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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소백산 사천 마을(272×167cm) |
소백산 뻗어나려 우리 사천리 오백년 역사 가진 고향이라네 아름다운 산천을 자랑하오며 행복을 찾아서 굳세게 나가세
학가산 바라보는 우리 사천리 죽계수 맑은 물은 흘러서 가네 향기로운 향토를 더욱 빛내며 희망을 찾아서 씩씩이 나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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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절사 구고서원(56×40cm) |
오월훈풍에 녹음이 짙어가는 오전, 한국 한문학을 전공한 서수용(徐守鏞)씨, 보학(譜學) 연구의 남정강(南精?) 소장을 안동에서 만나 합류한 차는 영주로 내달린다. 잠시 후 차창으로 소백 능선이 출렁이며 시야에 들어오자 서씨는 ‘내 고향 사천의 노래’를 상기된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어릴 적 향수가 뭉클한 탓이리라.
이름하여 달성서씨(達城徐氏) 집성촌인 단산면 사천(沙川·새내) 마을로 가는 길은 너무도 낯익고 반갑다. 십수 년 전에 부석사를 찾아 수차례 지나쳤던 길목이 예 아닌가. 설렘과 만감이 교차했던 사찰기행의 여정들. 그 길의 인연이 이제 마을로 이어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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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산나무 아래에서(58×96cm) |
사과와 함께 인삼이 유명한 탓은 이웃 풍기의 영향인 듯 모내기 보다는 인삼밭 풍광이 들판에 가득하다. 그 옛날 소백의 갈래인 대마산(大馬山), 송학산(松鶴山) 아래 구계수(龜溪水)와 죽계수(竹溪水)가 흐르는 벌판은 그야말로 반짝이는 모래벌이었단다. 그곳이 논으로, 또 세월 따라 인삼밭으로 바뀐 것이다.
마을 들머리에 이르자 수련이 핀 연못 뒤의 동활재(東豁齋)에서 서석천(徐錫天·75·달성서씨 순흥파 회장) 선생과 부인 류인호(柳仁好)님께서 맞아 주신다. 거처는 늙은 괴(槐)회나무가 있는 옛집을 헐고 지은 한옥인데 겉보다 내부 건축과 용도가 매우 합리적이다. 삼천헌(三川軒)이란 현판을 단 집은 ㅁ자 한옥을 실용적으로 개량했는데 건축가인 맏사위가 지었다. 가족 친지의 귀향을 위해 방, 거실, 주방까지 유사시에 모두 숙소로 사용할 수 있게 꾸몄고, 통풍과 채광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작은 뜨락엔 석류나무를 중심으로 옥잠화, 궁궁이, 모란, 회양목, 둥굴레, 은방울꽃이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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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헌(三川軒)(17×25cm) |
방안 벽에 선대의 교지(敎旨)와 가계표(家系表), 그리고 선현의 글씨가 눈에 띄니 이내 후손의 정성을 읽게 한다. 그런데 주방쪽 벽면에 걸린 한문 글씨가 힘 있고 뜻 깊어 물으니 부인 유씨가 익혀서 쓴 글씨란다.
戒奢從儉務實去華(계사종검무실거화·사치를 경계하고 검소함을 따르고 일에는 진실하고 화려함을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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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서씨 순흥파 종손과 종부(39×27cm) |
부인은 안동 하회(풍산류씨 서애 류성룡의 13대손)에서 시집왔는데 이 집에서 시증조모, 조모,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과 자식까지 5대가 살았단다. 그 식구가 무려 23명에 이르렀다니 생활의 고달픔이 어떠했을까 싶다. 그런데 자그마한 부인의 인상은 한결같이 밝고 우아하다. 그늘은 마음이 만드는 법이라더니 “나는 아직껏 시집살이 한다는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에서 바다 같은 모심(母心)의 외경을 느낀다. 남편의 직장 퇴직 후 서울 집을 두고 자주 내려온다는 노부부는 마냥 오랜 친구 같고 정다운 오누이 같다.
문중회장인 서 선생은 새집을 지을 때 사람들은 층을 높이라고 했지만 조상이 안거했던 앞뜰의 동활재 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다. 정자는 숙종 때 생원인 서만유(徐萬維·1680년 생)가 1710년께 지은 것으로, 초기 입향조가 세거했던 건너 마을 우측 동남향으로 틀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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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활재와 연못(96×58cm) |
동활재 기문(記文)을 보면 서공(徐公)께서 반평생을 독서와 구름과 벗하며 산수간(山水間)에 은거하다가 만년에 거처하던 방을 이름 지었는데, 그 연원은 한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의 ‘두동치할(頭童齒轄·머리는 빠져 아이 같이 되었고 이빨도 빠지다)로 만년의 제 모습을 마치 어린아이 같이 비교, 지난 삶을 성찰하는 겸양의 뜻으로 살펴진다.
“재주는 옛사람보다 못하지만 머리가 벗겨진 것은 옛사람과 같고, 학문은 옛사람보다 못한데 치아가 빠지는 것은 옛사람과 같다. 이 미치지 못한 점을 버리고 그 같은 점을 취하였으니 ‘동활(童豁)’ 이라는 글자가 아니면 무엇으로써 내 서재 이름을 짓겠는가”(<소백춘추> 2003.3)
이 개결한 선비 정신의 향훈은 사실 절개 높은 선대의 삶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즉 달성서씨 순흥파의 시조가 되는 돈암(遯菴) 서한정(徐翰廷·1407-1490)은 성균관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사건인 계유정란(癸酉靖亂·1453년) 때 사육신, 생육신의 정신을 함께해 고향을 버리고 이곳 소백산 중 사천리(沙川里)에 터를 잡았다. 이후 500년 이상 씨족들은 입향조의 정신을 이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에 ‘우리는 공신(功臣)의 자손이 아니라 충신(忠臣)의 자손이다’는 자긍심을 내세운다. 하지만 산업화의 물결 속에 마을도 우여곡절을 겪었고, 현재 44가구 80여 주민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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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석천 회장과 부인 유인호 여사(39×27cm) |
그 후손인 서석천 선생(순흥파 17대손) 내외와 차를 나누는데 서수용씨의 부모 서중일(徐重一·67·문중 총무 16대손) 선생 내외가 들어왔다. 아들과의 인연을 반기며 잠시 후 당신의 집으로 초대하니 특별한 생활터전이요, 종합 민예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사철나무 울타리가 무성한 대문을 들어서자 온갖 동물이 소리치니 칠면조, 거위, 오리, 닭, 염소, 원앙, 십자매, 햄스터, 고양이, 개들이다. 그 중 개는 무려 26마리나 된다고 한다. 마당 뜰엔 파초, 느티, 이팝, 단풍, 앵두,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대나무, 회양목, 주목이 심어졌고, 불두화, 수국, 라일락, 접시꽃, 꽃이 진 개나리와 골담초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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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중일 선생과 아들 서수용씨(39×27cm) |
이어 거실로 들어서자 종합 민예품전시장을 축소한 듯 소장품이 빈틈없이 자리 잡고 있다. 다양한 반닫이와 문갑, 궤는 물론 자기와 도자기류, 향로, 고서, 등잔, 제기, 저울, 관복, 나막신, 풍구, 경대 등의 공예품과 글씨, 그림 액틀도 벽에 걸려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풍금(오르간)은 나의 유년기를 떠올리게 했는데, 부인께서 내어준 복분자 차를 마시며 마을 형편이 되면 꼭 전시관을 지으시라고 권하였다.
이제는 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수용씨와 함께 산길과 마을을 둘러보다가 늙은 감나무와 작약꽃이 만발한 마을 입구의 정자 동호관(東湖觀)에 머물렀다. 동호관은 생원 서재정(徐在正·1829년 생)의 호로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다. 예전 99칸 고택이 산 밑으로 옮겨가고 정자 하나만 집터 중앙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빈 방 벽장에 여러 현판이 눈에 띄어 흙먼지를 빗질하고 살펴보자 의미 깊고 아름다운 편액이 향기를 드러냈다. |
첫댓글 좋은 자료이네요 나중에 영남보학의 대가이신 순흥파 서수용 선비촌 촌장을 한번 만나러가요 재덕씨....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언제 시간내어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