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영민
생사가 가장 큰 일인데, 어찌 촌음을 아끼는가
조선후기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한 수월영민(水月永旻, 1817~1893)스님. 어려서 불연이 깊었던 수월스님은 출가 뒤에는 참선 정진과 다라니 수행으로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존경받았다. 아쉽게도 덕숭산 정혜사의 수월음관(水月音觀,1885~1928) 스님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수월영민 스님의 수행일화를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에 있는 비문과 주지 호성스님의 대담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생사가 가장 큰 일인데, 어찌 촌음을 아끼는가”
참선 정진과 다라니 수행으로 후학 인도
생전에 사리 출현…각종 이적 보이기도
○…수월스님은 출가 이전부터 불연이 깊었다. 어려서 친구들과 불상이나 불탑을 자주 만들며 놀았다고 한다. 시냇가에서 돌로 부처님을 만들고 모래로 공양미를 지어 바치는 등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불심뿐 아니라 효심도 대단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에 갔다가 떡이나 과일을 받으면 그대로 갖고 와 부모님께 드렸다. 스님의 모친은 “전생부터 부처님 제자이니 훗날 출가하여 큰 뜻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
○…17세에 의성 고운사로 출가한 수월스님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은사 모시기를 친부모 봉양하듯 했다. 대중과 늘 화합하면서 다툼이 없어 타인에게 모범이 되었다.
청파스님에게 삭발하고 송암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수월스님은 “나고 죽는 일이 가장 큰 일”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삭발염의하고 불문(佛門)에 들었지만 생과 사를 해결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다. 스님은 원두타(元頭陀)스님과 함께 고운사 남암(南庵, 각화사 남암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10년 결사했다. 면벽참선 정진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두문불출했던 것이다. 공부를 마치고 화담(華潭)스님을 찾아가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더욱 깊이 했다.
<사진>의성 고운사에 모셔져 있는 수월스님 진영.
○…두타스님과 남암에서 10년 결사를 마친 수월스님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오가며 선지식을 친견했다. 어느 해에는 군위 압곡사에 머물렀는데, 꿩이 날아와 발등에 앉고 제비는 정수리에 앉는 신기한 일도 있었다. 또한 스님이 앉은 자리에는 언제나 따뜻한 기운과 빛이 생겼다고 한다. 문경 운달산에 머물 때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당신의 장삼을 벗어 숨겨주었다. 스님은 사냥꾼에게 “살생을 하지 말라”고 사냥꾼을 경책하여, 더이상 사냥을 하지 않도록 했다.
○…생전에 50여과의 사리가 출현한 수월스님에게 주위에서 사리탑을 세워야 한다고 청했다. 하지만 수월스님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오히려 꾸짖었다. “사리는 누구나 본래 있는 것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으니 앞으로는 누구도 일체 거론하지 말라.”
○…1872년 가을 용성(龍城)스님이 수월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왔다. “나고 죽는 일이 크고 무상함이 신속한데 어떻게 견성합니까”라는 용성스님 질문에, 수월스님은
“성인이 가신 시대가 멀어져서 마(魔)는 강하고, 법(法)은 약하니 마땅히 지성을 다해 삼보(三寶)에게 예경하고 천수대비심주를 부지런히 외우면 저절로 업장이 소멸되고 심광(心光)이 투루(透漏)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또한 구해(九海).일해(一海) 등 제자가 법을 청하자 “나의 법은 본래 없나니 다만 없고 없는 것만을 얻었고, 없는 것도 또한 없다. 가고 서고 앉고 눕거나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이 모두 법”이라고 했다.
<사진>의성 고운사에 있는 수월스님 부도. 2004년 조성한 것이다.
○…당대의 명문가인 의성 김씨 문중에서 출가한 수월스님은 학덕(學德)이 높아 유생들도 머리를 숙였다. 스님들이 천대받던 시대였지만 수월스님을 친견한 선비들은 고매한 인격과 학식에 감탄했다고 한다. 유씨 성의 한 선비는 수월스님을 만난후 “부처님”이라고 칭하고, 아들을 출가시켰으며 1890년에는 절도사(節度使) 이민긍(李敏兢)이 예물을 받치고, 스님 발밑에 예를 올렸다.
○…평생 소박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수월스님은 생사에도 걸림이 없었다. 입적할 시기가 가까워지자 수월스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내가 갈 때에 너희들은 소리 내어 울지 말고 빈소를 마련하지도 말라, 그리고 곧 화장하거라.”
■ 수월스님의 어록 ■
“나고 죽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니 촌음을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
“나의 법은 본래 없나니 다만 없고 없는 것만을 얻었고, 없는 것도 또한 없다.
가고 서고 앉고 눕거나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함이 모두 법이니라”
“법화경을 독송하는 일과는 만우(萬愚)를 스승 삼아서 하고,
나의 원불은 내가 받드는 것과 같이하라.
내가 말한 바를 너희들이 위반하지 아니하면 내가 생존함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 수월스님의 사리 출현 ■
수월스님은 생전에 다수의 사리가 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깨달음의 상징적인 결정체인 사리는 스님들이 입적한 후에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생전에 사리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수월스님이 대표적이다. 수월스님 비문에는 언제 어디서 사리가 출현했는지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갑자년(1864년) 3월 상순 어금니에서 2과, 3월 초하루 오른쪽 눈에서 1과, 3월15일 두 눈에서 4과, 12월 29일에는 왼쪽 눈에서 3과, 오른쪽 눈에서 2과가 나왔다. 을축년(1865년) 윤 5월18일에는 왼쪽 눈에서 7과, 오른쪽 눈에서 9과, 같은 달 24일에는 왼쪽 눈에서 2과가 나왔다. 병인년(1866년) 4월8일에는 두 눈에서 14과, 섣달 29일에는 왼쪽 눈에서 3과, 오른쪽 눈에서 2과, 어금니 사이에서 2과가 출현했다.
1864년에서 1866년 3년간 스님은 모두 51과의 사리가 출현하는 이적(異蹟)을 보였다.
<사진>지석영의 친형 지운영이 직접 쓴 수월스님 비. 의성 고운사에 있다.
■ 비문을 지은 지운영은 누구인가 ■
1852년 출생해 1935년 별세한 지운영(池雲英)은 종두법을 시행한 의사이며, 한글학자로 유명한 지석영의 친형이다. 조선 말기 서화가이며 사진사로 고종황제의 어진을 처음 촬영한 한국인이다.
지운영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1885년 무렵 한양에 사진관을 개업하기도 했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붙잡혀 영변으로 유배됐다. 호는 설봉(雪峯) .백련(百蓮)이며 백련거사라고 불리었다. 유불선에 두루 통했고,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명성을 날렸다.
수월스님 비문을 쓴 것은 그의 나이 41세였다. 수월스님 비문을 쓴 까닭에 대해 지운영은 “그 누군들 (수월스님을) 찬탄하지 않겠는가”라면서 “화상의 거룩하신 유적이 구전(口傳)에만 그칠까 염려하여 제자인 만우스님이 사실을 기록한 글을 가지고 찾아왔다”고 밝히고 있다.
■ 행장 ■
1817년 3월11일 의성현 후죽리(지금의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진남(金鎭南)선생, 모친은 안동 권씨.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법휘(法諱)는 영민(永旻)이고, 법호는 수월(水月)이다.
의성 명문가 출신
10년 결사도 감행
어려서 유학을 공부한 스님은 불연도 깊었다. 수월스님은 17세의 나이에 고운사로 출가해 청파(淸波)스님에게 삭발 했으며, 송암(松庵)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혜월(慧月)스님의 법을 이었다.
“생사가 가장 큰 일”임을 절감한 스님은 원두타스님과 함께 남암에서 10년 결사 정진했다. 이어 화담(華潭)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깨달음의 세계에 들었다. 이후 각지를 순례하며 제방의 선지식을 친견하고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노년에는 군위 압곡사에 주석하고, 한때 금강산 수미탑 아래서 참선 수행했으며, 운달산에서도 정진했다.
1866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정진하고, 1867년에는 태백산 갈래사(葛來寺, 지금의 정암사)에 머물렀다. 신묘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병풍산(屛風山)에 들어가 산삼을 먹고 건강을 회복했다. 1872년 가을에는 육련(陸蓮)이 솟아나는 신비로운 일이 생겼다. 이해 용성스님이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다. 1893년 12월13일(음력) 결가부좌한 스님은 대중에게 팔을 들어보인후 원적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납 61세. 제자는 징담(澄潭).영담(影潭).만은(晩隱)스님이 있고, 수계 제자로 구연(九淵).일해(一海).담익(曇益).영곡(靈谷) 스님을 두었다.
수월스님 진영은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에 모셔져 있으며, 군위 압곡사 툇마루 옆벽면의 신중탱에는 1881년 수월영민 스님이 증명법사로 기록돼 있다. 고운사는 2007년 수월암을 복원하고, 진영을 모시는 등 수월스님 선양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고운사=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