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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보물110호 光州東五層石塔
양효성 추천 0 조회 32 10.11.08 21: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보물110호 光州東五層石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都市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生存의 조건과 交通의 요충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대도시가 거의 江을 의지하는 것으로 보아 江은 이 두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지도 모른다. 즉 뱃길과 농경 및 목축을 위한 물의 흐름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필수 조건이라는...

 

요즘 어쭙잖게 人類史를 遊牧의 移動과 農耕의 定着으로 나누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 이동과 정착이라는 요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양면성인데 생활집단의 전통으로 길들여지며 유전자로 전승된다는 가설을 세워놓고 즐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구인은 유목민적인, 동야인은 농경인이라는것이 내 假設이다.

 

도시는 또 상징이라는 것이 있어서 파리는 에펠탑이고 런던은 타워브릿지요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할 때 빛고을 광주의 상징은 무엇인가? 이 상징은 그대로 그 도시의 첫 인상을 규정한다. 예를 들어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면 로마제국이라는 역사를 함께 떠올리듯이...

 

친구가 광주에 대한 인상을 써보라고 했다. 광주는 무등산아래 광주천이 도심을 흐르는 아늑한 도시였는데 도청의 이전과 아파트가 유행하면서 신도심이 서쪽으로 옮아가는 바람에 더 더욱 역사의 짙은 냄새를 맡기 어려워졌다. 동헌이나 향교 등등 지난 세월 도시의 흔적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근래 신창동의 선사주거지가 발굴되었지만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영산강 상류의 이야기다.

 

却說 그 옛날은 지금 내가 알 수 없고 허리를 잘라 조선대학교 인근에 있는 하나의 탑을 잠시 소개해 두자...이 탑은 무등산의 한 자락인 지산 유원지 아래 지금은 복개된 냇가에 있는데 쌍둥이처럼 광주천 건너 서오층탑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시대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층수도 똑 같이 五層인데 어떤 施主들이 이런 절을 짓고 탑을 세웠는지 궁금하다. 사찰이 일반적으로 도심에 잘 지어지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都心은 어디에 어떤 규모였는지도 추정해볼 일이다. 또 조선시대에 이 자리에 栢川寺라는 절이 있었다는데 그렇다면 복개된 냇물은 栢川[잣내]이었을까? ‘잣’이 ‘고개’ 또는 ‘城’의 의미라면 혹 이 산자락에 城이 있었을까? 지세로 보면 그럴만 한데...

 

 

문화재에 보통 ‘통일신라 후기’- 이렇게 표기된 것은 지역에 따라 후백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 또 안내판에 ‘신라탑의 아름다움’ 운운 했는데 그 신라탑이 백제가 망한 뒤 백제 석공들의 원천기술은 아니었는지...용어의 선정과 고증에 좀 더 愼重해야 되지 않을까? 왕궁리의 오층탑이나 부여 정림사의 오층탑도 연상하면서 생각해볼 일이다. 잠시 산책하면서 이런 생각을 문자로 옮기는 나도 無禮하기 짝이 없지만- 이른바 객관적이고 학술적이라는 문화재청의 보물해설을 사진 아래 그대로 옮겨 각자 역사적 상상의 나래를 펴보시기 바란다. 이 해설은 안내문과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광주 지산동 검찰청 과 조선대학교 사이에 천년의 세월을 잇고 있는 오층탑-

뒤에 는 연화사라는 절이 새로 들어섰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백주사'라고 되어 있는데 안내문에는 '백천사'다.

아직 원전을 직접 찾아보지 못했다.

 

서쪽에서

 

측면

 

동쪽에서

 

버선코처럼 들린 처마는 단정하고 균일하다.

그 모서리를 우러르면 하늘이 비로소 높아보인다.

 

 

기단

 

 

빗물받이 양철지붕의 고양이가 탑을 지키고

 

가을 거미는 아침 이슬을 털며 지난 밤의 수확을 거두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는 다음과 같다.

 

보물 제110호

명 칭 광주동오층석탑(光州東五層石塔)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광주 동구 지산동 448-4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는 국유, 관리자는 광주시다.

 

광주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탑의 구성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형태로 신라석탑의 기본형을 잃지 않고 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는 여러 개의 돌을 짜맞추어 구성하였으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1층은 5단인데 비해 2층부터는 4단으로 간략화되어, 양식상 만들어진 시대가 통일신라 후기로 내려옴을 알 수 있다.

 

<2010년10월23일 아침 이곳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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