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 출장을 결정 짓고 수소문해 들어간 디자이너 리스트에서 단연 취재 리스트 0순위는 에릭 마그누슨(Erik Magnussen)이었다. 그를 섭외하기 위해 다양한 루트로 연락을 취했고 긴 노력 끝에 그 만남은 이루어졌다.
1786년에 지어진 에릭 마그누슨의 코펜하겐 하우스 외관. 왼쪽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건물은 그의 디자인 스튜디오다. 잔디가 깔려 있는 마당 앞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진다.코펜하겐 도심에서 차로 30분 정도 외곽으로 나가면 해안선을 따라 조용하게 늘어선 주택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 1700년 말에 지어진 이 정갈하고 오래된 주택이 있다. 마당과 바다를 품은 안과 달리 수수한 외관의 뒷문으로 현존하는 덴마크의 대표 디자이너 에릭 마그누슨이 우리를 맞았다. 서슴없이 건네는 악수와 점퍼를 받아드는 두 팔, 너그러운 미소, 마음을 노곤하게 만드는 마음 좋은 할아버지의 웃음이다.
자신이 디자인한 요가 체어에 앉은 디자이너 에릭 마그누슨. 한 개의 파이프를 이용한 베이스가 아름다운 요가 체어와 독일 브랜드를 위해 디자인한 소파가 어우러진 에릭 마그누슨의 거실 모습.자신의 디자인 컬렉션을 촘촘하게 들여놓은 에릭 마그누슨의 하우스는 나지막한 스튜디오와 붙어 있다. 1786년에 지어진 오래된 주택 본관과 통로를 통해 이어지는 형식으로 지금의 스튜디오를 지은 것. 납작한 직사각형 모양의 스튜디오는 오래된 저택의 외관에서 따온 자그마한 박공지붕 대신 삼각뿔의 유리 천창을 얹어 위트를 더한 모습이다.
1980년 디자인의 ‘포슬라이트(Porcelight)’가 걸려 있는 에릭 마그누슨의 거실 면면. 자신의 흑백사진과 아이들의 사진, 디자인 컬렉션 사이로 그가 최근 작업 중인 라운지 체어 ‘플라토(Plateau)’의 모형도 보인다.고희를 넘긴 이 거장 디자이너는 16살부터 도자기를 빚었다. 1960년 졸업 당시 덴마크의 대표 세라믹 브랜드 빙&그룬달(Bing&Grøndahl)을 통해 디자이너의 길로 접어 들어섰고 이후 테이블 위를 풍요롭게 할 세라믹 웨어, 미니멀한 디자인에 기능을 겸한 모던한 가구, 크래프트적 디자인의 조명, 커트러리, 인테리어 하드웨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자신의 디자인 영역을 넓힌다.
1 박공지붕을 모티프로 한 천장으로 코펜하겐의 맑은 하늘이 들어온다.
2 3백만 개 이상 팔려나간 에릭 마그누슨의 베스트셀링 아이템, 스텔톤의 베큠 저그가 보인다. 앞에 놓인 바퀴 달린 채릭 의자는 강도를 실험 중인 프로토 타입.그의 디자인 중 스텔톤의 ‘베큠 저그(Vacuum Jug)’는 전 세계에서 300만 개 이상 팔려나간 베스트셀링 아이템. “디자인 스쿨에 다니던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졌던 워크숍 시간에 세라믹을 처음 접했죠. 그때의 흥미를 시작으로 세라미스트가 됐습니다. 상업적인 작업을 시작한 이후 세라믹 다음으로 디자인한 첫 작업은 의자 디자인이었고요.”
최근 새롭게 페인트를 칠했다는 거실 창은 끝도 없는 바다를 배경 삼아 열려 있다. 다이닝 공간에 놓인 오크 테이블과 채릭 의자, 도자기 조명은 모두 에릭 마그누슨 디자인. 한스 베그너와 아르네 야콥센으로 대표되는 덴마크 디자인의 전성기 이후 이렇다 할 스타 디자이너를 발굴하지 못한(?) 덴마크 디자인계에서 그는 시대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과거 덴마크 디자인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재미있는 작품도 많고요. 디자인을 통해 그 안에서 디자이너 자신도, 그걸 접하는 사람들도 즐거움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영향 아닐까요.”
에릭 마그누슨 디자인의 실질적인 업무를 맡고 있는 아내와 함께.그는 덴마크적 디자인에 연연하지도 않고 또 새로운 디자인에 차가운 시선을 보내지도 않는다. “좋아하는 디자인을 꼽으라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 이딸라의 ‘띠마 시리즈’, 콘스탄틴 그릭의 ‘체어 원’입니다. 아주 개인적인 취향인데, 이 가구들에서 음악적인 즐거움을 얻는다고 할까요. 저에겐 어떤 리듬 같은 게 느껴지는 디자인입니다.”
1 인체공학적인 등받이 디자인 덕분에 편안한 착석감이 돋보이는 ‘채릭(Chairik) 의자’. 이 가구 역시 그의 베스트셀링 가구 중 하나다.
2 채릭 의자를 배경 삼아 인터뷰를 나누고 있는 디자이너 에릭 마그누슨의 모습. 열린 마음으로 주저 않고 좋아하는 디자인을 나열할 수 있다는 점도 그가 여전히 왕성하게 디자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증거 중 하나다. “제품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제가 갖는 생각은 늘 한결같죠. 예를 들어 의자 디자인을 맡았다고 하면, 많은 의자 디자인을 봅니다. 앉아보기도 하고 연구하면서 이보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 수 없을까를 고민하죠.” 값비싼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사람’ 혹은 ‘기업’의 됨됨이를 보고 클라이언트를 고른다는 그의 말도 대가이기에 가능한 면모다.
1 코펜하겐 자택에서 만난 덴마크 대표 디자이너 에릭 마그누슨.
2 현관을 지나서 나오는 계단은 침실과 개인 공간으로 통한다. 오래된 주택의 구조가 멋스럽게 재현된 장면.집에 머물지 않는 일상은 대부분 작업을 하거나 공장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난다. 1년 중 1/4은 프랑스 보르도 근처 항구도시에 자리한 또 다른 집에 머무는 것이 디자인 다음으로 즐거운 일이라는 에릭 마그누슨. 햇살 좋은 프랑스 남부에서 대지와 바다를 바라보고 웃음 짓는 촌로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디자인과 삶에 대한 열정은 성성한 백발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새롭고 뜨거운 디자이너 에릭 마그누슨.
오래된 저택 옆으로 나지막하게 지은 디자이너 에릭 마그누슨의 스튜디오. 안쪽으로 아내 조나 드레이어 마그누슨이 보인다. 긴 겨울과 추운 날씨 탓에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북유럽은 그 안에서 보다 나은 삶을 꾸려가기 위해 그들만의 방식으로 디자인을 구축해가고 있다. ‘크래프트맨십(Craftsmanship)’이란 가치를 길잡이 삼아, 30년 넘게 자기만의 색깔로 작업을 이어가는 에릭 마그누슨. 그의 존재가 이미 덴마크 디자인의 위상이자 힘이라는 걸, 인터뷰 내내 느끼고 또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