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8일부터 21일까지 대만에 와 있습니다. 대만 국립정치대와 저희 인하대의 학술교류 행사로 왔습니다.
마침 이틀 전에 대만 총통(대통령) 선거가 끝났는데, 민진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대만 국민당의 장기집권 역사에 벌써 민진당이 두 번 째 정권교체에 성공한 것입니다.
첫 번 째는 2000년 천수이벤(陳水扁)의 총통 당선이었습니다. 그는 재선에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부인 등 온 가족의 부패와 비리로 인하여 그의 지지율은 땅에 떨어졌고, 국민 소환의 압력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2008년의 다음 선거에서 다시 국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갑니다(마잉주 총통).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민진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어 또 한 번의 정권 교체를 이룬 것입니다. 이쯤 되면 대만은 대항적 양당체제 및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민주 정치 제도를 완전히 정착시켰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대만 정치에서 민진당과 국민당의 대립은 대만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2.28'이라고 하는 대만 현대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대표됩니다.
2.28이란 1947년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인들에게 자행한 국가폭력을 의미하는데, 우리로 말하자면, 제주 4.3과 광주 5.18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45년 2차대전 후 대만은 독립을 맞이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1895년부터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50년만의 독립이라고 할 것입니다. 대만인들은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모국으로 귀향한다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중국 본토의 국민당 정부가 행정장관을 파견하기 전까지 두 달 동한 대만인들 모범적인 자치 역량을 보였습니다.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 7월 본토에서 새로운 통치 인력들이 파견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대만 정부 대부분의 직위는 최고위직에서 말단 한직까지 본토에서 넘어 온 국민당 인사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국민당 정부가 내세운 이유는 대만 사람들이 '표준 중국어(만다린)'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만인들은 대만 방언을 썼고, 또 일제 식민지배로 인하여 일본어를 썼습니다. 대만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국민당 사람들, 그 일가족이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본토에서 온 경찰이나 군인들은 규율이 없었습니다. 수준도 낮았습니다. 아직 근대 문명에 익숙하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대만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훨씬 발달된 사회였고, 교육수준도 높았습니다. 본토에서 온 사람들은 대만인들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였고, 대만인들은 본토인들로 인하여 좌절하였습니다. 본토인들은 대만인들을 '일제의 꼭둑각시'로 비난하였고, 대만인들은 '개가 가니까 돼지가 왔다'고 하였습니다. 본토인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폭력행사도 빈번하게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국민당 정부는 대만의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고 수탈하였습니다. 모든 주요 기업을 국유화하고, 전매사업을 강화하였습니다. 술, 담배, 성냥 등의 전매 사업은 특히 서민들의 생계수단을 빼앗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울러 쌀을 본토로 많이 가져가 식량난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7년 2월 7-8일 사건이 터집니다. 국민당 전매청 조사원은 사제 담배를 팔던 여성을 단속하여 담배와 현금을 압수하였습니다. 여성은 무릎을 꿇고 빌면서 조금이라도 돌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여성 편을 들었습니다. 조사원은 총의 개머리판으로 여인의 머리를 가격하였습니다. 여성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사람들이 흥분하여 조사원에게 달려 들었고, 조사원은 총을 쏘았습니다.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군중들의 분노가 폭발하였습니다. 징과 북소리를 울리며 밤새 행동을 독려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시위대는 전매서에 침입하여 가해자를 찾아 때려 죽입니다. 그리고 전매서장 집에 쇄도하여 각종 가재도구를 때려 부쉈습니다. 이어서 행정장관의 관서까지 돌진해 갔습니다. 그러자 군경이 발포를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대만인들은 이제 본토에서 온 사람들(이들을 外省人이라고 부릅니다)을 마구 린치하였습니다. 외성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의 유리창을 부수고, 차량도 부쉈습니다. 대만정부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대륙의 국민당 정부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계엄이 선포되고, 본토에서 증원군이 파견되었습니다. 대만 청년 학생들은 시민군을 조직되어 저항하였지만, 모두 진압됩니다. 나아가 계엄군은 가가호호 찾아 다니면서 '불순분자'들을 색출하여 가차없이 처단하였습니다. 수많은 선량한 대만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적게는 2만, 많게는 3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은 대만인들에게 지워질 수 없는 충격과 깊은 상처를 안겼습니다. 2.28 후 대만은 계속 계엄상태가 유지되었고, 아무도 그에 대하여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1987년 계엄이 해제되면서 마침내 2.28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 대만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고, 기념 공원을 건립하게 됩니다. 현재 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2.28공원과 기념관이 바로 그것입니다.
2.28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해방 이전부터 대만에서 살아 온 대만인들에게 '대만의식'을 일깨운 사건입니다. 그 대만인들(이들을 本省人이라고 합니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문케 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중국인이지만, 본토의 중국인들과 같은 중국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성인은 외성인과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성인들은 지금까지 명나라, 청나라, 일제시대, 국민당정부를 거치면서 중국인이 아니라 식민지로 살아왔다는 인식, 이제 그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진정 대만의 정체성을 찾아 자주독립을 해야 하겠다는 인식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한 대만인들의 '자의식'이 민진당의 뿌리가 되고, 현재 정권교체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첫댓글 교수님 안녕하세요. 출장중이시라는 소식을 접했는데 모처럼 요즘 한창 '뜨거운' 대만에 계신줄 몰랐네요^^
교수님 글을 접하고 나니 문득 학부시절에 감명깊게 보았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란 영화가 생각나네요. 마침 그 영화도 2.28 사건을 배경으로 했어서 더욱 그런것 같습니다..
김성우씨,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네요.^^ '비정성시'에 대하여는 참 많이 들었는데, 정작 아직 보지는 못했어요. 언제 우리 학생들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