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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昭顯世子)는 광해군 4년, 1612년에 태어나, 인조 23년 1645년에 죽었다. 인조의 맏아들이며, 조선 17대 임금 효종(孝宗)의 형이다. 이름은 왕(汪), 어머니는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인조 3),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南道)의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사실은 피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해에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 보통 강빈이라고 부른다)과 혼인하였다. 그의 나이 15세이었다.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 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가례도감의궤'는 임금이나 세자, 세손의 혼사가 있을 때 가례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여 모든 일을 거행하게 하고, 그 기록을 책으로 엮어 훗날의 전거로 남긴 것이다. 국혼(國婚)을 거행함에 따른 전교(傳敎), 계사(啓辭), 문첩(文牒)과 경비(經費)의 수지(收支), 물수(物需)의 실입(實入) 등을 빠짐없이 적고, 국혼의 모든 절차를 기록함과 함께 채색한 행렬도를 곁들이고 있어 궁중혼속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그 가운데 상의원(尙衣院)에서 옷을 만들어 진상한 기록은 옷의 종류와 옷감의 내역을 자세히 밝히고 있어 당시의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졍묘호란(丁卯胡亂) 때인 인조 5년 (1627) 1월, 만 15세의 소현세자는 분조(分朝 ..임시정부)를 이끌고 전주로 향했다. 능한산성(凌漢山城)이 함락되자 仁祖는 강화도로 파천하면서 소현세자를 전주로 보낸 것이다. 정묘약조 체결 후 상경한 소현세자는 그해 11월 강석기(姜碩期)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해 12월4일 인조는 숭정전(崇政殿)에 나가 세자빈 책봉례를 행하였다. 긴 악연의 시작이다.
현재 남아 있는 '가례도감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소현세자 가례 때의 것으로 옷을 태반이나 줄였다는 기록이 옷가지별로 적혀 있는데, 그것은 가례를 거행하기 직전에 있은 '사치금령(奢侈禁令).1627년 '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조치는 아들 소현세자에 대한 아버지 인조(仁祖)의 피해망상에 의한 치사한 것이었다.
하여튼 이것을 계기로 의궤의 기록이 정비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후의 탁지정례(度支定例)와 '국혼정례'는 소현세자 이래의 의궤를 거의 그대로 다시 기록하여 그때까지의 전례를 정식화하고 있다. 현재 규장각 도서에 1627년(인조 5)부터 1906년의 279년 동안에 있었던 국혼 중 20건의 기록 29책이 있다.
정략결혼 政略結婚
광해군(光海君)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내쫓고 왕이 된 仁祖, 그는 서인(西人)의 도움으로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인조(인조)와 그의 부인 인열왕후는 남인(南人)출신으로 며느리를 간택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西人들의 심한 반대를 무릎쓰고 1625년 남인 출신, 윤의립의 딸을 간택하였다. 그러나 서인세력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인조를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인조는 드디어 윤의립의 딸과의 혼인을 파혼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세자빈의 간택은 2년간 연기되었으며, 결국 1627년 西人 명문의 우의정 출신 강석기(姜碩期)의 딸, 강씨를 간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17세이었다. 강빈(姜嬪)이다.
정묘호란 丁卯胡亂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後金)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仁祖)가 '향명배금 (向明排金)' 정책을 표방하고, 요동지방을 수복하려는 무문룡(毛文龍)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假島)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므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棧黨)들이 광해군(光海君)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공격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1627년 1월,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청천강을 넘었다. 그들은 ' 전왕(前王) 광해군(光海君)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 '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평양을 점령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대항하였으나 패퇴를 거듭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仁祖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였다.
이후 조선의 의병활동으로 보급로가 차단된 후금은 강화를 제의하였고, 강홍립의 중재로 후금은 정묘조약을 맺고 철군하였다. 정묘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으며, 조공을 할것, 명과 후금에 대해 조선은 중립을 지킬 것,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낼것 등이다.
우리 역사의 비극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함께 왕세자이었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비극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만은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바로 우리 역사의 비극이기도 하였다. 소현세자는 비록 자신이 스스로 개척한 운명은 아니었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당시 조선 지배층 가운데 보기 드물게 열린 눈과 앞선 생각을 지니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급변하는 극동 아시아 정세에 눈뜨고 지구 반대편의 서양 문물까지 받아들였다. 당시 지배층이 신봉하는 성리학말고도 다른 가치와 이념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일찌감치 자주적 근대화를 준비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하였고 (3년상을 1년상으로 축소 하는 등등), 무덤 역시 ' 원(園) '으로 부르지 않고, ' 묘 (墓) "로 명명하여 소현묘(昭顯墓)라고 했다. 아버지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소현세자의 묘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능원이 원래 '소현묘'라고 불렸으나, 대한제국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있다.
소경원은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인도처럼 서삼릉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현재는 사유지라 함부로 출입할 수도 없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사전 허락을 받고 안내인의 인도를 받아 참관할 수 있다. 소셩원은 원(院)의 형식으로 문인석과 석마(石馬)만을 배치하였고, 석양(石羊) 및 석호(石虎)도 왕릉보다 간소화하였으며,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다. 제향을 지내는 정자각은 6.25 한국전쟁에 소실되었으나 현재 복원되지 않았다.
소현세자예장도감의궤 소현세자禮葬都監儀軌
유교국가이었던 조선시대에서 국가적인 행사 중 가장 중요하고 큰 행사는 아마 왕실의 장례일 것이다. 그 중 왕의 장례절차에는 새로운 국왕의 즉위도 포함되어 있어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하였다. 조선 숙종 때 대비의 복식에 관한 南人과 西人의 예송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절차 하나하나가 첨예한 정치적 행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태상왕, 태상왕비, 왕, 왕비 등의 국장(國葬)에 관한 제반 이식 절차를 기록한 책이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이고, 이밖에왕세자, 세자빈의 예장(禮葬) 때 기록이 예장도감의궤(禮葬都監儀軌)이다. 국내에 현존하고 있는 국장도감의궤는 총 29종이며, 1608년 선조의 국장에 관한 기록이 최초이다.
소현세자의 일기를 통해 본 세자의 삶은 생각보다 많이 불행하였다. 아버지 인조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뒤 갑작스럽게 세자에 책봉되면서부터 그는 크고 작은 고초를 끊임없이 겪었다. 중국선양에 인질로 끌려간 그는 청나라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었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몸과 마음에 큰 병을 얻었다. 볼모살이를 견디고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아버지 인조는 그를 왕위를 노리는 적(敵)으로 오해하였다.
소현세자 동궁일기는 소현동궁일기 (1625~1636. 12책), 소현분조일기 (1627년. 4책), 심양일기(瀋陽日記. 1637~1644. 8책), (을유) 동궁일기 (1645. 1책)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일기는 세자의 교육 담당 관서인 시강원(侍講院) 관리들이 매일 작성하였다. 소현제사의 성장, 교육, 궁중생활, 의례 등 왕세자 책봉부터 사망 때까지 일들이 일기 안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이 동궁일기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인조가 세자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기존의 ' 독살설 '이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소현세자는 왕세자로 책봉된 뒤 병자호란(1636년)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왔으나, 아버지 仁祖의 냉대 속에 급사한 비운의 왕자로 그동안 독살설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일기에는 건강하였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면서 화병등 각종 질병에 시달린 끝에 스크레스로 인한 학질로 숨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여튼 100% 학질로 인한 병사(病死)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일기 속 각종 처방 기록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世子의 日課
세자의 하루는 새벽 3~4시 (寅時), 닭이 울면 의관을 정제한 뒤 대전(大殿) 등에 문안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고, 저녁 9~10시 (亥時)에 잠자리 문안으로 끝을 맺는다. 아침 저녁으로 국왕의 수랏상을 살피는 시선과 부모의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도 세자의 몫이다.
오전 6~8시 아침 공부 (朝講), 오후 3~5시 (夕講)가 기본이었고, 나머지는 이를 복습하는 낮과 밤의 보충수업이 이루어진다. 교육은 매우 엄격해서 영의정 오윤겸(오윤겸)과 좌의정 김류(김류) 등 당대 최고 지식인 집단과 논술시험(회강례. 會講禮)을 치룬다. 좌의정이 ' 얼마나 복습하였느냐 ? '고 묻고, 소현세자는 ' 새로 배운 것은 30번, 전에 배운 것은 20번 읽었습니다 '라고 대답한 대목이 있다. 이때 영의정 오윤겸은 저하(邸下 ..세자)께서는 문안과 시선 말고는 다른 하실 일이 없으실 터이니 새로 배운 것은 60번, 전에 배운 것은 40번 읽으셔야 합니다 ...라고 질책한다. 일기 내용으로 볼 때 소현세자는 하루에 3쪽 600자 정도의 분량을 배웠다.
당시 세자의 성적은 ' 수-우-미-양-가 ' 격인 순(純) - 통(通) - 략(略) - 조(粗) - 불(不)의 5등급으로 평가되는데, 소현세자의 성적에는 순(純)과 불(不)이 없다. 세자의 학습능력에 대한 언급에 비추어보면 대략 '략(略) ' 수준으로 보인다. 스승과의 대화에서 세자가 자신의 학습평가를 '略'으로 올릴 것을 주문한 기록도 있다. 중국 송나라 역사서인 통감절요(通鑑節要)를 소현세자는 9년 동안 594회나 공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통감절요를 이처럼 오랫동안 공부할 정도이면 학습 능력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동궁일기의 주요 내용
이 일기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시강원(侍講院) 관리들이 기록한 것으로, 세자의 성장과 교육, 궁중생활, 정치, 궁중예식, 한의학, 천문, 기상 등의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일기에 따르면, 건강하였던소현세자는 중국 청나라 선양(瀋陽)에서 볼모생활을 한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학질로 숨지게 되었으며, 당시 세자의 질병과 치료법, 약제에 관한 기록이 많이 담겨 있다.
세자가 정기 강의시간인 법강에는 경전을 공부하고 역사서나 사상서을 배우는 등 세자교육법에 관한기록도 풍부하며, 임진왜란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광해군 분조(分朝 ..임시 정부)에 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조정(大朝)를 이끌고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가 분조(分朝)와 함께 전라도 전주로 피란한 이후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어, 16살 소현세자가 조정을 반으로 나눈 임시 권력을 활용, 청나라에 대한 방어전략을 엿볼 수 있다.
東宮日記 , 소현세자의 삶
소현세자가 평온했던 시기는 세자 책봉(1625년) 이후부터 병자호란(1636년) 전까지 10여 년 동안이었다. 이 때에도 세자의 일상은 오로지 아버지 仁祖에 대한 問安 인사와 서연(書筵 .. 학자들이 왕세자에게 학문을 강론하는 것), 궁중 예식을 따르는 것으로 채워졌다.
중국 선양에서 세자는 청 태종의 명에 따라 사냥에 따라나서야 했고, 명나라와의 전쟁에 출전하여야 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현안을 조율하기도 했다. 청나라는 툭하면 트집을 잡아 조선과 소현세자를 질책하였고, 그때마다 세자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태를 무마하였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 10월 2일의 일기에는 청나라의 억지에 소현세자가 수모를 감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청나라 조정의 조선 책임자인 용골대(龍骨大)는 인조가 청 태종에게 보낸 홍시를 세자가 전달한 것은 잘못이라고 추궁하였다. 용골대는 ' 대국(청)과 소국(조선)이 부자(父子)의 나라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조선)이 새로 난 과일을 보고서도 아버지(청)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그 아들(세자)에게 보낸단 말입니까 '라고 따져 물었다. 仁祖가 홍시를 직접 가져왔어야 했다는 트집이었다.
1638년 1월1일의 일기에는 패전국의 설움을 엿볼 수 있다. 소현세자는 정월 초하루 아침 청 태종의 새해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비슷한 처지의 명나라 장수 장춘(張春)을 찾아갔다. 장춘은 당시 74살 노인으로 1631년 後金(청나라의 전신)과의 전투에서 사로잡혀 자결하려 했지만 기개가 남달라 청나라의 사면을 받은 인물이다. 이 날 저녁에 청 대궐에서 베푼 새해맞이 축하잔치에서 조선의 여악(女樂)과 배우들이 노래와 춤을 선보이자 세자는등골이 서늘해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못했다. 여악 무리 중에는 눈물을 닦으며 노래하는 자들도 있었다.
독살설은 근거 없는 듯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청나라로부터 사면을 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동궁일기는 세자가 1645년 2월 17일 경기도 벽제에 도착한 날로부터 같은해 4월 26일 70일 만에 세상을 뜨기까지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8년 만에 귀국한 세자는 불운하였다. 청나라는 교묘한 외교술로 소현세자를 친청파(親淸派) 인물로 보이게 하였다. 세자 귀국 전 仁祖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씨는 ' 청나라가 世子 대신 仁祖를 인질로 불러들이려 한다 '고 모함하였다. 이에 인조는 선양관에 밀정을 보내 세자를 감시했다.
아들을 의심한 인조는 냉정하였다. 귀국한세자가 君臣의 예를 보이려 하자, 이를 막았다. 세자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지만 인조는 1년으로 줄이자고 제안했고, 세자의 장남대신 동생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다. 후일 효종이다. 소현세자의 묘호도 원(園)이 아니라 그냥 묘(墓)로 불렀다. 일부 사학계에서는 이러한 냉대를 근거로 세자가 독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동궁일기에서는 세자가 학질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선양에서 잔병 치레가 심하였던 세자는 학질 증세를 보이던 중, 한 겨울에 귀국길에 오르면서 협통(겨드랑이 통증)과 복통, 현기증, 고열에 더욱 시달렸다. 여독과 아버지 仁祖에 대한 실망감까지 겹쳐 결국 쓰러졌다는 것이다. 1645년 3월 4일, 청나라 칙사의 전별자리에서 칙사는 세자의 병세를 여러 번 물으면서 걱정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가 아버지 안조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문은 여전하다. 아버지 인조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6년 12월 13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인조에게 적병(청나라 군)이 안주(安州 .. 평안북도 안주군)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치욕의 병자호란을 겪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했고,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논의하는 단계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인 1636년 12월 14일, 적군이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니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부랴부랴 종묘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을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仁祖와 重臣들도 몽진(蒙塵 .. 임금의 피난) 길에 나섰다. 인조의 어가(御駕)가 광통교를 건너고 송현(松峴 .. 한국은행 앞 고개)를 지나 숭례문에 이를 즈음 급한 비보가 날아 왔다. 적군이 이미 양철평(良鐵坪 .. 녹번동과 불광동)까지 진격해 왔다는 것이다.
급보를 접한 임금 이하 중신들은 급히 강화도로 피난가려던 어가를 돌려 구리개(銅峴 .. 을지로) ~ 수구문(水溝門 .. 광희문) ~ 살곶이다리 ~ 신천 ~ 송파나루 ~ 개농(오금동)을 지나 남한산성 지화문(至和門)으로 들어섰다.
불과 9년 전인 1627년(인조 5)에 후금(後金, 이전의 청나라)에게 침공을 당하여 굴복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교훈삼지 못하고 또 다시 침공 당하여 피신하는 비참한 꼴을 보이게 되었고, 게다가 적군의 침공 보고를 받은 날 (12월 13일)인 바로 다음 날 (12월14일) 적군이 도성 외곽인 양철평( 지금의 녹번동과 불광동)에 이르도록 비상연락 체계도 가동하지 못했으니,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세력의 국가 운영 능력은 참으로 허술한 것이었다.
仁祖의 항복
이렇게 고립무원의 40여일을 버틴 후 결국은 항복의 예를 올려야 했는데, 이 때 인조가 나선 문이 남한산성의 서문 (우익문.右翼門)이다. 다시 인조가 지나간 문을 살펴보면 숭례문 ~ 수구문 ~ 지화문(남문) ~ 서문 (우익문)이 된다. 수구문(水溝門 혹은 水口門)이란 지금의 광희문(光熙門)인데, 일명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산 자가 다닐 수 있는 문과 죽은 자가 다닐 수 있는 문이 구분되어 있었다. 이 시구문은 장례를 지낼 시신이 나가는 문으로, 역질이 돌아 땅에 묻을 수 없는 시신들은 시구문 밖에 버려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 시구문 밖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10몇년 전만해도 점(占)집 등 신당(神堂)이 즐비하였다. 지금의 新堂洞이라는 지명도 사실은 神堂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문을 나섰으니 얼마나 조급하였으면 그리 하였겠는가. 조금만 돌면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을 돌아 영도교를 건너 임금의 체모는 지킬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이렇게 남한산성 지화문을 통해 황급히 피신하였던 인조는 서문을 통해 성을 나와 청태종에게 삼배고두(三拜叩頭)로 항복의 예을 올린다.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여기서 ' 삼배고두 '를 다시 살펴보자. 이유는 많은 야사들이 이 부분에서 비분강개하여 사실을 지나치게 각색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1637년 정축년) 1월 30일(경오날)의 기록을 보면, 인조는 시종 5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성을 나와 (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를 따라 말을 달려 삼전도에 이른 뒤 항복의 예를 올린다.
그 항복의 예의 내용을 보면, 용골대 오랑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 아래에 자리를 만들어 북쪽을 바라보고 인조에게 자리로 나아가게 해서 청나라 사람이 여창(礪唱 .. 호명하여 불러들임)케 하여 인조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였다..는 것이다.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礪唱, 上行三拜九叩頭禮
본래 임금은 북쪽에 자리하여 남쪽을 바라보며 남면(南面)하는 것이 원칙이다. 청태종은 南面하고 仁祖는 북면(北面)하였으니, 이미 신하의 위치이었고, 단 아래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였으니 신하로서 예을 올린 것이다. 흔히 野史에서 말하기를,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어 그 찧는 소리가 청태종에게 들리도록 하고 피가 낭자하여 어깨를 적셨다고 과장하고 있다. 실제로 삼배구고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
실록의 이 표현이 애매하여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은 것이라는오해를 가져왔다. 사실은 한 번 무릎을 꿇고 (궤. 궤), 세 번 머리를 땅에 닿도록 조아리는 (고. 叩) 예를 세 번 반복함으로써 극진한 신하의 예를 표했던 것이다. 그러니 실제 내용은 1궤 3고 × 3회 즉, 一궤三叩 × 三回..이었으며, 찧는 소리를 내지도, 피도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소현세자 스스로 人質이 되다
소현세자와 강빈(姜嬪)은 병자호란의 전운이 감돌던 인조 14년(1636) 3월, 원손(元孫)을 낳았고,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소현세자는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인조는 12월17일 홍서봉(洪瑞鳳 ... 전 좌의정)을 청나라 진영으로 보내 강화협상을 지시하면서 ' 먼저 전날의 실수를 사과함이 마땅하다 '고 말했다.
전날 능봉군 이칭(綾峯君 李稱)을 인조의 동생이라 속이고 강화의 대표로 보냈으나 사실이 탄로나 함께 갔던 무신 박난영(朴蘭英)이 청군에게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정묘호란 때도 원창군 이구 (原昌君 李玖)를 왕의 동생이라고 속여 후금군 진영에 보낸 적이 있었다. 청나라 장수가 ' 너의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번에는 진짜 왕제(王弟)인가 ? '라고 추궁한 결과 가짜임이 드러난 것이다.
청나라는 강화 대표로 세자를 요구하였는데, 인조는 전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보내면서 '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동궁(東宮 .. 세자)을 청한다 한들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 '라고 말했다. 인조실록은 ' 이때 세자가 상(上. 임금)의 곁에 있다가 오열을 참지 못해 문 밖으로 나갔다 '고 적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강화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었으나. 소현세자 자신이 비국(備局 ..비변사)에 봉서(封書)를 내려 결자해지(結者解之)하였다. 소현세자는 ............. 태산이 이미 새알 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의 운명을 누가 주춧돌처럼 굳건히 하겠는가 ?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 (인조실록 15년 1월22일) 라면서 인질을 자청하였다. 청나라가 육경(六卿 ..판서)의 아들까지 인질로 요구하자, 강화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여 인질을 피하려는 상황에서 나온 자기 희생의 결단이었다.
심양, 볼모생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대가는 혹독하였다. 청나라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 (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을 필두로 3정승 6판서의 자제들을 볼모로 잡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의 인솔아래 그들의 수도 심양(瀋陽)으로 데려갔다. 이듬해 2월6일 서울을 출발한 소현세자 일행은 같은 해 4월 10일에 심양에 도착하여 1645년 (인조 23년) 2월18일 서울에 귀국할 때까지 8년에 걸친 긴 볼모생활을 하였다.
삼전도 항복 5일 후, 이미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잡혀가기 전, 하직 인사를 하러 대궐로 돌아왔다. 이때 배웅하던 신하들이 모두 길가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한 신하가 말의 재갈을 당기며 울부짖자, 세자는 말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대로 있기도 하였다.
드디어 2월 8일,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는 청나라 태조의 14번 재 아들인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과 함께 멀고 먼 북방길을 떠났다. 그때 인조가 지금의 경기도 고양의 창릉(昌陵 ... 예종과 계비 인순왕후의 능) 서쪽까지 거동하여 전송하자, 구왕이 말했다. ' 멀리 오셔서 전송하니 실로 감사합니다 ' ... 인조는 '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따라가니 대왕께서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 .. 이어 구왕은 ' 세자의 연세가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마시기 바랍니다 '
소현세자는 1637년 정월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뒤, 화약의 조건에 의해 2월 8일 조선을 출발하여 4월에 심양에 도착한 뒤, 5월7일부터 새로 완성된 심양관(瀋陽館)에 머물렀다. 일행은 소현세자 부부 외에 동생인 봉림대군 부부, 시강원 관리를 중심으로한 수행 신하 등으로서, 수종(隨從)을 포함하면 모두 300명이 넘었다.
심양관 瀋陽館
위 사진은 소현세자 부부를 비롯한 조선의 인질들이 머물렀던 심양관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 그림은 영조가 할아버지 현종의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1760년 11월 동지사절단에 그려오게 한
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이다. 현종은 조선역사에서 유일하게 타국 땅 심양에서 태어난 왕으로,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아들이다.
해결사, 소현세자
소현세자가 심양(瀋陽)에 도착한 것은 1637년 4월이었다. 심양(瀋陽)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들,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웠다. 심양에서 이들은 새로 건축한 심양관소, 즉 심관(瀋館)에서 생활하였다. 심관(瀋館)은 양국간의 각종 연락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 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大使館)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심양 생활은 단조로운 고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무척 다양하고 바빴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 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또 뇌물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청나라와 의 무역이나 둔전(屯田) 경영에 차며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 포로(捕虜)를 구출해 내었다.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영리하고 사업 수완이 좋아 외교적인 문제는 소현세자가, 경제적인 문제는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청나라는 중국 통일의 야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 세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대(龍骨大)는 소현세자와 마음을 터 놓는 사이처럼 지냈다. 처음 심관(瀋館) 생활은 엄중한 감시와 제한 속에 보내야 했지만, 점차 청나라는 소현세자에게 각별하게 대우하였다. 몽고 각지의 행사에도 초대하였고, 정기적인 연회에도 소현세자 부부를 참석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지원병과 물자 요구가 있었고, 이를 조선에 보고해야 하는 소현세자의 입장은 항상 바늘방석이었다.
1644년 마침내 청나라는 북경(北京)을 차지하였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政帝)는 자살하였다. 더 이상 청나라는 조선의 왕세자를 인질(人質)로 묶어둘 이유가 없어졌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귀국할 수있었다. 중원(中原)을 차지한 청나라의 힘을 지켜 본 소현세자는 삼전도(三田渡)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仁祖)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소현세자, 일시 귀국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온 지 3년 째 되던 해, 인조 18년, 부사 이경헌과 서장관 신익전이 인조의 병환이 심각하니 소현세자를 일시 귀국시켜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인조의 三男 인평대군과 세자를 바꾸자고 요청했는데, 청나라는 이 제의에 대하여 소현세자의 장남인 원손 이석철도 인평대군과 함께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그만큼 청나라는 세자의 귀국을 두려워 했다. 이어 청나라는 구체적으로 인평대군과 元孫을 만주의 봉황서에서 세자와 맞바꾸자고 제안하였는데, 조선은 이를 거부할 처지가 아니었다.
송별연에서 일어난 일
청나라의 구왕 다이곤(九王 多爾袞)은 소현세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송별연을 열어 주었고, 인조 18년 2월12일에는 청나라 황제 태종도 직접 송별연을 열어 주었다. 이 자리에는 봉림대군도 함께 하였다. 그런데 태종을 만나기 전 뜰 안에서 용골대(龍骨大)가 세자에게 안장을 한 말과 대홍망룡의(大紅莽龍衣)를 주면서 입으라고 했다. 그러자 소현세자는 깜작 놀라면서 사양하였다. 이것은 국왕이 입는 장복(章服 .. 관직에 있는 사람의 官服)입니다. 대홍망룡의는 임금이 입는 옷이었다. 붉은 색 바탕에 임금을 뜻하는 龍이 수 놓여 있다.
용골대가 소현세자의 사양하는 뜻을 전하자, 청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세자는 '대홍망룡의'는 입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파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조선으로 연결되었다. 소현세자의 빈객 신득연(申得淵)이 이 상황을 자세히 적어 仁祖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인조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명나라가 자신을폐하고 광해군을 세우지 않을까 의심했던 것처럼, 청나라가 자신을폐하고 소현세자를 세우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 태종의 송별연 다음 날 드디어 심양을 떠나 꿈에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 인조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었으나, 인조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인조는 노정(路程) 밖에서 세자를 마중하겠다는 '세자시강원' 관원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의(御醫)를 보내자는 내의원의 주청도 거부하였다. 인조는 세자를 맞이하는 모든 의식을 페지시켜 버렸다. 심지어 ' 4년 만에 돌아오는 세자의 행차가 어떤 일인데, 이렇게 간략하게 한단 말입니까 '라고 호소하는 대간들의 청마저 거부하였다.
다만 인조 18년 3월 7일 서울에 도착한 세자가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자, 인조도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맞은 것이 유일한 환영이었다. 세자의 눈물이 기폭제가 되어 인조는 물론 대신들도 눈물을 흘려 저정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소현세자를 감시하러 따라온 청나라의 '오목도'가 이를 저지하자 인조가 설명했다.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으므로 저절로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의 눈물을 직접 대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의심이 부정(父情)을 녹인 것일까 ?
세자, 천주교를 만나다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北京)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친교를 맺으며 그로부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근 8년이나 외롭게 외국생활을 하였던 소현세자로서는 벽안(碧眼)의 외국인이 흥미롭기도 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식견(識見)이 놀랍기도 하였다.
아담 샬(위 사진)은 역대 중국에서 외국인으로는 가장 고위직(高位職)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중국 포교(布敎) 1세대인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1622년 중국으로 건너가 카톨릭 포교 활동에 힘쓰며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도 밝아 월식(월싱)을 예측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었다. 명나라 말기에 북방의 청(淸)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포(大砲)를 주조(鑄造)하기도 하였으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나라 세조(世祖)의 신임을 받아 천문(天文) 관측을 다망하는 흠처감(欽天監)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담 샬'의 지위로 인하여 소현세자는 천주당(天主堂)과 문연각에서 그를 자유로게 만날 수 있었다.
아담 샬도 소현세자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소현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을 알려 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이 때 소현세자가 아담 샬로 부터 받은 처주상(天主像), 지구의(地球儀), 천문서 등이었다. 소현세자는 천주상(天主像)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하였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소현세자는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의 과학 서적을 간해아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소현세자는 북경(北京)의 천주당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나라에서도 부족한 형편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宦官)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아버지 仁祖로부터 의심받는 소현세자의 심양관 생활
소현세자가 북경과 심양에서 청나라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익히며 양국간으y인을 해결하고 있을 때, 친명(親明) 존화의식에 빠진 조선의 조야에서는 소현세자를 탄핵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청나라와 조선 사이를 중재하려는 소현세자가 마치 삼전도의 치욕을 잊고, 친청주의자로 변신한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 세력은 세자의 행동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서, 갖가지 모략을 일삼고, 인조 또한 몽고 치하의 왕세자들처럼 청나라의 힘으로 자신을 폐하고 세자가 즉위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수시로 내관을 심양관으로 보내어 탐지하여 보고하도록 조치하였다.
소현세자 일행의 8년에 걸친 볼모생활,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꽤 자세히 알 수 있다. 그것은 소현세자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심양일기(심양일기)와 함께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시봉하던 시강원(侍講院)에서 본국 정부에 수없이 보낸 장계(壯啓)류를 묶은 삼양장계(瀋陽壯啓)라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심양장계 심양장계
심양장계(瀋陽壯桂)는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례를 갖춘 후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끌려가는 소현세자 일행을 전송하면서 시작된다. " 장계(壯啓)"란 지방에 파견된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말한다. 이 심양장계는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하면서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를 엮은 것이다.
이 책을 지은 이는 소현세자를 수행한 태자시강원(太子侍講院)의 신하들이다. 시강원은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한 관청으로,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함께 갔다. 이들은 본국의 승정원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조선이 겪은 치욕적인 대외교섭과 왕세자 일행의 하루하루 일상을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이 책은 당시 상황을 날짜별로 제목을 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보통 역사서처럼 딱딱하지 않고, 한편 한편을 드라마처럼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패전국 볼모의 처지로 청나라의 강압적인 요구에 시달리는 소현세자 일행의 안타까운 모습, 삼학사(三學士)로 알려진 윤집, 오달재의 처형 소식, 역관의 비리를 증언하였다가 오히려 용골대(龍骨大)와 역관의 모함을 받고 처형당하는 소현세자의 신하 정뇌경(鄭牢京)과 강효원(姜孝元) 등의 비참한 최후를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소현세자 일행의 수난뿐만 아니라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의 실상도 낱낱이 밝히고 있다. 또 삼전도(三田渡) 비문(碑文) 문구에서부터 조선에서 보내온 시녀들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문제로 고초를 겪는 소현세자 일행의 처지를 하루하루 낱낱이 기록하였다. 더불어 명, 청 교체시기의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 상황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특히 청나라 핵심군사제도인 팔기군(팔기군)의 정체와 청나라 사람들의 습속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청나라뿐만아니라 당시 몽골과 일본의 풍속까지 전하고 있어 17세기 동아시아를 현대에 전하는 역사서라고 할 만하다.
심양일기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등의 심양 체류 일기이다. 필사본 10책으로, 1637년 정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온 날로부터 1644년 8월18일, 즉 청나라 世祖가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 날에 세자 등을 거느리고 청나라 태종의 능(陵)에 참배할 때까지 7년 6개월의 기록이다.
이 책은 다른 일기와 마찬가지로 날짜 순으로 날씨, 서연(書筵 ..세자의 교육)을 비롯한 일상의 동정, 본국과의 연락, 수행한 신하들의 사정 등 소현세자 일행이 청나라에 거주하면서 겪은 갖가지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청나라로 세자를 수행한 관인들의 명단, 청나라에서 사냥 등의 여행에 세자를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 김신국(金藎國) 등 고위 관직자의 상소 등이 그 문건의 제목과 함께 실려 있기도 하다.
또한 세자가 심양관을 떠나 있을 시기에 대해서는 세자의 동정을 기록한 일기와 심양관의 사정을 기록한 일기 등 두 가지가 작성되어 나란히 실려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엽행일기(獵行日記), 엽행시관중일기(獵行時館中日記)와 같이 그 재목도 따로 붙였다.
심양일기의 주요 내용은, 1637년 윤집(尹集) 등 三學士의 처형에 관한 기록, 1638년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명나라 정벌을 수행한 것, 1639년 청나라의 군사력을 동원하라는 요구와 조선의 그에 대한 대응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1640년 임경업(林慶業)의 군대가 징발되어 청나라에 도착한 것과 그 이후 임경업의 탈출과 청나라에의 압송, 이후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 등의 압송과 석방, 1643년 청태종의 죽음, 1644년 청나라의 북경 천도 등이 실려 있다.
인조 22년(1644) 3월, 역졸(驛卒) 출신의 유적 (流賊)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총병(摠病) 오삼계(吳三桂)가 지키는 산해관의 병력이 명나라의 마지막 무력이었다.
명나라의 멸망
북경 함락의 소식을 들은 오삼계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동원하여 적(賊 ..이자성)을 토벌하자고 청한다. 이에 청나라 섭정왕 구왕(九王) 다이곤(多爾袞)은 ' 인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백성을 구원한다 '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명목은 연합군이었지만, 오삼계가 성을 나와 항복서를 바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청나라가 명나라를 흡수한 것이다. 그해 9월,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의 인질이 필요하지 않았다.
'요년석'의 유래
요년석은 요녀석의 변형된 말로 ' 요 + 녀석 '으로 분석된다. 여기서 '요'는 지시어인 '이'의 아어형(雅語形)이고, '녀석'은 사내아이를 귀엽게 일컬을 때, 또는 '어린 사내 아이'를 꾸짖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요년석"의 내력에 대하여, 조선조의 편년사(編年史) 중의 하나인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병자호란 당시의 소현세자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빙성에서는 다소 의문이 있지만 역사의 기록인 만큼 그 내력을 소개하면.....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은 그 조건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두 왕자는 인질로 청나라 당시의 수도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조선관에서 8년간이나 유폐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野使가 전하는 것이다.
청나라 황제가 8년간을 청나라에서 생활하다 돌아가는 두 왕자를 불러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가 사용하는 벼루돌인 용연(龍硯)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얻게 되었고, 봉림대군은 ' 나는 다만 나와 같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모든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만 바랄 뿐입니다 '라고 말하자, 청나라 황제가 '봉림대군은 큰 일을 할 사람 같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두 왕자가 귀국하여 인조를 뵈었을 때 인조가 왕자에게 ' 청나라에서 받은 선물이 무엇이냐 ? '고 봉림대군에게 먼저 묻자, 봉림대군이 말하기를 ' 저는 다만 저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백성들과 돌아오기를 간청하여 같이 왔을 분입니다 '라고 말하였고, 소현세자는 아뢰기를 ' 저는 청나라 황제가 가장 아끼는 용연(龍硯)을 얻어 욌습니다. '하면서 벼루를 인조에게 드리니,
인조는 하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한참 앉아 소현세자를 노려 보다가 ' 뭐야 ! 용연석 '하면서 벼루를 소현세자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이 때 벼루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맞아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귀국 후 두 달만에 소현세자는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어린 사내아이를 꾸짖는 말로 '용연석'하던 것이 점점 변하여 '요년석'으로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으나, 볼모라는 현실을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았던 여인, 존귀한 세자빈이라는 신분에 얽메이지 않고 조선 최초 여성 무역상으로 활약한 여인, 무역으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청나라 심양관(瀋陽館)의 살림을 주관하고 노예로 끌려와 고통받는 조선사람들을 속환하기 위해 힘썼던 여인, 청나라를 경험하고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조선의 개혁과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여인, 뛰어난 외교술로 남편소현세자를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하며 조선과 청나라와 관계를 조율한 여인... 이러한공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 인조의 미움을 받아 사약을 받고 죽은 왕실 여인.
인조실록의 기록을 따라 소현세자 죽음의 현장을 가보면, 9년여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소현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 후 두 달 후인 인조 23년(1645) 4월23일이다. 어의 '박군'이 진단한 세자의 증세는 학질이었다. 그런데 장년의 세자에게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학질을 치료한 인물이 문제의 의관 이형익(李馨益)이다. 풍토가 다른 이역에서도 9년을 너끈히 버틴 세자가 학질 따위에 갑자기 쓰러질 이유는 없는 듯하다. 더구나 학질에 침을 맞다가 죽은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소현세자가 독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인조실록 권46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 박군(朴군)이 들어가 진맥해 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인조 23년 4월23일
소현세자는 1637년 2월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사망하였다. 오한이 나서 병을 치료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이었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사망할 즈음 '조선왕조실록'에는 심상치 않은 기록이 있다.
적시성 積屍星
소현세자가 학질로 진단을 받던 4월23일 다음 날에 화성이 적시성(積屍星)을 범하였다는 기록과 경상도 칠곡현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실록에 지진에 관한 기록이 수천 개에 이르고 있으므로 특별히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시성과 관련된 기록은 흔한 것이 아니다. '적시성'은 죽음을 상징하는 재난의 별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왕조 전 시기 동안 적시성과 관련된 기록은 24회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드문 천문 현상이며,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인조 代에 적시성과 관련된 기록은 모두 4회이다. 적지 않은 기록이다. 총 4회 중에 주목되는 것은 병자호란 발발 2년 전인 1634년과 소현세자가 사망한 1645년이다. 4월24일 세자가 침을 맞았다. 4월24일 화성이 적시성을 범하였다. 적시성을 범하는 오성(五星)은 목성과 화성이다. 이 가운데서도 화성은 목성보다 더 불길한 것으로 해석된 듯하다. 적시성 관측 기록은 마치 조만간 있을 세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튿날인 4월25일 세자는 다시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 다음날 26일 오시(午時)에 창경궁 환경당(歡慶堂 ... 아래 사진)에서 죽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종실(宗室)이었던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은 소현세자의 염습(殮襲)에 참여하였다가 시신(屍身)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하였다. 이세완(李世完)이 본 소현세자의 모습은 학질(虐疾)이 아닌 약물(藥物) 중독으로 죽은 모습이었다. 소현세자의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얼굴의 반(半)을 덮어 놓은 상태이었다. 이세완은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얼굴빛이 검어도 주위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학질 (말라리아)과 치료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만에, 그리고 오한이 나 치료를 받은 지 불과 4일 만에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이었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 의해 발병이 되는 것으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병이다.
온대지방에서도 말라리아가 유행하였기에 오래 전부터 한방에서도 학질에 대한 치료로 침구와 약 처방이 있어왔다. 그런데 온대지방의 말라리아는 열대형과는 달리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된 이후 의원들은 그에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관 이형익(李馨益)이 등장하게 된다.
소현세자, 죽음에 관한 기록
졸기(卒記)는 '죽음에 대한 기록' 이라는 의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죽으면, 그 날짜의 왕조실록에 '卒記 '를 적어서 고인의 생애를 뒤돌아보게 하고 있다. 물론 그 기록은 사관(史官)들이 쓴 것이지만, 또 다른 사관들의 검증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부의 공식 문서인 '실록'에 등재 될 수 없다. 그러기에 이미 채택된 '졸기'를 등재한 다음, 다시 '사신은 말하기를 (사신왈) '이라고 명시한 졸기를 등재하여 공정을 기하고자 하였다. 물론 모든 실록의 기록이 ' 승자의 기록 '일 수 밖에 없는 한계도 있다. 다음은 소현세자의 '졸기'이다.
왕세자가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죽었다.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하였다. 일찍이 정묘호란 때 호남에서 군사를 무군(憮軍)할 적에, 대궐에 진상하는 물품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힘썼다. 또 병자호란 때에는 부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도적 청인(淸人)들이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차마 허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청하기를, '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君父)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臣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꺼리겠습니까 ' 하였다.
그들에게 체포되어 서쪽으로 갈 적에는 몹시 황급한 때였지만,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모시고 따르던 신하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으며, 무릇 질병이 있거나 곤액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 .. 돈 버는 일)만을 일 삼았으며, 또 토목공사와 구마(拘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 삼았기 때문에 적국(敵國)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는 대체로 그때의 궁관(宮官) 무리 중에 혹 궁관 답지 못한 자가 있어 보도하는 도리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마사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 인조 23년 4월 26일
다음은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지내고 난 후 실록의 기록이다. '졸곡(卒哭)'이란 무시곡(無時哭)을 마친다는 뜻으로, 우제(虞祭)를 지낸 후 100일간 아침 저녁으로 올렸던 상식을 그친다는 뜻이다. 인조 23년 6월 27일, 실록의 기록이다.
소현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날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확 ..고운 빛깔의 빨간 흙)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上(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하였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녀 조소용(趙昭容 ..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했다거나,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빈궁을 모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七穴)에서는 모두 붉은 피(鮮血)가 나오므로 검은 멱목(冪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는데,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그 얼굴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 빛은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인(外人)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못했다. 다만 그때 종실인 진원군(珍原君) 이세완 (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조의 정비인 仁烈王后의 서제(庶弟)인 관계로, 이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염습(殮襲)에 참여해 그 이상한 광경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돌연사(突然死)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仁祖)의 태도는 더 의아하였다. 대신(大臣)들이 의원(醫員)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하였으나, 인조(仁祖)는 그러한 일은 다반사이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게다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葬禮)마저 거의 박대(薄待)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하였으며, 그 예법(禮法)마저도 세자(世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인조 23년 2월, 소현세자는 장장 9년 간의 볼모생활 끝에 가슴 벅찬 기대를 안고 그리운 고국 길에 올랐다. 이전의 두 번에 걸친 귀국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 귀국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귀국은 비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수많은 서양 물품을 휴대한 채 귀국하는 소현세자의 뇌리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이상이 가득하였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상을 펼치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상상 못할 비극의 현장으로서의 조선이었다.
비극의 조짐은 인조가 귀국한 소현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 ..나라의 경사 시에 신하들이 왕에게 인사하는 의식)를 막은 것이다.의심 많고 용렬한 아버지 인조에게는 소현세자의 귀국 자체가 의혹의 대상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하였기에 이제 더 이상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사고는 외면하였다. 소현세자가 휴대한 수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들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 몸짓이 아니라 오랑케에게 정신을 팔아먹은 증거물로 보았다.
인조는 시종일관 세자에게 냉담하였다. 소현세자는 이러한 부왕의 냉대에 크게 상심하였다. 세자는 귀국 후 두 달 만에 별에 걸려 누웠다. 세자가 병에 걸린 것은 귀국 한 해 4월23일로 어의 '박군'은 세자의 증세를 학질이라고 진단하였다. 그다지 중병이라고 볼 수 없는 학질을 치료하는 데 여기에 중요한 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의관 이형익(李馨益)이다.
의관 이형익 醫官 李馨益
이형익(李馨益)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다. 충청도 대흥 (지금의 예산군 대흥면)출신이다. 1632년 침술이 탁월하다고 하여 내의원(內醫院)추천으로 서울에 초청되었다. 그는 인조 11년부터 27년까지, 왕이 죽을 때까지 빈번히 번침(燔鍼)을 실시하여 효험이 있자 특명으로 현령(縣令)에 임명되기도 하고, 의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번침(燔鍼)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침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침을 불에 달구어 사용하는 방법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침술은 당시로서는 사술(邪術)이라 하여 배척과 비난을 받았다. 인조 23년 소현세자의 주치의를 지냈으나, 소현세자가 죽자 사헌부, 사간원으로부터 여러 차례 그의 죄를 논하고자 장계가 올라왔으나, 인조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仁祖가 죽은 뒤 그 책임을 물어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되었으나, 2년 후 왕대비 인열왕후의 병세가 위독하여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의관 이형익(李馨益)이 소현세자의 독살에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수상한 장례절차
소현세자의 죽음에 아버지 仁祖가 관련되었다는 의혹은 世子의 장례절차에서도 나타난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시신을 담은 관(棺)의 명칭에 대하여 '재궁(梓宮 ..임금 또는 세자의 관)'이라는 호칭을 사용 못하게 하고, 대신 사대부나 일반 사서들이 쓰던 널 '구(柩)'자를 쓰도록 하였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 서상리의 주장처럼 세자는 살아서는 동궁이요, 죽어서는 빈궁이 되므로 재궁(梓宮)이라 쓰는것이 예법에 맞는 것이었다.
또한 소현세자 무덤의 이름도 '원(園)'이 아니라 '묘(墓)'자를 쓰도록 한 것도 마찬가지이었다. '원(園)' 字는 태자묘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태자(太子)만이 쓸 수 있다는 논리이었으나, 황제의 무덤을 일컫는 '능(陵)' 字를 역대 조선 임금들이 써왔다는 점에서 이 또한 용렬하고 저주에 가득찬 인조의 명분없는 인조의 억지이었다. 결국 高宗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상복(喪服)의 착용 기간도 마찬가지이었다. 고례(古禮)에 따르면, 長子의 상에는 부모가 참죄복 즉 3년복을 입는 것이 관례이었다. 그러나 영의정 김류(金硫),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등 서인의 중신들은 인조와 왕비의 복제를 기년복 즉, 1년복으로 올렸다. 이 자체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인조는 더 나아가한 달을 하루로 계산하는 역월법(易月法)을 적용하여 12일 만에 복제를 마치려 했다. 역월법은 연산군이 할머니 인수대비가 죽었을 때 사용했던, 성리학 사회에서는 패륜적인 예법이었다. 그나마 인조는 12일을 한 등급 더 감하여 7일 만에 상례를 마쳤다. 3년상이 7일상이 된 것이다. 최소한 1년복을 입어야 할 백관들의 복제도 3개월로 줄였다. 옥당에서 3개월은 부당하다는 차자를 올렸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평 송준길이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에서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자, 인조는 상소에 대한 비답도 없이 그를 체직하라고 명한다.
元孫 대신 동생을 후사로 정하는 인조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이었다. 당시 종법에 따르면 당연히 소현세자의 맏아들 이석철(李石鐵)이 뒤를 이어 世孫이 되어야 했다. 세자시강원의 필선 '안시현'이 ' 원손을 세손으로 세우자 '는 상소를 올렸다. 인조는 이 당연한 상소를 즉각 물리치면서 ' 이러한 소인의 행태는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 '라면서 '안시현'을 파직시켜버렸다.
원손이 뒤를 잇게 하지 않으려는 인조의 속셈은 소현세자가 비명에 급서한 석달 후인 재위 23년 윤6월 2일 드러난다. 仁祖는 大臣 및 조정의 당상 육경(六卿), 판윤과 兩司의 장관 16명을 인접한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내가 오래 묵은 병이 있는데 원손이 저렇게 미약하니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는 원손이 아닌 다른 인물, 즉 大君을 후사로 삼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당연히 모든 신하들의 반대가 잇달았다. 그러자 인조는 영의정 김류(金硫)를 끌어들였다. 이 일은 오로지 영상에게 달려있으니, 경이 결단하라 후사를 정하는 일은 영의정의 권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인조와 반정의 주역 김류 사이에 밀약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영의정 김류는 미리 계획한 대로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보위를 이은 예종과 덕종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를 이은 예를 들었다. 둘째 아들이 보위를 이은 사례를 열거함으로써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우려는 인조의 의중을 지지하고 나선것이다.
이러한 영의정 金硫의 지지에 다시 모든 신하가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인조와 사전 밀약한 또 다른 인물 낙흥부원군 김자점(金自點)이 인조의 의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시 김류가 지지하고 나섰다. 인조의 의사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이때 우찬성 이덕형이 인조의 눈치를 보면서 반대하는 신하들을 비판하였다. 인조는 김류에게 확인한다. 대신들의 뜻이 모두 일치하는가 ? 김류는 이의가 없는 듯 합니다.
인조가 다시 물었다. 자식이 둘이 남아 있으니 대신이 그 중에서 나은 사람을 결정하라 .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중에서 고르라는 말이었다. 신하들에게 다음 왕이 될 사람을 고르라는 인조의 한심한 하교에 홍서봉(洪瑞鳳)이 아뢰었다. 대군은 조신들과 서로 접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우열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상의 간택에 달려 있을 뿐 입니다. 인조가 이에 답한다. 두 사람은 다 용결하니 취하고 버릴 것도 없도다. 나는 그 중에서 장자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떤가 ? 김류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장자로 적통을 세우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에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노라.
며느리와 손자를 죽이는 인조
원손의 지위를 빼앗았음에도, 소현세자 일가에 대한 인조의 분노와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인조의 저주는 이제 세자빈 강씨에게 향했다. 인조는 며느리 '강빈'을 얽어 넣기 위해 강빈 소속의 궁녀들을 고문하고, 강빈을 고립시키기 위해 강빈의 오빠를 귀양보내는 등 저주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남편 소현세자를 잃고 상심해 있는 며느리에 대한 인조의 저주는 급기야 인조 24년 정월 임금에게 올린 전복구이에 독이 묻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절정에 달한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빈에게 혐의를 돌려 궁인들을 내사옥(內司獄)에 하옥하고 국문을 하였으며, 동시에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감금한다.
강빈의 일거수일투족을 인조의 수하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강빈이 독을 넣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조가 이미 '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 '라고 엄명하여 강빈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놓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도 인조의 자작극이었다. 이번에도 강빈의 궁녀들인 '정렬'과 '유덕'이 하옥되어 압슬(壓膝 .. 사금파리 조각을 깨트려 바닥에 놓고 그 위에서 사람이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위에서 큰 돌이나 나무판자로 눌러 무릎을 으깨버리는 형벌)과 낙형(烙刑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 궁녀들은 사실의 인정을 거부한 채 고문 속에 죽어갔다.
전복구이에 독을 넣은 사건도 오리무중에 빠진 후, 인조는 비망기(備忘記 ...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를 내리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그 자신이 소현세자를 죽인 당사자이며, 저주사건과 독약사건을 자작한 법인이라는 자백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내용은....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때문에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問安하는 禮까지 廢한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 본다면 흉한 물건을 파 놓아 저주하고 음식에 독약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 ..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가 어느 시대에나 없었겠느냐마는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夫 .. 임금과 남편)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부서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그러나 인조의 비망기를 받은 신하들은, 강빈을 역적죄로 품의해 올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위기의식을 조장하였다. 병조판서를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김자점(金自點)을 호위청에 입직시켰으며 포도대장에게 궁궐의 엄중한 경비를 명령하였다. 이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선한 후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이 명령에 대해 大司憲 홍무적(洪茂績) 등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대사헌 홍무적은 강빈을 변호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드디어 인조는 재위 24년 2월, 강빈을 폐출하고 사사(賜死)하라고 명했다. 이 명을 거두어 달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인조는 끝내 자신에 의해 과부가 된 며느리에 대한 증오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사저로 쫓겨난 후 사약을 마셔야 했고, 교명 죽책(竹冊) 등은 거두어 불태어졌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빈의 형제들에게도 죄를 씌워 장살(杖殺 .. 죽을 때까지 곤장을 침)시켜 죽였다. 강빈을 죽인 후 인조는 이전의 저주사건을 재심하여 궁녀들을 고문하였고, 강빈의 어머니까지 옥사를 확대시켰다. 결국 강빈의 어머니마져 처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을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仁祖)는 세자(世子)가 죽으면 세손(世孫)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세손(世孫)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姜嬪)에게는 불행을 의미하였다. 왕위계승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그 끝은 죽음이었다.
인조(仁祖) 입장에서 강빈과 원손의 존재는 골칫거리이었다. 반정(反正)을 주도하여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정통성(正統性) 확보에 예민하였고, 왕좌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화근(禍根)을 미리 자르고자 했다. 그 첫 번째 칼 끝은 강빈의 형제들에게 향했다. 인조(仁祖)는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것에 강씨들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 하며, 이들을 귀양보내려 했다. 드러난 죄가 없으므로 귀양을 보낼 수는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조(仁祖)는 강빈의 형제 4명을 귀야 보냈다.
강빈의 죽음 .... 인조실록
인조실록. 인조24년 3월 15일 .... 소현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賜死)하고 교명(敎命), 죽책(竹冊), 인(印), 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조선시대 국왕은 왕비를 책봉(冊封 .. 왕세자, 왕세손 및 왕비와 세자빈을 임명하는 의식)할 때에는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를 내리고, 세자 이하를 책봉할 때에는 교명과 책인(冊印)을 내렸다. 교명은 임명하는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 할 것을 훈유하는 글이다. 책보, 책인은 책문(冊文)과 인장인 보(寶)와 인(印)을 의미한다. 책문은 일종의 임명장으로서 책봉받는 이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책문과 보인은 그 지위에 따라 사용한 재료가 다르다. 왕과 왕비는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죽책(竹冊)과 금이나 은, 옥으로 만든 인(印)을 사용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부터 왕제와 황후는 금책과 금보를 사용하였다.
결국 죽음의 그림자는 강빈에게도 닥쳤다. 1646년 1월 3일, 인조(仁祖)에게 올린 '전복구이' 안에 독약(독약)이 들어 이었다. 인조(仁祖)는 강빈을 주모자로 지목하였다. 인조는 강빈의 나인(內人) 5명과 음식을 만드는 나인(內人) 3명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전복구이 사건은 강빈을 죽이려는 모함에 불과하였다. 이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仁祖)는 계속해서 강빈이 독(毒)을 넣었다고 고집을 피웠다. 한달 후, 인조(仁祖)는 김류, 이경석, 최명길, 김육, 김자점 등을 불러 ' 강빈이 평소 무례한 여자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 '며 처벌할 것이라 했다. 대신들은 지나친 처사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인조는 폐출되어 사사(賜死)된 연산군(燕山君)의 생모(生母) 윤씨를 떠올렸다.
김자점(金自點)은 인조(仁祖)의 독단적인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는 일찍이 후계자 논의에서 원손(元孫) 대신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내새우려는 인조(仁祖)의 주장에 편을 든 전력이 있었다. 최명길(崔鳴吉)과 이경석(李慶錫)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강빈의 죄(罪)가 비록 크다고 하더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조는 마음 먹은것을 실천에 옮겼다.
강빈의 형제들 중 강문성과 강문명이 누이가 한 일을 모를 리가 없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다 곤장에 맞아 죽었다. 강씨 형제가 죽자 그 다음 차례가 강빈임을 세상이 다 짐작하였다. 3월 15일, 강빈은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다. 이어서 소현세자의 세 아들 또한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이 경선군(慶善君) 백(栢. 1636~1654)과 차남 경완군(慶完君) 석린(石麟. 1640~1650) 그리고 셋째 아들 경안군(慶安君) 회(檜. 1644~1665)가 있었으니, 경선군과 경완군은 각각 19세와 11세의 나이에 후사없이 죽었다. 세 아들의 위 이름은 모두 후일 군(君)에 봉해지면서 개명한 것이고, 원래 이름은 장남 이석철(李石鐵), 차남 이석린(李石麟), 삼남 이석견(李石堅)이었다.
셋째 경안군(慶安君)도 22세의 나이에 죽었으나, 슬하에는 두 아들, 큰 아들 임창군(臨昌君) 혼(琿. 1663~1729)과 차남 임성군(臨城君) 엽(曄. 1665~1690)을 두었는데, 이 중 임성군은 큰아버지 경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나 역시 후사없이 죽자,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密南君) 감(堪)을 경선군의 양자로 삼아 전주이씨 소현세자파의 세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경안군의 장손 밀풍군(密豊君) 탄(坦)이 1728년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亂에 연루됨으로서 소현세자파는 밀풍군 사건으로 인하여 후손들이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으나, 그후로는 비록 파(派)의 세가 빈약해졌기는 하여도, 오늘 날까지 소현세자파는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세 아들 제주도 유배
소현세자가 두 달만에 죽고, 부인 강빈도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면서, 그들의 아들 이석철, 이석린, 이석견 3형제도 1647년 제주도로 유배당한다. 당시 그들의 나이는 각각 12세, 8세, 4세이었다. 처음에는 의금부에서 각기 다른 곳으로 유배하자고 주장하였으나, 仁祖가 ' 한 곳에 정배(定配)하여서로 의지해서 살도록 하되, 내관(內官)과 별장(別將) 등을 교대로 지정해 보내 외부인들이 접촉하지못하게 하고, 세 고을에 정배(定配)된 사대부는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라 ' 라고 명하면서 모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는 내시 김광택(金光澤)과 나인 옥진(玉眞), 애영(愛英), 이생(異生)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살피게 조치하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장남 이석철(李石鐵)은 1648년 9월에, 차남 이석린(李石麟)은 그해 11월에 각각 사망하고 말았다.
세 아들이 유배될 당시 사관은 이 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금 석철 등이 국법으로 따지면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만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 그들을 독한 안개와 풍토병이 있는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 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
장남, 차남 죽다
이듬해 9월, 장남 이석철이 제주도에서 죽는다. 이석철의 죽음을 기록한 사관은, 이석철은 용골대(龍骨大)가 사신으로 왔을 때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없 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기록하면서 ' 사신은 논한다. 이석철이 비록 역강(逆姜)의 아들이기는하지만, 임금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至親으로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장독(臧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라고 적어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동정을 나타내었다. 유배 생활을 하던 석철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仁祖는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석철의 일에 대해서 매우 놀랍고 슬프게 여긴다. 중관(中官)을 보내 그의 관구(棺柩)를 호송해 와 그의 아비 묘 곁에다 장사지내라.
차남 이석린도 그 해 12월 죽고 만다. 그러자 인조는 두 형제의 연이은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나인 옥진(玉眞), 애영(愛英), 이생(異生)을 잡아와 문초하였다. 옥진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죽었으며, 애영과 이생은 옥진보다 죄가 가볍다 하여 석방되었다. 고문하는 동안 옥진(玉眞)은 두 원손이 죽은 것은 토질(土疾) 탓이지 자신이 보양(保養)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 ..라고 반발하였으나, 인조에게 필요한 것은 두 손자의 연이은 죽음에 쏠린 내외의 의혹을 돌릴 희생양이었지, 진실이 아니었다.
결국 내시 김광택이 동행하였을 때, 이미 세 형제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쩌면 이들 3형제의 사망 배후 세력에는 인조보다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자점(金自點)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후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인조시절에 마무리 된 것 처럼 보였던 두 형제의 사망을 재조사하여, 김광택을 처벌한 것으로 봐도 인조 이외에 제3의 음모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음모세력의 주축은 역시 김자점과 귀인 조씨이었다. 이들은 효종 재위 2년만에 역모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결국 모두 사형을 당하였다.
셋째 아들, 이석견 (李石堅) 그리고 숙부 孝宗의 배려
막내 이석견은 할아버지 仁祖가 죽고, 숙부 孝宗이 즉위한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았다. 즉위한 효종은 먼저 이석철과 이석린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서 내시 김광택(金光澤)을 처벌하였다. 그리고 조카를 배려하여 제주도의 이석견을 남해를 거쳐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하였다. 거기에 조카가 아플 때에는 의원를 보내주는 정도의 배려는 해주었고, 소현세자의 딸도 시집보내부면서 조금씩 소현제자 후손들에 대한 대우는 좋아졌다.
1654년 (효종 5) 6월 17일에는 홍우원(洪宇遠)이 이석견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자, 효종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 하는말을 그대가 능히 말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고 하며, 그 상소를 문제 삼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해를 끼치지않았다.
홍우원, 김홍욱의 상소
하지만 효종에게도 마지노선은 있었다. 홍우원이 상소를 올린 다음 달에 이번에는 황해 감사 김홍욱(金弘郁)이 강빈(姜嬪)의 일에 의심이 많다는 상소를 올렸다. 김홍욱은 이미 효종 즉위년에도 인조를 비방한 혐의로 곤욕을 치룬 바 있었다.
그런 그가 홍우원이 무사한 것을 보고 용기라도 얻은 것일까 ? 하지만 결과는 홍우원과는 달랐다. 효종에게 조카 이석견은 어떻게든 목숨을 보전해주더라도, 강빈이 억울하다고 밝히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었다. 그것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홍욱은 국문을 받은 끝에 상소를 올린지 열흘만에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효종, 조카 이석견의 석방
김홍욱(金弘郁)이 빨리 죽었다는 것은 이석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만일 김홍욱의 일이 더 확대되었다면 효종의 정통성 문제도 더 불궈졌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현세자의 아들ㅇ딘이석견의 목숨은 더 위험해진다. 하지만 김홍욱은 죽고, 홍우원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이석견은 이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그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656년 (효종 7)에 효종은 마침내 조카 이석견을 유배지에서 석방시켜 서울로 올라오게 조치한다. 이 때 효종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할지를 신하들과 의논하는데, 보통의 경우 신하들의 반대가 예상되었지만, 이 일에 대하여는 ' 이는 바로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만한 제일의 일 "이라고까지 하면서 찬성하였다. 귀경 후에는 다달이 봉급까지 주도록 호조에 명령하였다.
효종은 죽기 두 달 전, 이석견(李石堅)을 경안군(慶安君)으로 봉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소현세자의 장남 이석철도 경선군(慶善君)으로 추봉하고, 소현세자의 딸들도 장녀는 경숙군주(慶淑郡主)로, 차녀는 경녕군주(慶寧郡主)로, 삼녀는 경순군주(慶順郡主)로 봉하였다. 이렇게 해서 효종은 죽기 직전에 소현세자의 자손들을 제대로 종친의 반열에 올려주었다.이 당시 조정을 주도하던 송시열(宋時閱) 등의 대신들도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이 일은 별 반대 없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종친의 지위를 회복한 慶安君이지만, 그 생은 길지못하였다. 1665년 (현종 6) 9월, 온천에 목욕을 하러 갔다가 병이 나서 실려 돌아왔다가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이었다. 그나마 경안군은 아들 두 명 낳아 소현세자의 代는 잇게 되었지만, 대신 그 손자들도 역모문제에 휘말려 또 고생을 해야했다.
송광사 복장유물 松廣寺 腹藏遺物
2009년 전남 순천 송광사의 관세음보살상에서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보살상에 금을 새로 입히기 (改金佛事) 위해 상태를 확인하던 중 저고리, 화엄경 교장, 다라니, 후렴통 등 조선 중기의 유물 450여 점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佛像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나무를 깎거나, 쇠를 녹여 형상을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갖가지 경전이나 옷가지를 집어넣고, 중앙에 사리나 보석, 유리같은 신령스러운 물건들을 넣은 보물창고이다. 이를 복장물(腹藏物)이라고 한다.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에서 나온 복장물(위 사진)은 단순히 조선중기의 복식(服式)이나 경전만이아니었다. 복장 안에는 두벌의 옷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남자 조고리에는 이 보살상을 조성한 사람이 소현세자이 셋째 아들 이석견(李石堅), 즉 慶安君의 부인 허씨이었다. 그녀가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발원하며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부인 허씨는 경안군이 10년만에 귀양에서 풀려나 복권되었고, 이때 경안군과 결혼하였다.
계속되는 비극
소현세자 가문의 비극은 경안군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아들들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을 남긴 경안군(慶安君)은 仁祖의 대통을 잇는 명실상부한 적정자이었고, 孝宗은 어디까지나 차자(次子)일 뿐이었다.
경안군의 아들들은 강화도에서 누군가가 '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臨昌君)은 경안군의 아들로, 이 분이 진짜 성인이며 나라의 종통(宗統)이다 ' 라는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인해 또 다시 유배를당했고, 경안군의 손자 밀풍군(密豊君)은 영조 때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李麟佐)의 亂 때 임금으로 추대되었다가 이인좌의 亂이 평정된 뒤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