으나, 3전 3패하였다. 스스로 지혜가 부족하여 병사가 패배했음을 알고, 마침내 성벽을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 군사들은 乘勝長驅(승승장구)하여 향하는 곳에 적이 없어서, 石峴城(석현성)등 10여성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漢水(한수) 이북이 모두 投降(투항)하였다.
九月 王田於狗原 經旬不返而崩於行宮 諸臣會議迎阿莘卽位 是乃枕流王之子 初阿莘生於漢城別宮 瑞氣昇天 人皆異之 及長 志氣雄俊大有智略矣
9월, 왕은 狗原(구원)에서 사냥을 하였으나,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行宮(행궁)에서 죽었다. 여러 신하들이 會議(회의)하여 阿莘(아신)을 영접하여 卽位(즉위)시켰다. 이는 곧 枕流王(침류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阿莘(아신)은 漢城別宮(한성별궁)에서 태어났는데,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로 올라가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志氣(지기)가 웅대하고 준수하였고 智略(지략)이 있었다.
冬 十月 倭賊襲圍金城 羅王謂群臣曰 今倭賊捨丹深入 溢慾樂死其鋒不可輕 乃堅壁固守 使高信將兵數千 絶其歸路 終不出戰矣 及倭軍不得戰 數月乃引歸 使勇將千餘人 追至禿山[在慶州東] 兩軍相爲表裏挾擊大破倭賊 殺獲甚衆矣
겨울 10월, 왜적이 금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다.신라왕은 군신들에게 말하길, "지금 왜적의 예단이 깊이 들어와 있고, 오만함은 사람을 죽이기를 즐기려 할터이니 그 예봉을 꺾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성벽을 튼튼히하고 지키게 하였다. 高信(고신)으로 하여금 장병 수천명으로 왜군의 귀로를 끊게 하고는, 끝내 나가 싸우지 않았다. 마침내 왜군은 싸우지 못하고 수개월만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용맹한 장수 수천명으로 禿山(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 군사가 서로 입장이 바뀌게 되었고, 협공하여 왜구를 크게 이겼다. 무리들을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
冬 麗王北伐契[九骨反]丹[契丹渤海史音 乞安高句麗史音屈斷] 俘虜男女五百人 及東燕亡民萬餘人而歸 使處鎭撫焉
겨울, 고구려왕은 거란을 쳐서,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고, 또한 東燕(동연)의 망민들 만여명이 고구려에 귀부하였다. 처소를 마련해 주고 진휼하였다.
十一月 麗王引兵攻濟關彌城 麗將金錫言於王曰 關彌四面陗絶海水環繞 且兵强民勇未可易破 不如還軍 王不聽 乃分三道出軍 大戰二十日 後遂拔之[見三國史]
11월, 고구려왕은 병사를 이끌고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장군 金錫(김석)이 왕에게 말하길,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험하며, 바닷물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만일 병사가 강하고 백성들이 용맹하다면 깨뜨리기가 어렵습니다. 군대를 돌려 돌아가는게 좋겠습니다" 왕은 듣지를 않고, 곧 3길로 나누어 군대를 발진시켜 20일동안 크게 싸워 드디어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견삼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