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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3 - 당 고종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한게 598년으로 이후 중국과 고구려는 70년간
큰 전쟁만 해도 6차례이고 작은 침공까지 합치면 무려 10차례나 전쟁을 치르는데...
612년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이름을 알수 없는 요동성주" 와 을지문덕 징군이 격퇴
했고 645년에 당태종의 30만 정예군도 역시 "이름을 알수 없는 안시성주" 가 물리쳤습니다.
645년 이세민은 30만 대군을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수양제가 함락하지 못했던 역시 이름을
알수없는 성주가 지키는 요동성에 개모성, 비사성, 백암성등 4개의 성을 함락했으나 이름
모를(양만춘?) 성주가 수성하는 안시성 공략에 실패해 철수한 이후에도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으니...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 그 강역을 어지럽혀 저들을 피곤하게
하고, 쟁기를 놓고 보루로 들어가게 하면 수년 사이에 천리가 황폐해져 이길 것으로 봅니다.
이 전략은 60여년 전에 수나라가 남쪽 진(陳)나라를 칠 때 쓴 계책이니 고경(高熲)은 수문제
에게 “진(陳) 의 수확기에 진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면 적은 병력을 징발
하느라 수확기를 놓칠 것입니다. 진(陳)의 대병력이 모이면 철수하는 것이니 이렇게
몇차례를 반복하면 익숙해질 때 우리는 진짜로 병력을 집중하여 진에 대한 토벌에 나섭니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만여명을
보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또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을 부총관으로 병력 3천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 병력을 따라 신성도에서
들어가게 했는데, 두 군대는 물에 익숙해 잘 싸우는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당태종은 우선 수만 단위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지속적인 소모전을 통해 고구려의 피로 누적을
노렸으니... 647년 3월, 당나라의 첫번째 선발은 노련한 장수인 이세적이었는데 우진달,
이해안등도 후방의 요동반도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되도록 많은 교전을 통해 성
주변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고구려의 동원 체계를 피로하고 교란하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고, 우위장군(右衛
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병력 3만여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서 공격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647년 12월, 고구려 막리지 고임무가 사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화친을 성사시키고 648년 1월
에도 연이어 친선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세민은 사죄를 받아들인다고 대답하였으나 이는
기만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대로 사신이 오는 동시에 3만의 군사를 뽑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안정적으로 전술을 수행하는 노련한 지휘관 이세적과 비교해 후임 지휘관 설만철은
혼자서 수천의 기병을 당해내고 대승을 거두는 용장 스타일이었으며, 뒤이어
서해안의 수군장수인 고신감 역시 쳐들어왔는데.... 이 싸움에서도 설만철은
기이한 무용을 뽐냈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 전과는 그렇게 시원치 않은듯 보입니다?
당시 당나라 3대 명장으로 꼽히던 부마 설만철은 부장 배행방과 전공을 다투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처형만 면하고 명부에서 이름과 기록이 불살라진채 유배를 당하면서 무장 경력이
끝난 것인데, 태종이 송주(宋州)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
(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척을 만들어 우리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강위 등이 백성을 뽑아 이민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었는데 아, 공, 미 3주
의 이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임신일에 무주도독 장사귀, 우위장군
양건방 등으로 하여금 농우, 협중의 병사 2만여명으로 그들을 쳤다. 자치통감
1~ 3만 규모의 비교적 소규모의 부대를 동원한 교전을 통해 감을 잡은 이세민은 선박 건조
에 박차를 가해 647년 8월에 강남에서 선박 수백척을 건조한데 이어 648년 7월에는
사천 일대인 검남, 8월에는 무주, 월주, 홍주 등지에서 전함 1300척을 건조하니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면서 까지 강행할 정도로 선박 건조는 혹독하였다고 합니다.
당태종은 12월에 신라에서 찾아온 김춘추를 성대히 환영하고 나당동맹(고구려는 당이 차지하고
백제는 신라가 차지한다)을 성사시켰으며.... 계속해서 용사들을 모집하고 수군 기지에도
군량과 자재들을 쌓아 만전을 기했으니, 30만 대군을 일으켜 침공을 준비하다가 예정한 날자
가 임박한 4월에 당태종이 죽으면서 요동전쟁을 그만두라고 유언하였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세민이 사망하였다. 고구려에 대해 새 전쟁을 준비하던 그는 죽으면서 고구려와 대결을 접으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는 후계자인 이치가 귀공자로 편안하고 곱게 자라 실전 경험이 단 한번도
없으니 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지라 큰 전쟁을 벌이다가 실수할까 염려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신라 김춘추의 부추김도 있고 해서 다시 전쟁을 준비합니다.
당 고종이 그간 당나라를 괴롭혔던 토번(티베트) 찬포를 부마도위로 삼고 서해군왕으로
봉했다. 장손무기에게 도달한 국서에서 말하였다.‘천자께서 새로이 즉위
하셨으니 불충한 신하가 있다면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가겠소!’자치통감 당기
토번(티베트)에서는 이세민의 장례식에 사절을 보내 그 뜻을 전했는데.... 아슬아슬
하게 선을 타는 이 발언은 연개소문을 겨냥한 이세민의 선전포고와 일치하는
내용임을 생각하며 본다면 조롱의 수위가 사뭇 달라지니 그럼 비웃는 것일까요?
연개소문과 고구려에 대한 공포는 각인되어 대륙 깊숙한 곳까지 전승을 남겼으나 그후 김춘추
가 당태종을 만나 나당연합이 결성되었고 이세민이 죽기 직전까지 실행한 소모전과
상륙작전의 효과는 입증되었으며 또한 당나라는 645년의 전쟁 이후 고구려
주변 종속국들에게도 손을 뻗쳤으니 이에 대해 연개소문이 낸 수는 요하 상류에 있었습니다.
요하 상류의 북쪽 지류인 시라무렌강은 몽골로 뻗는 드넓은 사막과 초원 경계에 근접해있으며
남쪽 지류인 노합하는 만리장성 코 앞을 흐르는 강이니... 거란과 해가 자리잡은 요하 상류를
고구려가 장악한 수세기 동안 중국 입장에서는 북경 동부까지의 2천리 구간은 벽촌이었
는데, 반대로 고구려에게는 본토를 감싸는 방패이자 북방과 서역으로 뻗어나가는 창구였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고구려의 수중에 있는것은 아니었으니 고구려와 중원, 몽골초원 동아시아 3강의 각축장
이었고 이곳 세력들은 시세에 따라 강한 곳에 붙었으니 고구려는 내몽골 시라무렌강 송막 신성
을 쳤는데, 이 전투에서 거란의 친당파 수령 이굴가는 화공으로 고구려 기병 500명을
죽이고 그 시체를 모아 경관을 쌓았으니 당 고종은 승전보를 조정에 펼쳐보여 기념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거란의 이굴가는 인상적인 무공을 기록하였으나 전체적인 싸움과 거란 신성의
향방은 해석에 따라 엇갈리니, 이후 650년대 전쟁에서 등장하는 고구려군의 신성이
거란 신성으로 해석되는가 하면 거란이 이후 고구려를 압박하는데 별다른 역할
을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는 신라에도 동시에 힘을 쏟는 여력을 보여주기 때문 입니다.
영휘 6년에 신라가 고려(고구려)와 말갈이 성 36개를 빼앗음을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조서
를 내려 영주도독 정명진, 좌위중랑장 소정방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신성에 이르러 고려(고구려) 병사를 이기고 성 바깥과 촌락에 불을 놓고 돌아왔다. 신당서 고려전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기사
영휘 6년에 소사업에게 위구르 기병을 거느리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구당서 회흘전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게도 칼을
겨누었는데 신라는 나당연합을 결성시킨 주역인 김춘추가 막 즉위한 상황이었습니다.
655년, 고구려- 말갈- 백제 연합군은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 북방의 36개 성을
함락시켰고.... 659년에도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하슬라(강릉)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신라는 남쪽의 실직(삼척)을 2선 방어기지로 삼아야 했으니 이는 신라에게 있어서
엄청난 국가적 위기였고 신라는 무열왕 즉위후 끊임없이 당에 구원군을 요청하게 됩니다.
당에서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고구려 방면으로 정명진, 소정방, 위구르
기병을 이끌던 소사업 등을 투입했으며, 의례적인 태자 책봉 축하
사절 기록이 있는 656년에 잠깐 전쟁 기록이 잦아들 뿐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657년 설인귀에게 명하여 정명진을 보좌하여 요동을 공략토록 하였는데 귀단수
에서 고려를 깨트려 3,000명을 베어 죽였다. 다음해 양건방,
계필하력과 더불어 고려 대장 온사문에 맞서 횡산에서 싸웠다. 구당서 설인귀 열전
서기 658년 6월에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의 적봉진을 함락시켜 400여명을 참하고 포로 100명을
잡았다. 고려는 대장 두방루로 하여금 3만명으로 대항하였으나 정명진이
거란을 이끌고 거꾸로 들이쳐 크게 깨트렸는데 참수한 것이 2,500명 이었다.
658년 11월에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으로 하여금 고려 장군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워서 깨트렸다. 자치통감 당기, 정명진을 보내 설인귀
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신당서 고려전
장군~중랑장 선에서 진행되던 싸움에 대장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고구려
에서는 두방루, 온사문 등이 등장하고 당나라에서도 계필하력, 양건방등
당나라 1세대 대장군들이 투입되었고.... 귀단수, 적봉진, 횡산 등지가 주요
격전지가 되었는데 고구려가 패했다는 당 실록 기록이 자치통감에 인용되었습니다.
반면에 고구려가 이겼다는 기록도 같이 남아있거나 결과가 누락된 경우
도 존재하는데 기록마다 연대가 달라서 순서가 섞이는 감이 있지만
순서에 따라서 누락된 고구려의 전쟁 양상들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650년대 후반에 가도자(可度者)가 죽자 해(奚, 고막해(庫莫奚)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굴가가 죽고나서 해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켰다. 신당서 북적전 해, 거란
장군 신문릉과 함께 흑산에서 거란을 깨트려 거란왕 아복고와 수령들을 잡아
낙양으로 끌고갔다. 이 공으로 하동현남에 봉해졌다. 구당서 설인귀 열전
위대가는 처음에는 좌천우비신이 되었다가 영휘 년간(650년대 초)에 강하왕 도종이 처벌
받자 연좌되어 노룡부 과의로 좌천되었다. 장군 신문릉이 병사를 이끌고 고려를
쳤는데 토호진수에 이르렀을 때 고려가 이를 습격하여 패배하였다. 구당서 위정전
노룡부는 북경과 산해관 사이에 위치한 지방 군사조직이며 토호진수는 노합하에 해당합니다.
거란과 해에서도 일진일퇴는 계속되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계속되는 중,
묘하게도 해족의 친당파 수령 가도자, 거란족의 친당파 수령 이굴가가 같은 시기
에 죽고 동시에 거란과 해 모두 당에게 등을 돌리니 당은 이들을 공격하여
해왕 필제를 죽였고 거란왕 아복고도 포로로 잡아간다. 660년 5월의 일이었습니다.
650년대 내내 계속되었던 각축전은 거란왕 아복고, 해왕 필제등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작용
하던 세력들이 당에 패배한 것이니 적봉진과 같은 거점이 함락되어 내몽골이나 요서
에서 고구려의 세력이 축소되거나 철수하였다고 보기도 하며, 혹자는 2차 고구려-
당전쟁 때 거란과 철륵이 고구려에 우호적으로 작용한 점, 2차 고구려-당전쟁 대승,
연씨 가문 휘하 거란의 정황으로 보아 고구려의 주도권이 강화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고구려와 당은 북방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으니 거란 돌궐 해 말갈 위구르에 이르기
까지 북방 민족이 포함된 수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었고.... 싸움은 이전의 1차 고구려-
당전쟁과 부차적인 소모전의 연장선상이었으며 그 다음 이어지는 2차적인 대전의 서막이었습니다.
당나라는 패배의 설움으로 15년 동안 절치부심하였고 그 대전략과 연계된 가공할 만한 일격이 아직
남아있었으니..... 고종이 즉위하고 병부상서 임아상, 우무위대장군 소정방, 좌효위대장군 계필
하력 등에게 명하여 전후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구당서 고려전
고구려와 당나라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니 싸움은 660년에도 한창이었고 고구려의 무게
중심은 서북쪽에 쏠려있었는데 2달 뒤, 18만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니 고구려
를 협공할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13만 대군이 서해를 횡단하는 미증유의 대 상륙
작전이었으며 그후 귀환한 당의 주력군은 그대로 배 이상 증편되어 다시 서해를 건넙니다.
660~ 661년까지 고구려군은 주력군이 거의 백제 땅의 백제부흥군 전선에 투입되어 텅 비다시피
한 신라 북측을 공격하기도 했으나(칠중성 전투, 북한산성 전투) 성주들의 결사항전에, 날씨도
안 따라주고 곧 서쪽에서 당군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니 백제 쪽은 신경쓸 겨를이 없어집니다.
백제부흥운동이 기세를 더하던 시기이긴 했지만, 660년 겨울 당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발표하고 병모를
모집하기 시작하니 최종적으로 동원한 규모는 대략 35개군. 각각 도행군의 진격로는 미상이나
대체적으로 소사업과 정명진이 이끄는 부대는 육로, 소정방 부대는 해로로 전진한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외에 임아상, 방효태가 지휘하는 부대도 해로 쪽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글필하력이 지휘한 요동도행군의 진격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었으나 해로를 통해 압록강으로 침공했다는 가설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아울러 당나라에 숙위하던 김인문을 귀국시켜 막 즉위한 문무왕에게 고구려 공격 사실을 알리고
출병을 요구하자 신라는 문무왕이 직접 남천주로 나아가 옹산성과 우술성 일대의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 웅현성을 축성하면서 웅진성에 주둔하던 당 장수 유인원과 연결선을
다시 이은 후 주력군을 차출해 북벌군을 편성하면서 고구려 일대의 전황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요동도행군 글필하력, 평양도행군 소정방, 패강도행군 임아상, 부여도행군 소사업,
누방도행군 정명진, 옥저도행군 방효태로 주요 지휘관이 결정되었고 여기에
더해 함자도, 압록도, 낙랑도, 장잠도 등에도 동급의 지휘관이 편성되었습니다.
전 병력은 35군으로 편제되는데 1개군 = 최소 5,000명이라는《당육전》의 기록을 생각하면
35개 군은 약 17만 5천, 특수 임무를 맡은 군의 경우 규모가 확대된다는 점을 생각
하면 20만 내외가 하한선이 되겠지만, 백제 원정군 14군의 규모와 편제로 볼 때
고구려 원정군의 진용과 35군의 숫자에 들어맞는 병력 수는 35만 정도로 보입니다.
정확한 수치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편제 규모로 볼때 당나라 역사상 고구려를 상대로 한 것
이상의 규모의 원정대는 없다시피한데 더욱이 주 공격로가 해상로를 이용하는
것이라무작정 많이 보냈다가는 전력이 제대로 전개되어 보기도 전에 몰살될
수도 있으니 상륙 작전은 고금을 통틀어서 공격자 입장에선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661년 7월 이 달에 소장군(蘇將軍)과 돌궐(突厥)의 왕자(王子) 계필가력(契苾加力)들이 수륙양로
로 가서 고구려의 성밑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당의 소정방과 돌궐의 계필가력이 고구려를 침
가장 먼저 고구려 영내에 진입한 것은 소정방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었으니 661년 8월, 소정방
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은 황해를 건너 패수에 상륙하였고, 격렬하게 항전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한후 평양 근교 마읍산에 진을 치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성을 시작하니 마치
1차 고구려-수 전쟁 때의 평양성 전투 및 1년전 백제를 무너뜨릴 때와 똑같은 패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비성과 웅진성등 백제 때와는 달리 평양성은 함락이 쉽지 않았으니 평양성
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었고, 오랜 공성전을 경험한 유서
깊은 성이었으며,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였기에 소정방군 단독으로
이를 공략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로인해 장기전으로 이어집니다.
거기다 서북에서 튀르크계 철륵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남하하던 글필하력군, 소사업군이 귀환하자
당의 작전은 제대로 꼬여버렸으며 거기다 고구려군이 후방을 차단시켜 보급로가 끊기게 되니
완전히 고립되어 식량 부족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당 고종이 급히 보낸 사신으로 부터 10월 말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라군은 쌀 4,000석, 조 22,000석을 준비해 북벌군을 북상시키기 시작합니다.
한편 소정방군은 적진 깊숙히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보급이 거의 없었으므로 식량 부족을 호소
하면서도 겨울이 다가오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총 공세를 시도하나 고구려군의 반격에
의해 오히려 궤멸당할 위기에 몰리게 되고 결국엔 퇴각로까지 차단될 위기까지 오는데
때마침 662년 2월 6일에 도착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의 군량미로 밥을 지어먹고 퇴각합니다.
12월에 고구려가“이번 12월에 고려국[高麗國]은 몹시 추워 패강(浿江)이 얼었습니다. 당군
(唐軍)은 운차(雲車), 충붕(衝輣)을 끌고 북과 징을 울리며 진격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군사는 용감하고 웅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당(唐)의 두 보루를 빼앗았습니다.
다만 두 진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의 군사가 무릎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날카로움이 둔하여지고 힘이 빠져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후회막급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석도현(釋道顯)이
말하였다. 김춘추(金春秋)의 뜻은 본래 고구려를 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먼저 백제를 쳤다. 근자에
백제가 침공당해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일본서기》 권 27 고구려가 당을 물리쳤다고 알림
'겨울에 패수(대동강)가 얼어붙자 당군이 공성 무기를 동원해 공격을 해왔지만, 이를 물리
치고 오히려 당군의 진지를 2개 빼앗았다. 남은 요새 2개를 뺏기 위해 밤에 공격하였고,
이 공격에 당군의 사기가 매우 저하되었으나, 고구려군의 힘이 부족해 요새를 점령
하는데는 결국 실패했다. 빼앗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글필하력이 지휘하는 요동도행군이 압록강 하구로 침입해 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상대로 맞서게 하였고, 글필하력과 압록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나
겨울이 되어 압록강이 얼어붙자 도하, 고구려군 30,000여명을 사살 또는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중국 서북 지역에서 철륵이 반란을 일으키고, 설인귀의 지휘아래 진압하던 당군은 설인귀가
무리한 추격전을 벌이다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하는등 상황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육상으로 전진하던 당군을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리고 만다. “구당서”글필하력전에 따르면
글필하력의 철수는 확실히 이 때문이었으며, 소사업의 철수도 이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철륵의 반란으로 인한 요동도행군의 철수로 전쟁의 승기는 고구려에게로 기울었으니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대동강 인근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는 옥저도행군(총관
방효태)은 사수(합정강 부근)까지 전진해 왔다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과 교전해 대패하고 전군이 몰살당하며 총관 방효태도 사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때 사수 전투의 전개 과정에 대해 삼국사절요를 보면 방효태 부대는 초전에 패해 포위망에
갇혀 버리고 이후 필사적으로 돌격한 당군을 섬멸하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데 방효태의 13명의 아들들도 모두 전사했으니 이 전투의 결과 소정방군은 평양성
인근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겨울에 이루어진 대공세로도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만 군량이 떨어지니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신라는 당 고종의 요구에 따라 고구려 정벌을 위한 북벌군을 준비하였고, 신라 최고의 권력자이자
지휘관인 김유신이 지휘하기로 결정하는등 성의를 보였으나, 정작 당군이 고구려로 쳐들어갈
때는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고구려 땅은 밟아보지도 않고, 대전에서 백제 부흥군 점령하
의 옹산성, 우술성 2개 성을 점령하고 웅현성을 쌓다가 문무왕은 그냥 서라벌로 돌아가 버립니다.
당시 왜국은 인질로 와있던 의자왕의 동생(아들?) 풍왕자에게 5천 왜군을 주어 한반도로
나와 백제 왕위를 이은후 백제 부흥군과 웅진을 노렸기 때문에, 신라는 기세등등한
백제 부흥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으니 함부로 군대를 평양까지 움직일수
없었고, 7세기 신라의 제1 목표는 줄곧 백제였기 때문에, 백제가 반쯤 공략된
상황에서 고구려 공격은 당나라의 희망 사항이므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10월 말엽, 소정방군이 평양 인근에서 고립되자 당 고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소정방군
의 구원을 다시금 독촉하였고, 특히 식량을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소정방군은
평양성으로 직공했으니, 요동 루트로 들어가던 다른 당군이 철륵의 반란으로
철수하거나 격퇴당해 홀로 남겨진 소정방군은 보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 상황이었습니다.
한겨울인 662년 1월, 김유신이 인솔한 신라군 보급대는 임진강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으니
출발할 때는 수레 2,000여대를 동원했지만 혹독한 추위 속에 수레를 버리고 소와 말에
식량을 실어야 했고, 신라군의 북진을 막기 위한 고구려군의 저지가 있었지만
힘겹게 뚫고, 2월초 평양 근처까지 도달한 신라군은 당군과 협공으로 마지막
저지선을 뚫는데 성공해 소정방군에 식량과 각종 의료 물품을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소정방군이 철수하고 신라군도 귀환을 시작하자 고구려군은 신라군 섬멸을 위해 추격해 왔지만 신라군
의 역습에 의해 10,0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으며 신라군은 귀환하는데... 하지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크니 포로가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였기 때문으로, 소형은 관등 10위에 병력은 100명
인 당주(幢主)이기 때문에 오늘날로 치면 대위 한명이 1개 사단을 이끈 꼴이니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나라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통한 국력고갈, 인접국 공략을 통한 고구려의 고립을 시도하여
성과를 거두었으며 육상에서 고구려의 강한 군사력을 회피한 평양 직공으로 결정타를 노렸는데,
650년대 고구려는 전장을 초원지대로 옮김으로써 소모전의 효과를 경감하였고, 백제 부흥군과
왜는 고구려 남쪽의 신라군을, 거란과 해, 철륵은 고구려 북쪽의 당나라군의 전력을 반감시켰습니다.
당나라가 이 전쟁에서 잃은 장수들은 650년대에 제국의 국방을 책임지던 인사들이었으니
임아상은 서돌궐 평정으로 이름을 쌓아 병부상서의 지위에 오른 군부의 수장
이었으며, 방효태, 정명진 역시 당나라의 국방을 맡아 책임지던 장수들이었으니
당군의 피해를 종합하면 6개 도행군중 1개 도행군이 지휘부와 함께 몰살당하고,
2개 도행군은 지휘부가 전쟁중 사망했였으며 도행군은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 당 건국후 정국을 지배하던 무천진 관롱집단은 정치적 지배권을 상당수 잃었으며 중소 지주층
과 손잡은 측천무후와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실권을 상실하는데, 이러한 당 내의
정치 투쟁이 진행되면서 방어할 힘이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를 재침공할 엄두가
안나게된 당은 고구려에 대한 소모전까지도 자제하며 백제 방면의 웅진 도독부에서도 철수합니다.
2년전 풍왕자에게 5천 왜군을 주어 의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했던 왜국은 수도를
나라 아스카에서 규슈 후쿠오카로 옮기고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려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대장간을 세워 칼과 화살등 무기를 제조하며 농사를 독려해 농가에서 쌀을
강제로 징수해 군량을 확보한후 663년 2만 7천 왜군을 1천척 배에 태워 한반도로
보냈으나 금강 하구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을 받아 대패하고 일본으로 철수 합니다.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로서도 마냥 기뻐하기는 힘든 상황이었으니 북방 내몽골 초원지대의
지배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남방도 신라군을 견제했던 백제부흥군과 왜군이 일본으로 패주
했으니 고구려는 신라군의 공격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으니 이제 전쟁확대를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게다가 당나라의 봉선 의식에 태자를 보내는등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저자세로 친선
의사를 표하니 백제가 망하고 나서야 당나라에 굴복을 한 것인데 신라 보급부대의
돌파를 막지 못한 점, 또 귀환하는 신라군을 제대로 추격하지 못한 점 등은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지쳤으니 이제 힘이 빠졌다는 징후로 볼수 있으니 그럼 한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대당 2차 전쟁 이후에 대막리지로써 고구려의 실권을 쥐고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뒤를 이어 장남
인 연남생이 태대막리지의 지위에 올랐는데...... 연개소문은 유능했으며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차례 승리하였으나, 뒤를 이은 남생에 대해 두 동생 남건, 남산이 형의 지위를 탐하여 서로
간에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무력 행사로 사태가 확대되면서 고구려 안에서 내전이 벌어집니다.
연개소문의 장남인 태대막리지 연남생은 자신의 지위를 탐내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에 쫓겨 평양성
을 나와 국내성을 근거지로 삼아 대항하다가 힘이 부치자 급기야 당에게 혼자도 아니고
국내성을 비롯한 성 6개와 10만호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하여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인 666년 12월에 3형제의 삼촌이자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고구려 남부
12개 성 763호의 주민 3,543명을 들어 신라에 바치고 투항하니 12성 중에 8성은
성과 주민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기에 신라 조정은 군대를 보내 지키게 하는 한편
연정토와 막료 24명에게 재물과 주택을 내려 신라 수도와 지방에서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667년 신라 조정은 연정토와 원기(元器)를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고구려 침공에 대해 당나라
조정과 의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니 원기는 귀국하였으나, 연정토는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 남는 것을 선택했는데... 조카 연남생이나 연남산이
당나라 항복 후 당나라에서 잘 대우 받았던걸 보면 그럭저럭 천수를 누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내부에서 부터 사분 오열되고 있었던
것인데 속일본기의 한 기록을 보아 이 당시 고구려가 일본에 군사지원을 요청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이니 고구려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666년 정월, 10월,
그리고 말 그대로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668년 7월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고구려에는 일본과 연줄이 있는 백제의 왕자(왕) 부여풍이 망명해 있었고, 일본은 663년 백제부흥군
의 백강 전투에 지원군으로 대군을 보낸 전례도 있으므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한것인데, 다만
일본은 백제부흥군이 몰락한후 신라에 우호적인 태도로 전환해 한반도 개입을 그만두고 혹시
모를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성을 쌓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중이었으므로 고구려를 돕지 않았습니다.
당고종은 고구려가 내부에서 혼란에 빠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666년 12월 이세적과
글필하력, 설인귀 등을 총관에 임명하고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침공했으니 이들은
당 태종과 함께 전쟁을 수행한 명장들이었고, 고구려와 오랜 전쟁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장수들이었으며 또한 측천무후와의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공신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남생의 배신으로 고구려 내부의 정보와 기밀이 당으로 새어나갔고 연남생이 바친 고구려
영토 성 6개에 10만호(?)가 고스란히 당나라의 보급 기지가 되면서 전황은 당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니, 여태껏 당군은 고구려를 칠때 항상 보급 문제로 골치가
아팠는데 그게 연남생의 항복으로 고구려 성들에서 조달받으니 저절로 해결된 것 입니다.
667년 봄에 이세적을 총지휘관으로 한 당나라의 대병력이 연남생의 고구려군을 길잡이로
내세워 고구려로 진격했으니... 667년 2월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대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했는데 요동 방어선 북방의 최고 요충지인 신성은 수십만 당나라 군대에
맞서 가을까지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9월 “사부구”라는 자가 신성 성주를 묶어서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함락당했으며 신성 주변의 16개 성 역시 당군에게 격파당합니다.
사부구를 생각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백제 웅진방령(성주) 예식인데 의자왕은 부여성이 함락
되기 전에 웅진성으로 달아났는데 불과 닷새만에 항복하니,‘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는 “18일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이 거느린 군대와 함께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하였다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 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라고 기록 했습니다.
‘구당서(舊唐書)’ 소정방 열전에 “其大將禰植 又將義慈來降” 이라는 기록에 주목하면 ‘그 대장인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고 번역하여 의자왕의 항복이 웅진성의 대장 “예식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그러나 이 기록을‘그 대장 예식과 또한 장차 의자왕이 와서 항복했다’ 고 번역
하여 의자왕의 항복은 웅진성주 예식과는 관계 없이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보는 학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의자왕의 항복이 자발적인 것이라면 신하인 예식 다음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니 ‘삼국사기’ 의 기록
처럼 의자왕과 태자, 웅진방령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야 마땅한 것으로역사 기록에 신하가
왕의 앞에 온다는 것은 반드시 합당한 사유가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했지만, 얼마 전까지도
학계에서는 기왕의 선입견대로 ‘의자왕의 항복은 예식이 웅진성에서 거느리고 와서 항복한
것이 아니라, 의자왕이 예식과 함께 와서 항복한 것’ 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2007년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백제인 예식의 묘지명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예식은 백제에서 대대로 좌평
을 지낸 예씨집안 출신으로 당군에 투항해 출세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2010년 봄 시안시
남쪽 근교에서 예식의 아들인 예소사, 손자인 예인수, 형인 예군의 묘지명이 잇달아 발굴 되었습니다.
이들 예씨 일족의 묘지명에 대한 분석 결과, 백제 멸망은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이 자발적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예식의 배반에 의한 것임이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는데 특히 예식의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에 ‘有唐受命東討不庭 即引其王歸義于高宗皇帝 由是拜左威衛大將軍
封來遠郡開國公’ 라는 기록이 있으니 “당제국의 명을 받아 동쪽(백제)을 토벌할때
(백제왕이) 조정(사비도성)에 있지 않으므로 그 왕(의자왕)을 끌고 가서 고종황제에게 귀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좌위위 대장군에 제수되고 내원군 개국공에 봉해졌다’고 번역되니 이러한 묘지명의
기록은 예인수의 할아버지인 예식이 의자왕을 잡아다가 당군에 끌고 가서 바친 공으로 좌위위
대장군의 벼슬을 받고 내원군 개국공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니 ‘구당서’의 기록대로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사비성으로 와서 당군에 항복했다는 사실이 묘지명을 통해
확인된 것이니..... 한국 역사학계가 '자존심' 때문에 '틀리게 해석' 했던 것이니 "역사왜곡" 입니다.
묘지명에는 예식뿐만이 아니라 예군도 공모하여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군에 바쳤다는
사실이 예식의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과 예식의 형인 예군의 묘지명에 이와
같은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예식과 예군을 비롯한 예씨 집안은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군에 바친 공로로 당에 들어가서 출세가도를 달렸건 것입니다.
사비성에서 항복식을 거행한 후 신라는 의자왕을 바로 처형할 것을 요구했지만, 소정방은 포로
인 의자왕을 당 고종에게 끌고 가서 바칠 생각으로 처형하지 않았으니 목숨을 건진 의자왕
은 한달후 660년 9월 3일 1만 2,807명의 왕족, 귀족 및 백성들과 함께 당군의 포로가 되어
배를 타고 보름간의 항해를 거쳐 9월 18일 산동성 봉래에 도착해 육로로 2000여리
의 길을 따라 40여일간 걸어서 낙양에 도착해당 고종에게 포로로 바쳐지는 수모를 당합니다.
의자왕이 포로로 바쳐지는 장면은‘구당서’에는‘소정방이 백제왕 부여의자와 태자 등 58인을 측천문
에서 포로로 바치자 꾸짖고는 사면하였다’고 하고‘일본서기’기록은 낙양에 와있던 왜(倭) 사신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이 직접 현장에서 보고 남긴 것으로 ‘11월 1일 장군 소정방 등이 백제왕
이하 태자 융과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국변성 이하 37인등 50여명을 끌고가서 조당(朝堂)
에 바치고 서둘러 천자에게 끌고 가니 천자의 은칙으로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 라고 적었습니다.
660년 11월 1일 백제 원정을 마치고 개선한 소정방은 낙양성의 황궁 정문인 측천문으로 의자왕을
끌고가 고종과 측천무후에게 전리품으로 바치고 백제원정 결과를 보고했는데 전쟁포로는 대개
죄를 물어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나 의자왕과 백제 포로들은 당 고종이
죄를 물어 엄중히 꾸짖었지만 모두 사면하였으니 여기에는 소정방의 노력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곧 죽었으니 사비도성이 함락되고 웅진성으로 피란했다가 사로잡혀 끌려오는 과정에서
겪었을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며 이미 60대를 넘어선 고령의 몸으로 바닷길
과 육로로 두달여에 걸쳐 당으로 끌려오는 동안에 피로가 누적되어서 생긴 병이 직접적 원인으로 봅니다.
의자왕이 죽은뒤 당 고종은 백제 신하들이 가서 곡을 할수 있도록 하였고, 낙양 북쪽의 망산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도 세워줬으니 의자왕은 오(吳)나라 마지막 군주인 손호와 남조 진(陳)
나라 마지막 군주인 진숙보의 무덤 곁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668년 당군의 침공에 대해 요하에 주둔했던 15만명의 고구려군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산
대전에서 초기에 고구려 대군이 고간이 이끄는 당군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철수하는 당군을 추격하는 도중 설인귀의 당군에 의해 측면을 공격당해서 고구려군
50,000명이 전사하게 되니 이로써 요동 방어선의 정예부대는 궤멸되었고 요동 방어선도 붕괴됩니다.
그 이후 고구려군 15만명이 말갈족 수만명을 끌어들여 남소성에서 항거하자 글필하력이
고구려군을 쳐서 10,000명을 죽이고, 그 기세를 타서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을 함락
시켰으니 이로써 요동 후방지역에 만들었던 천리장성 방어선도 붕괴되니 요동 방어선과
천리장성 방어선이 붕괴된 상황에서 고구려에게 남은건 압록강 방어선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등 요하 남부 지역의 요충지역이 있기에 당군이 그 쪽으로
공략을 한다면 얼마정도 버틸수 있겠으나, 문제는 요하 북부에 있는 부여성과 부여
줬으니 왜냐하면 이곳을 당나라가 점령하면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등 요충지를 굳이
점령하지 않고도 이곳으로 우회해서 압록강 방어선으로 진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668년 2월 이세적과 설인귀가 부여성을 기습공격해서 함락시켰고 이에 놀란 부여주에 딸린
40개 성이 전투 없이 당나라에 항복하니 압록강 방어선 이북의 마지막 요충지였던
부여주도 당나라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연남건은 부여성 탈환을 위해 50,000명의 병력
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000명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고
그후 당나라는 국내성에서 연남생의 군대와 만나 함께 압록강 방어선을 향해 내려옵니다.
마침내 당군은 한반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했고, 연남건은 압록책에서 당군의 진격을 1차적으로 저지
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 당군은 연남건의 저항을 물리치고 압록강을 건너서 대행성,
욕이성을 함락시켰으니 압록강 방어선도 뚫은 당군은 마침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포위하게 됩니다.
같은 해 신라도 문무왕과 김인문 등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 영토로 진격하기 시작했으니 삼국
사기 김인문 열전에 신라군의 규모는 20만명의 대군이었다고 하니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으로 부터 항복을 받으며 황해도 일대 고구려 남부 전선을 돌파해 평양 근교에
도달했으니 7월, 사천전투 등에서 고구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고구려군에 승리을 거두었습니다.
황해도의 한성 일대는 고구려가 육성한 제3의 수도권이자 평양성의 남부 방어선이었는데 후삼국시대
의 고구려 유민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일어나 고려를 건국했음을 생각하면 경제, 문화적
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알수 있는데 즉, 제2 수도권인 국내성 일대는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요충지인 요동 방위선은 돌파되었으며, 제3 수도권인 한성 일대는 신라에 항복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평양성은 양 팔을 잃어버린 신세나 다름없었으니 이렇게 평양 근교까지
다가온 신라군에 대해 연남건은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을 투입해 성문을 열고
평양성 동쪽 근교 사천 들판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김문영이 지휘
하는 신라군이 크게 승리하고 이어 남하한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합니다.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무너뜨렸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아래 이르고,
이적의 군대가 그 뒤를 이어서 평양을 포위한 것이 한달 남짓이었다.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수령 98인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며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맞이하였다.
9월 21일에 대군과 더불어 합쳐서 평양을 에워쌌다. 본득은 사천 싸움에서 공이 제일
이었고, 김상경은 사천 싸움에서 죽었는데 공이 제일이었다. 구율은 사천의 싸움
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나아가서 적과 더불어 싸워 크게 이겼지만, 군령
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갔기에 비록 공이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구기는 평양 남쪽 다리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선극은 평양성 대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고,
북거는 평양성 북문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박경한은 평양성 안에서 술탈을 죽여 공이 제일
이었고, 김둔산은 평양군영 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으며, 세활은 평양 소성싸움에서 공이 제일이었다.
연남건은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남건
은 군대의 일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은밀히 이적
에게 사람을 보내서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 뒤,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
를 풀어서 성에 올라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내를 불태웠다. 남건은 자해하였으나
죽지 않았으니 왕과 더불어 남건 등을 잡았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신라 본기
이후 한달동안 평양성을 포위한 나당연합군과 고구려 사이에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니
실제로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의 논공행상 기사에 의하면 평양소성(平壤小城), 평양성
대문, 북문, 평양 남쪽 다리(南橋) 등 여러 장소에서 격렬하게 전투가 벌어졌고 평양
군주 술탈(述脫)이 신라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 에게 죽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합니다.
한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당군에 항복했지만, 실권자인 연남건은 여전히 포기
하지않고 농성을 이어갔으니 결국 이적과 내통한 연남건의 심복 신성이 성문을 열었고, 당군은 평양성
을 완전히 함락시켰는데 연남건은 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이적은
10월에 보장왕과 연남건·연남산등 왕족과 귀족에 백성등 20여만명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중국인에게 고구려는 70년 전쟁을 거치며 공포스럽고 원망스러운 존재인데 마침내 당나라가 꺼우리(고구려)
를 멸망시켰으니..... 지금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다스릴 수가 있겠지만 훗날 변란
(안사의난등)이 일어나면 저 꺼우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고구려를 세울 것이니 그런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카르타고나 이스라엘인들 처럼...... 고구려인들을 모두 당나라로 잡아가니 장안까지 조리돌림을 합니다.
연도의 중국인들은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오랜 원한을 화풀이 했는데... 장안에서 일부는 노비로 주고
또 3만호(15만명)는 실크로드 오르도스에 추방했으며 또 일부는 전쟁에 참가한 거란족에 전리품
으로 주니 영주로 잡혀갔고, 나머지는 강남의 숲속에 처박아 농노로 부렸는데 훗날 중국이 혼란에
빠지니 그 일부가 남쪽으로 도망쳐 미얀마 국경에 라후족과 아카족에 이수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라가 차지한건 고구려의 면적과 인구에서 10분지 1에 불과한 황해도 뿐이라? 그후 잡아갈때 도주한
피란민이 남하하고 발해멸망후 일부 귀순하니 그럼 살아남은 고구려인의 20% 정도는 신라가
거두었나 봅니다. 성씨로 보면 오늘날 한국인 중에 고구려 후손은 진주 강씨등 3% 정도인가 합니다.
한국인은 2012년 5,000만에 성씨는 300개로 본을 구분하면 5,000개 정도 되는데, 일본의 118,000개 보다
숫자가 적은건 성이 없던 사람들이 남의 성씨를 도용했기 때문이며 또 특정 성씨에 편중된게 특이
하니.... 300개 중에 김,이,박 3씨가 2,060만으로 41% 를 차지하며 1억 2천 7백만 일본에서 1위 사토
(佐藤) 씨는 1.5% 인 189만 이지만 5,000개 성씨 중에 하나인 김해 김씨는 무려 8.9% 인 446만 입니다.
5,000개 성씨 중에 상위 30개 성씨는 2,640만으로 전체 인구의 53%를 차지하니 나머지 4,970개
성씨가 47% 를 차지할 만큼 특정 성씨에 편중되어 있는데... 그 중에 고구려계는 진주 강씨
97만에 신천 강씨 5만 3천, 횡성 고씨 1만, 익산 이씨 2천명 등이니 고려계인 평양 조씨 5만을
고구려계로 쳐도 3~4% 정도라고 여겨지는데... 30대 성씨 2,640만을 나누어 보면 신라계 62%,
가야계 17%, 고려계 9% 에.... 고구려, 백제, 제주 합쳐서 7% 이고 중국 귀화인이 5% 정도 입니다.
이 전쟁에서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오랜 세월동안 수~당제국의 숙적으로 지내던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애초 당태종과 김춘추 사이 약조와는 달리 신라
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백제의 영토는 물론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 했고, 결국 나당전쟁이
일어났으나 7년간의 전쟁 끝에 옛 백제와 고구려 수도권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요동으로 패퇴합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 후에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인 대조영(아버지는 성이 없고 이름은
걸걸중상 임)이 고구려 고토에서 군사를 일으켜 발해를 세웠고 발해가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
임을 밝혔으니 발해 건국으로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으로 얻은 영토를 거의 잃었으며 애초에
천하 통일을 목적으로 한 명분론적인 성격으로 일어난 전쟁인 만큼 전쟁의 당위성도 약했습니다.
그리고 돌궐, 토번 전쟁처럼 경제적 이권을 획득할수 있는 전쟁도 아니라서 투입 대비 산출이
안좋은 전쟁이었는데 결국 당나라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고구려에 국력을 쏟아부은
결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7년간 파병하느라 여진족의 흥기를 막지 못한 것처럼 토번
과 돌궐이 다시 발호하는 결과만 낳는등...... 당나라 입장에서도 이득이 적은 전쟁이었습니다.
다만 당나라 입장에서는 영토는 얻지 못했을지언정 만주의 심각한 안보적 위협은 사라졌다는데에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은 의의가 있을 것인데, 고구려는 당나라 주변 적대국들 중에서 영토도
상당하며 통치 체계가 문명화된, 문화적 역량을 갖춘 나라였으며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정주민족이기에 인구도 많은 편이었고 북방의 유목민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력도 강력한
나라였으니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중국도 불안한지라 화근의 불씨를 키우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