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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려(金礪)
[생졸년] 1675년(숙종 1)~1728년(영조 4) / 향년 5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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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사간원정언, 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용여(用汝), 호는 설재(雪齋). 김민효(金敏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재현(金載顯)이고, 아버지는 신령현감(新寧縣監) 김윤호(金胤豪)이며, 어머니는 금성이씨로 돈녕부도정 이핵(李翮)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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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김공 묘갈명(觀察使金公墓碣銘)
관찰사 김공(金公)이 조정에서 논의를 펼쳤을 때는 경종(景宗,조선의 제20대 국왕)의 대리청정 시절이었다. 군흉(群凶,흉악한 많은 사람들)들이 기회를 엿보다 불쑥 진출을 도모하여 하늘을 뒤덮는 화가 조만간 닥칠 분위기라, 온 조정이 벌벌 떨며 모두 침묵하고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였다.
공은 홀로 정색하고 직언하였으니 홍만우(洪萬遇,1671~1722)에 대해 논한 것은 싹이 트기 전에 막고 물이 스며들기 전에 막는 방도를 깊이 얻었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저하(邸下)의 어질고 효성스러운 덕을 천하가 알고 있으니 누군들 저하를 위해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 사특한 무리들이 사적으로 저하의 마음을 추측하여 도리에 어긋난 논의를 만들었으니, 저하를 사사롭게 사랑하는 듯하지만 필시 조정의 신하를 망측한 죄과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 이 무리들이 어찌 진심으로 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이겠습니까. 기회를 엿보아 허점을 공격하여 암암리에 사사로운 욕심을 이루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기사년(己巳年,1689, 숙종 15) 동궁의 원자 정호(元子定號) 사건이후로 반대편의 정태(情態)가 실로 이와 같았으나 한 사람도 공과 같이 밝게 분별하고 통렬하게 비난한 이가 없었으니 흉당(凶黨)이 공을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계묘년(癸卯年,1723, 경종 3)에 공이 영암(靈巖)으로 유배된 것은 이 일을 가지고 죄를 준 것이었다.
공(公)의 휘는 려(礪)이고 자는 용여(用汝)이다. 남달리 총명하여 문장이 일찍 성취되었다. 을유년(乙酉年,1705, 숙종 31) 사마시에 합격하여 희릉 참봉(禧陵參奉)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계사년(癸巳年,1713) 증광시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되었다가 시강원 설서, 병조 좌랑과 정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누차 사서(司書)와 문학에 제수되었다가 필선(弼善,세자 시강원의 正四品 벼슬)에 올랐는데 항상 지제교를 겸하였다. 중간에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다. 공이 대각에 들어갔을 때 임진년(壬辰年)의 과옥(科獄: 조선 시대, 과거 볼 때 일어나는 부정행위를 다스리는 사건을 이르던 말)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재상 중에 교묘하게 피한 자가 있어 사건을 조사하는 자가 탄핵하여 체직시켰는데, 조정에서는 이헌영(李獻英,1677~?), 이헌장(李獻章,1680~?) 형제에게 복시(覆試)에 응시시키려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미리 글을 지어 사정(私情)을 쓴 것은 의심할 바가 없으니 문자가 능하냐 아니냐는 논할 게 아닙니다. 응당 곧바로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해야 합니다.”
하였다.
숙종께서 동궁의 대리청정 이후에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면서 특별히 사문(斯文)의 일을 거론하며 교유하시기를,
“나의 뜻을 그대는 잘 따라서 혹여 흔들리지 말거라.”
하였다.
헌납 곽만적(郭萬績)의 상소에서 “전하께서 수수(授受)하신 것은 요순(堯舜)의 정일집중(精一執中)한 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그의 말을 통렬하게 비난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올바르지도 사특하지도 않고 옳지도 그르지도 않는 사이를 중(中)의 도리로 삼고자 하는 것이니, 심술(心術)이 무너진 점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홍만우(洪萬遇)가 수암(遂菴) 권공(權公, 권상하)이 대리청정과 고묘(告廟)의 일에 대해서 의견을 아뢰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산인(山人)으로서 저궁(儲宮)을 보호하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될듯하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공이 그 현인을 비방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여 홍만우는 마침내 유배되었다.
공은 올바르게 마음을 잡아 비록 익숙하게 알고 지내는 동료일지라도 관직에 있으면서 직분을 다하지 않거나 지론(持論)이 바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번번이 탄핵하여 용서하질 않았으니 남들이 모두 두려워 감복하였다. 무술년(戊戌年,1718)에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갈 적에 일행을 엄히 단속하여 감히 금령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임인년(壬寅年,1722, 경종 2)에 화가 일어나자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환첩(宦妾)의 역변(逆變)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도성에 들어가 동지로서 파직되어 산관(散官)이 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안팎에서 흉당이 조응한 자취가 거의 다 탄로났으니 반드시 엄히 조사해야 한다고 극언하고, 이어서 동궁을 더욱더 보호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궁인(宮人)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이 모두 자결하고 오직 환관 박상검(朴尙儉,1702~1722)만이 감옥에 갇혀있었다. 군흉 가운데 옥관(獄官)으로 있었던 자가 마지못해 명을 받들어 국문하였는데, 공이 문사랑(問事郞)에 차임되었다. 이미 박상검이 애초에 동궁을 모해(謀害)한 일을 스스로 밝히다가 말끝에 청음정(淸陰亭) 한 구절이 있었는데 곧 다시 입을 다물었다.
여러 당상들은 잠자코 있으면서 자세히 캐물을 생각이 없었는데, 공은 직접 따져 묻기를,
“네놈이 이미 단서를 말해놓고 어찌 분명하게 말하지 않느냐.”
하니,
박상검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제(世弟)께서는 청음정 아래에서 여러 환관들에게 하교하기를 ‘이번 대처분은 너희들 중 간섭한 자가 있다고 들었으니 응당 각기 자수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안색이 변했다고 해서 대조(大朝 경종)께 잡아들이기를 청하신 것뿐입니다.”
여러 당상들은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모두 말하기를,
“이것은 문목(問目) 외의 말이니 기록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공은 곧장 기록하며 말하기를
“국청(鞫廳)의 법에 죄인의 일언반사(一言半辭)도 빠트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러 당상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공은 마침내 스스로 인혐하여 면직되었고 군흉들은 곧장 박상검을 주살하여 그의 입을 막았다.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이 죽음을 당하자사기(士氣)가 꺾여 아무도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의 아들 낙증(樂曾)이 의리를 앞장서 일으켜 그를 구원하고자 하면서 공에게 여쭈었더니, 공은 의연하게 말하기를,
“인륜에 관계된 일이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 허락을 받지는 못했으나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공이 남쪽에 유배되었을 적에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1655~
1724) 공과 지평 어유룡(魚有龍,1678~1764) 또한 같은 고을에 유배되어 왕왕 서로 만났는데, 흉당들이 이 소식을 듣고 미워하여 다른 고을로 이배시키기를 아뢰었다. 공은 하동(河東)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은 풍토가 매우 좋지 않아 남들은 견디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공은 태연하게 지냈다.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충주(忠州)로 양이(量移)되었다가 을사년(乙巳年,1725, 영조1) 봄에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왔으며 곧 집의에 서용되었다.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입대하여 화를 입은 여러 신하들의 원통한 실상을 빠짐없이 아뢰고 역당들을 토죄하기를 청하였는데 사기(辭氣)가 강개하였다.
성상이 돌아보며 이 대신이 누구냐고 물어보셨으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아뢴 말이 쓰이지 않으면 단지 떠날 뿐입니다.”
하니, 남들이 그의 강직함을 칭찬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올랐으나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체직되었다. 다시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발탁되었는데 그 정사는 폐단을 없애고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키는 것을 일삼았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옮기게 되자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하였는데, 성상께서 사정(私情)을 억누르고 부임하라 명하시고 얼마 뒤에 목사를 겸임하는 법규를 회복시켜 편의대로 어버이를 모시고 부임하게 하셨다.
이에 공은 감격하여 즉시 부임하였다. 수행원을 간소하게 거느리고 순시하면서, 백성의 질고를 물었으며 밝고 상세하게 송사를 처리하였으며, 뇌물로 청탁하는 일이 행해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대신(臺臣)이 공이 수원 부사 시절에남솔(濫率)하였다는 이유로 뒤늦게 논핵하여 파직을 청하였는데, 성상께서 처음에는관과지인(觀過知仁)으로 위로하고 달래주셨지만 곧 체직하기를 허락하셨다. 장례원 판결사, 예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이해 가을,성상께서 갑자기 신임사화의 잔당들을 끌어와 등용하고붕당을 만들어 편을 두둔한다고 말씀하시며 특별히 두세 명의 신하를 파직시켰는데, 공이 거기에 포함되었기에 벼슬을 그만두고 수원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풍비(風痺)에 걸려 가마에 실린 채 성에 들어왔다가 무신년(戊申年,1728) 3월 19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의례대로 조부(弔賻)가 내려졌고 5월 4일 용인(龍仁) 광교산(光敎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신라의 대보(大輔) 알지(閼智)에서 나왔다. 좌찬성 균(稛)부터 처음으로 본조에 들어와 벼슬을 지냈고, 몇 대가 내려와 원립(元立)은 문과에 급제하고 직언으로 미움을 사서 관직은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그쳤다. 부사의 손자 참판 휘 재현(載顯)은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이름이 났다.
공의 부친 휘 윤호(胤豪)는 현감을 지냈다. 모친 우봉 이씨(牛峰李氏)는 우리 종조부 도정 휘 핵(翮)의 따님으로 어질고 은혜로워 부녀자의 도가 있었다. 공의 아내 금성 임씨(錦城林氏)는 도사 세공(世恭)의 따님으로 3남을 두었는데, 장남 낙증(樂曾)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으며 차남 낙조(樂祖)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보로 현감을 지냈으며 삼남 낙천(樂天)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요절하였다. 딸은 사인 유언급(兪彥伋)에게 시집갔다.
공은 용모가 준수하고 사기(辭氣)는 명쾌하였으며 겉으로는 거짓으로 꾸밈이 없었고 안으로는 모나지 않았다. 대부인을 섬길 적에는 순종하는 데 힘썼고 만년에도지물(志物)의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청렴하였기에 항상 욕되게 할까 걱정하였으니, 고을의 수령이나 관찰사를 역임하면서도 선인의 허름한 집은 고치지 않고 오직 묘소에 대한 일에는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조정에서 벼슬살이할 때의 풍채는 볼 만하였으니, 일찍이 말하기를,
“아부하여 성상의 뜻에 따르는 것은 사대부가 매우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관찰사로 있을 때 속현(屬縣)에서보리이삭이 두 가닥으로 열린것을 상서롭다고 하면서 바쳤는데도 번번이 물리치고 아뢰지 않았다. 대간(臺諫)이 되었을 적에는 일마다 감히 진언하였는데, 언의가 바르고 준엄하여 머뭇거리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 평소에는 두문불출하며 고요함을 지켜 남들과 몰려다니지 않았는데, 권세가에 빌붙어 아부하는 자를 보면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
이 때문에 강직함을 스스로 즐겨 세상과 부합하는 일이 적었다. 문사에도 뛰어났지만 끝내는 홍문관에는 선발되지 못했으니 공을 아는 자들은 모두 억울하다고 일컬었다. 또 공은 재능이 민첩하여 세상이 쓰일 만했으나 하늘이 또 수명을 늘여주지 않아 결국 재능을 펼치지 못하였으니
아, 안타깝도다. 공은 세상을 떠나고 대부인은 아직 살아계시니 더욱 슬퍼할 만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쭉 공과 종유하면서분란한 노인에 이르렀다. 지금 낙증(樂曾)이 묘문을 청하는 것에 대해 의리상 차마 사양할 수 없어 눈물을 훔치며 글을 짓는다. 명(銘)을 덧붙이니 다음과 같다.
강직한 자질과 / 剛果之質
민첩한 재능으로 / 敏達之才
끝까지 다 날지 못했으니 / 飛不盡翰
어찌 이리도 운명이 어그러졌나 / 胡命之乖
세상의 변천과 영욕에도 / 平陂榮辱
평소의 지조 변치 않았네 / 素操不回
온 세상이 주저하고 머뭇거리니 / 擧世媕娿
습속이 날로 무너지네 / 習俗日頹
공과 같은 언의를 / 如公言議
어디서 얻을 수 있으랴 / 何處得來
묘비에 시를 새겨 / 刻詩陰墟
내 슬픈 마음을 기록하노라 / 維以志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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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관찰사 김공 묘갈:
저자가 김려(金礪, 1675~1728)를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홍만우(洪萬遇)에 …… 것:
숙종 때 세자인 경종을 대리청정 시키는 문제로 정쟁이 일어났으나, 결국 노론의 뜻대로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남인 홍만우가 세자의
보호를 주장하다가 엄한 꾸중을 들은 소론의 거두 윤지완(尹趾完)을 구원하고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도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김려(金礪)가 그를 삭출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주03] 기사년(己巳年) …… 사건:
1689년(숙종 15) 송시열(宋時烈)이 경종의 원자정호(元子定號)를 반대하여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남인이 이를 기회로 다시
정권을 잡아 송시열과 그를 지지하던 서인 일파를 모두 축출하였던, 이른바 기사환국을 가리킨다.
[주04] 임진년의 과옥(科獄):
1712년(숙종 38) 2월 시행된 정시(庭試) 때 부정행위로 야기된 옥사를 말한다. 이때 시행된 정시는 왕비의 종기가 나은 것을 축하
하기 위한 것으로서 양정호(梁廷虎) 등 19명을 뽑았다.
그런데 당시의 시관 이돈(李敦) 등이 오수원(吳遂元), 이헌영(李獻英)ㆍ이헌장(李獻章) 형제, 이빈흥(李賓興), 윤팽수(尹彭叟) 등
자기 친구의 아들과 가까운 친지에게 미리 시제(試題)를 가르쳐 주어 합격시켰다. 그리하여 당시의 시관인 김창집(金昌集), 이돈을
비롯하여 정몽선(鄭夢先), 김진규(金鎭圭) 등 수십 명의 연루자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주05] 정일집중(精一執中):
채침(蔡沈)의〈서경집전서(書經集傳序)〉에 “정일집중은 요ㆍ순ㆍ우가 서로 전수한 심법이다.[精一執中, 堯舜禹相授之心法
也.]”라고 하였는데, ‘정일집중’은 곧《서경》〈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
여야 진실로 그 중도를 잡을 것이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6] 홍만우가 …… 비난하였다:
1717년(숙종 43) 12월 홍만우(洪萬遇)가 상소하여 권상하(權尙夏)가 세자의 대리 청정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없었고 또 태묘(太
廟)에 고하는 데 대해 하문할 적에 헌의(獻議)하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처신을 문제 삼았는데, 그의 말에 “대신으로서 나라를 위하는
충심과 산인(山人)으로서 저궁(儲宮)을 보호하는 도리에 있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주07] 환첩(宦妾):
1721년(경종 1) 12월에 있었던 세제(世弟) 시해 모의 사건과 관련된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문유도(文有道), 나인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을 가리킨다.
[주08] 세제(世弟)께서는 …… 것뿐입니다:
관련 내용은《경종실록》1년 12월 29일 기사에 보인다. 박상검(朴尙儉)은 국문을 받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세제께서 청음
정(淸陰亭)에 나아가 여러 내관을 불러서 사핵(査覈)하게 하자, 여러 내관이 말하기를, ‘이 같은 일은 신 등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께서 ‘문유도와 박상검은 범한 바가 있기 때문에 나를 보면 얼굴빛이 달라지니 이른바 속에 있는 것이 밖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안다.’라 하시고, 인하여 두 환관의 죄목을 비망기에 써서 승전 내관(承傳內官)으로 하여금 계품(啓稟)하게 한 뒤 승
정원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주09] 태학생 …… 당하자:
1720년(경종 즉위년) 성균관 장의(掌議) 윤지술(尹志述)이 숙종의 지문(誌文)에서 1701년(숙종 27) 있었던 희빈(禧嬪) 장씨(張
氏)의 무고(巫蠱) 사건을 누락시킨 것을 논척하다가 원배(遠配)되었고, 이듬해 신축옥사 때 소론의 탄핵으로 처형되었다.
[주10] 남솔(濫率):
수령이 가속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가리킨다.
[주11] 관과지인(觀過知仁):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과실을 저지르지만, 정리상 부득이하게 저지르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 과실에 대해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댈 것
이 아니라 그 이면의 사정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뜻이다.《논어》〈이인(里仁)〉에 “사람의 과실은 각기 그 유(類)대로 하는 것이
니, 그 사람의 과실을 보면 인을 알 수 있다.[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斯知仁矣.]”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12] 성상께서 …… 등용하고:
이른바 정미환국을 가리킨다. 영조는 을사년(1725, 영조 1)에 소론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 세력인 노론을 정계로 불러들여 노론정
권을 구성하였으나, 노론 당로자들이 을사처분과 환국에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 소론에 대한 보복까지 요구하여 정국이 다시 노ㆍ소
론 사이의 당쟁으로 흘러가자, 정미년(1727, 영조 3) 7월에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고집하던 민진원과 정호(鄭澔) 등을 파면하고 이광
좌(李光佐),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소론을 다시 정권에 참여시켰다.
[주13] 지물(志物)의 봉양: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의복이나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14] 보리이삭이 …… 열린:
풍년이 들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겨졌으며 관리의 탁월한 치적을 상징하였다. 후한(後漢)의 장감(張堪)이 호노(狐奴)라는 곳에
8000여 경(頃)의 전지를 개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짓게 하자, 백성들이 이를 칭송하여 노래하기를, “뽕나무에 곁가지가 없고,
보리이삭은 두 가닥이로다.
장군이 정사를 하시니, 즐거움을 다 말할 수 없네.[桑無附枝, 麥穗兩歧. 張君爲政, 樂不可支.]”라고 하였다.《後漢書 卷31 張堪
列傳》
[주15] 분란한 노인:
원문의 ‘백분여(白紛如)’는 백발이 된 자신을 가리키는 겸사이다. 양웅(揚雄)의《법언(法言)》에 “아이 때부터 학문을 익혔지만
늙어서도 분란하기만 하다.[童而習之, 白紛如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