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길을 잃고 방황하는 가나안성도를 위한 교회
수년 전 ‘가나안 성도’란 신조어를 듣고 이게 무슨 말인가 한 참을 고민했지만 당체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김기현 목사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가나안 성도’를 거꾸로 해보라는 것이다. 해보자. 그럼 ‘안나가 성도’? 가 되나? 그랬다. 그들은 성도, 즉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키프리안의 선언을 진리처럼 믿고 있는 나에게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성경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조직신학적 정의에 함몰된 교회론에 대해 성찰(省察)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이 더할수록 교회에 대한 목마름은 더해졌다. 또한 교회는 정의되는 곳이 아니라 실현되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며, 실체이다. 2주 전에 읽었던 존 드라이버의 <교회의 얼굴>(대장간)에서도 이 땅의 교회가 무엇인지 12가지 이미지를 통해 보여 준다. 교회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귀결(歸結)된다.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인은 몸 된 교회의 지체이다. 결국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교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 예수 밖에 구원이 없다. 이 문제를 좀 더 다르게 바라보자.
교회가 곧 건축물에 갇힌 교회가 아니고, 건물과 연관되어 묶여진 교회 안의 성도가 아니라면, 교회 밖이란 말은 예수 밖이란 뜻이 된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예수를 나의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 얻을 수 없다. 이것은 교회가 건물이 아닌 성령의 임재로 인한 거듭남의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지정학적 건물과 등록제로 운영되는 기존의 교회와 상관관계는 느슨해지고 만다. 이것은 지정학적 공간에 갇힌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머리되신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면 그는 교회 안에 있고, 그가 곧 교회이다. 가나안 성도의 타당성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교회에 나가지 않음으로 교회를 변혁하려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모델이다.
결국 교회가 답이다. 교회는 필요하며, 교회는 있어야 한다. 이것은 효율성과 상품화된 교회를 벗어나 예수를 머리로 삼는 교회, 즉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할 과제를 준다. 현대교회는 ‘빠름’으로 정의 된다. 속성 과정으로 세례를 받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주어지는 교회의 직급은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길’ 위에 있는 존재이다. 프로그램에 등록해 얻어지는 지식이 ‘하나님을 앎’은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려는 존재론적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천천히 가야 한다. 그래야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패스트푸드점’처럼 ‘영양이 아닌 열량을 채우는 주유소’(65쪽)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구입해 읽은 야마구치 마유의 <7번 읽기 공부법>과 윌리엄 암스트롱의 <단단한 공부>, 조지 스웨인의 <공부책>에서는 끊임없이 ‘천천히 읽기’와 ‘반복 읽기’를 요구한다. 겉핧기 식의 무성의하고 빠른 읽기는 결국 온전한 공부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 잊혀져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조지 스웨인의 <공부책>의 일부이다.
“분명하게 설명하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적용하지도 않은 추상적 관념이나 결과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과 같다. 그것은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며 머릿속에서 곧 사라져 버린다.”(84쪽)
빅터 프랭클은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에서 현대사회는 모든 욕구를 만족스럽게 충족시키고 있지만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의미에 대한 욕구’(32쪽)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모든 것이 충족되어도 ‘의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충족되지 못한 상태로 떨어지고 만다. 인간으로 의미 있는 존재이고 싶다. 이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신경증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 존재가 되는 데는 필수적이다. 결국 의미에 대한 추구는 인간 존재의 독특한 특징이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의 의미에 대해 개의치 않지만, 인간은 다른 것이다.”(39쪽)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무의미한 성도의 출현’을 말한다. 그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무의미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모든 피조물에 존재의미를 찾아주는 것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한 영혼도 버리지 않고, 소외 시키지 않고, 배격하지 않으시는 복음으로 말이다. 이제 교회가 복음을 회복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잘 나타내 주는 글이 있어 함께 나눈다.
“영웅심에 빠져 외로운 길을 걷는 것과,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발털이개’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남에게 천시 받고 낮아지는 비결을 가르치신다면 당신은 그 가르침대로 바쳐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물동이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처럼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 소망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별 볼일이 없는 사람, 당신의 섬김마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사람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섬김을 받지 않고 오직 섬기기 위해 당신의 삶을 바치며 그 삶이 다 닳아지기를 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성도들은 성도이기를 원하면서도 천하고 궂은일들은 싫어합니다. 자신들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의 나의 최고봉>(토기장이, 2월 5일 묵상)
[구입한 책 목록]
크리스토퍼 스미스, 존 스미스 <슬로처지>새물결플러스, 김윤희 옮김
오스왈드 챔버스<주님은 나의 최고봉>토기장이. 스데반 황 옮김
빅터 프랭클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청아출판사. 오승훈 옮김
윌리엄 암스트롱 <단단한 공부>유유출판사,
조지 스웨인 <공부 책>유유출판사, 윤태준 옮김
이채윤 <십일조의 비밀을 안 최고의 갑부 록펠러>미래사
안건모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보리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한빛비즈
첫댓글 좋은 책을 많이 사셨네요 배부르시겠어요^^
가끔 목사인 저 자신도 길을 잃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한편으로는 서글프지만 안주하지 않고 계속 길을 갈 동력이 생기기도 하지요
'교회가 답이다'에 동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성도로
매일 거듭나고 싶습니다~
안나가 성도가 가나안 성도가
되려면 예수님처럼 살아야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는
그런 교회를 꿈 꿉니다~
가나안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되신
바로 그런 교회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