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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정이 듣는 과목 중, 영어 시험 시간입니다. 문제 중 하나는 “다음 영문을 한국말로 옮기시오”였습니다. 영어 문장은 “I CAN SEE”였습니다. 머뭇머뭇 거리는 사오정을 보며, 선생님께서 단어 하나씩 해석해 보라고 말하면서, 먼저 “I”를 가리켰습니다. 사오정이 “나”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CAN”을 가리켰고, 사오정은 “할수있다”고 말하고, 선생님은 “SEE”를 가리켰습니다. 사오정이 “본다”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그 걸 한 꺼번에 다 해석해봐”라고 하자, 사오정이, “나는 할 수 있나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할 수 있나봅니다.
인재 전쟁 (The War for Talent)의 때라고 말합니다.[1] 각 기업들마다, 세계의 우수 일력들을 자기 회사로 고용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인재 전쟁”이란 사람 찾는 전쟁입니다. 좋은 사람을 찾아서 자기 회사로 데려 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회사 임원 회의에서 “연봉은 무제한이니, 10만명을 먹여 살릴 한 사람을 데려 오라”고 했답니다.[2] 인재를 이용해서 자사의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 이유로 기업들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1997년에, 마이크로 소프트 회사는 스탠포드 대학 교수이면서 인터넷 관련 기업의 CEO였던 아눕 굽타 (Anoop Gupta)라는 인도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를 자신들의 회사로 영입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를 통째로 인수합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는 사람을 등용하는 발달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전략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사람을 세우시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인재를 찾고 등용하는 일입니다. 그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함께 역대하 16:9절을 읽습니다. 영어 성경입니다.
“The eyes of the Lord search back and forth across the whole earth, looking for people . . .”
“사람을 찾기 위해서, 여호와의 눈은 온 세상 여기 저기를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인재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인재는 누구일까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등용하는 인재는 일반 회사에 사람을 뽑는 자격과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 아니 평범 이하의 사람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에게 주셔서 귀하게 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그리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위대한 일을 이뤘던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대단히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 하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평범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보니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평범한 사람이 이루어 놓은 비범한 역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3]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하나님께서 쓰는 사람,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 The Person Whom God uses』(Mark 16:1-9)이라고 정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을 쓰실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범한 사람일까요?
Mark 16:1-9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제 2막의 인재들
저희가 읽었던 본문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입니다. 성경에서 “마지막”이란 “지금까지 진행 되어 오던 일이 완전히 끝나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막이 끝나고 새로운 막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마치 TV 연속극 대장금이 내일 또 방영되지만, 오늘의 분량은 끝이 났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의 끝이란 지금까지의 진행 되었던 스토리의 일막이 끝이 나고, 그 스토리의 2막이 새롭게 시작된다는 뜻입니다.[4] 마가복음의 제 1막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1:1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od news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NRSV].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 되셔서, 세상을 무대삼아 활동한 내용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던 것들입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을 승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가복음의 제 2막에서 활약할 리더자들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제 2막에서 활약할 인재를 찾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 갔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9절 말씀은 이렇게 밝힙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Earl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after he arose, he appeared FIRST to Mary Magdalene, from whom he had driven out seven demons [NET].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첫날” 그리고 “먼저”입니다. 왜냐하면, 마가 복음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첫번째의 의미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Early on the first day를 앞에 기록합니다. 또 한국 성경 뒤 쪽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라고 번역한 문장을, “after HE arose, he appeared FIRST to Mary Magdalene”라고 “FIRST”를 드러냅니다.[5] 예수님께서 부활한 후에 첫번째 찾아가셨던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성이 누구였기에,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제일 먼저 찾아 가셨을까요?
희망의 뿌리가 예수님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전에 귀신 일곱 명에게 점령당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귀신 한 명이 사람을 점령하면, 저희 시골에서는 미친 사람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귀신 한명이 지배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 5:1-20). 이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삽니다. 돌로 자기 몸을찢고, 피를 흘리는 상태에서, 무덤 사이을 돌아 다니면서, 사람들이 가까이 찢어질듯 오면 이상한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귀신들려 무덤에서 사는 사람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쇠사슬로 묶어 놔도 금방 풀어 버립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5:4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여러 번 쇠사슬로 손발이 묶이기도 했지 만번번이 사슬을 끊고 발에 찬 쇠고랑도 깨뜨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For he had often been chained hand and foot, but he tore the chains apart and broke the irons on his feet. No one was strong enough to subdue him [NIV].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제일 먼저 찾아 가셨던 대상은 귀신이 하나도 아니고, 일곱 귀신 들렸던 경험이 있던 여인입니다. 이 귀신들이 한 여성을 재배해서, 완전히 미치게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한 번 귀신 일곱 들린 사람의 인생을 상생해 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모으는 것과 반대 취급을 받습니다. 왕따 당하는 수순이 아닙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사회로부터 저주 받지 않을까요? 자신의 고통에 따뜻한 동정보다는, 사람들은 눈빛으로, 말로, 행동으로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세상에서 희망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귀신에 눌려서 무엇하나, 자기 스스로 할 수가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점령했던 귀신들을 쫓아 내 주셨습니다. 그 누구도 해결 할 수 없었던 인생의 고질적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 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가로 막고 있었던 일곱 귀신들을 완전히 없애 주셨습니다. 사람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마리아의 인생에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들을 쫓아 내시는 것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은총이 자신의 삶에 임한 것을 경험합니다.[6] 그러면서, 그녀의 신앙은 예수님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녀의 정신과 마음은 완전히 예수님께 사로잡혔습니다. 마리아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7] 그래서 예수님만을 의지합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마리아를 먼저 찾아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신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변화된 마리아에게 새로운 성품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신실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충성스런 삶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하시고 찾가 가셨던 이유가 그녀의 신실함이었습니다. 그녀의 변함없는 충성심은 마리아 자신의 삶으로 예수님을 초대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마가복음 15:40절을 봅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매가 있었으니 Some women were watching from a distance. Among them were Mary Magdalene, Mary the mother of James the younger and of Joses, and Salome [NIV].
이곳에서 여러 여성들과 함께 제일 먼저 이름이 소개되는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입니다. 41절에 보면, “이 여인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르며 섬기는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먼 북쪽에서 예수님을 따라서 남쪽 예루살렘까지 왔던 여인들입니다. 지금 이곳은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의 자리입니다. 사실, 이곳은 위험한 곳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붙잡혀 죽을 위험이 있는 현장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 이곳이라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함께 합니다. 이제 본문 1절을 다시 읽습니다.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When the Sabbath was over, Mary of Magdala,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alome, bought spices with which to go and anoint him [NJB].
이곳에서도, 제일 먼저 이름이 적힌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례식 후에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서 무덤에 들어 가셨고, 마리아는 썩는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시체에 바르는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변함 없이 예수님을 믿고 따라 다녔던 마리아는, 슬픔으로 가득찬 무덤의 자리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곳에 제일 먼저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안목과 기준으로 하면, 이곳에 이 사람들의 이름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였던 베드로,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린다고 해도 저는 주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장담했던 베드로는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막 14:29).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 쪽에, 또 한 사람을 예수님의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했던 제자들도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막 10:37).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이름은 이곳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지만, 자신들의 위기 앞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이해 득실 앞에, 예수는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예수님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15:47절을 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oses saw where the body was laid.
막달라 마리아아 또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이토록 막달라 마리아의 거동에 대하여 주목하여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십자가 사형 현장에도 있었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속에 들어 가는 곳에도 있었고, 뿐만 아니라, 장례식 후에도 예수님께 그 위햔 향품을 준비해서 가지고 갑니다.[8]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그 막달라 마리아를 먼저 찾아 갑니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변함 없는 신실합니다. 나의 유익이나 환경에 따라 움직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우리에게 간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faithfully 신앙 생활 하는 곳에 복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곳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이 임합니다.
예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위대하게 쓰시는 핵심적인 원칙은, 하나님 자신의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그대로 응답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무명의 갈릴리 사람들을 위대한 제자들로 쓰셨던 이유는,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 원칙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무덤에 들어 갔는데, 흰옷입은 한 청년이 앉아 있습니다. 여성들이 깜짝 놀라자, 청년이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 구나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본문 7절을 주목합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But go, tell his disciples and Peter that he is going ahead of you to Galilee; there you will see him, just as he told you [NRSV].
예수님은 이미 갈릴리오 가셨다고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실 것을 알립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이 여인들이 찾아갈 사람, 그리고 찾아갈 장소를 말합니다. 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디에서 다시 만난다고 했습니까? 갈릴리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갈릴리에 가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신다고 하셨을까요? 당시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도 있었는데, 구지어 갈릴리를 지적한 이유가 있습니까? 성경에서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사랑스런 제자들을 부르셨던 장소 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병자를 치료하시고, 소외된 자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갈릴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 곳, 개인의 회복이 있는 곳, 용서가 있는 곳, 새로운 출발을 하는 곳을 상징합니다. [9]
베드로를 호명하신 예수님
누구에게 먼저 가라고 했습니까? 제자들과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 오실 때,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모두 놀랐을 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제안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배에서 내려서 물 위로 걸어갔던 베드로입니다 (마 14: 25-29). 예수님께서 너희들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다고 말씀하시자, 자신이 죽을 지언정 예수님을 결코 부인 하지 않겠다고 힘줘서 맹세 했던 사람입니다 (막 14:31). 참으로 믿음이 하늘 높이 솟았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날, 자기 신변의 위협을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것도 세번씩이나 “나는 저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고 부정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참 재미 있는 부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째 부인하던 그 순간입니다. “나는 저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고 말할 때, 군인들에게 붙잡혔던 예수님께서 고개를 들어 베드로를 보셨고, 베드로의 눈과 마주쳤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Luke 22:61-62). 선생님을 부정한 배신자와 같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더구나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로 맹세까지 한 후에 그 말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숨어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과 용서가 있는 곳,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갈릴리에 가셔서 베드로를 만나려고 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셨던 말씀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예수님을) 뵈오리라”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삶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렸을지언정,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베드로에게 새롭게 출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새로운 기회와 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용서하고 용기를 주시고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잘못을 들쳐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벌주시고 수치 당하게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회복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범한 우리들을 사용하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영혼이 예수님께 뿌리가 내리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우리를 통해서 위대하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찬송: 165 (155) “주님께 영광”
공동 기도제목
1. 부활의 예수님의 자비를 경험하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2.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 보시기에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3.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인생의 새로운 기회를 잡게 하소서[1]Ed Michaels, Helen Handfield-Jones, and Beth Axelrod, The war for talent (Boston: Harvard Business Press, 2001). “인재 전쟁 전쟁”이라는 숙어는, 1997년 스티븐 한킨 (Steven Hankin)이 맥켄지 (McKinsey & Company)에서 발표한 연구 보고에서, 미래 비지스계의 한 전력으로 소개하면서 일반화되었다.
[4]마가복음의 끝 (ending)이 어디인가는 학자들 사이에 끝나지 않은 논쟁의 주제입니다. 일반적으로 16:1-8까지는 원사본으로 간주 되지만, 16:9-20은 2세기나 그 이후에 첨가되었다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오래 되고 훌륭한 사본인 Vaticanus (B)와 Sinaiticus (א)에는 16:9-20이 빠져 있으며, 초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에도 이 구절들은 마가복음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9-20이 마가복음의 끝 (ending)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7세기부터 9세기의 Manuscripts (L, Ψ, 099, 0112)에 다른 고대 번역본 중에도 이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끝 (ending)이 짧은 끝 (the Short Ending, 16:8)이든 아니면 긴 끝 (the Long Ending)이든, 문제는 원문의 위조 사본이다. 마가복음 끝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고 하십시오. William Lane, Mark, 593-605; Craig A. Evans, Mark 8:27-16:20, 545-547. 그러나 본 책에서는 비평 (criticism)보다는 마가복음의 메시지 (message)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the Short Ending을 마가복음의 끝으로 본다면, 마가복음 메시지의 전달이 갑자기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the Longer Ending을 통해서 메시지를 마루한 하는 것입니다.
[5]R. C. H. Lenski, The Interpretation of St. mark’s Gospel (Columbus, Ohio: The Wartburg Press, 1946), 756-57.
[7]Lloyd j. Ogilvie, Life Without Limits: The Message of Mark’s Gospel (Waco, Texas: Word Books, 1975), 288. 마리아의 신앙은 곧 초대 교회 신앙 고백이 되었다. 예수님께 신앙에 뿌리를 내렸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며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9]Morna D. Hooker, The Gospel Accoring to Saint Mark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1, second priting 1997), 386. Hooker는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관하여 잘 설명했다. “If Mark himself is not writing for a Galiaean community, it may be that we have to look for another explanation for the message. Perhaps in picturing the disciples as returning to Galilee—the place where they were originally called—Mark thinks of them as beginning garin: they have failed Jesus, failed to take up their crosses and follow him to crucifixion, but now they are being summoned once again to follow him, and to learn once again what discipleship means. Mark may perhaps interpret the message as one of forgiveness and renew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