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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신명기 8장 2-3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
성경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의 내용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의 존재,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며 불변하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속성과 더불어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알리시는데, 대표적인 한 구절을 언급하자면 우리가 살핀 바 있는 창세기 15장 1절의 말씀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으로 자신을 알리십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인 이상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한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앞에서 언제나 당당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박국 3장의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살펴봤지만 어떤 면에서 창세기 15장 1절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지극히 큰 상급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분으로 계시기 때문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할지라도, 비록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또한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합3:17-18),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 아닙니까! 이런 고백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한 것과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고백하는 것과 고백하는 자로 사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 내면에 축적되어 있는 세상의 가치는 우리의 안목을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만들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의식주 문제에 대해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신다고 말씀하시지만(마6:32)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여전히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요, 이것을 사모하여 결국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 말씀하시지만(딤전6:10)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이 돈 문제를 제쳐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업이 번창하는 것, 직장 내에서 인정받고 승진하는 것,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모든 것이 사실 의식주 문제나 돈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 자체도 그 이면에는 항상 이러한 것들을 염두 해 두고 구하는 것이 실제 우리 신앙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세상의 가치를 버리지 못하는 악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이런 악습을 반복하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만을 방패로, 하나님만을 지극히 큰 상급으로 여기지 못하는가?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세상의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 성도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적 용어요, 신분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것이지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수준이 의인이요, 성도라는 말은 아닙니다. 에베소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택하신 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우리를 부르신 것이지, 부르신 즉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자요, 그것을 위해 죄와 싸우는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만들기 위하여, 또한 그것을 위해 죄와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가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경우도 그러한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신명기 8장 2절과 3절을 본문으로 했지만, 1절을 먼저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알리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 모세가 신명기의 말씀을 할 때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이 출애굽 1세대가 아니라 2세대인데, 1세대의 경우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거의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또 20세 이하로 계수함을 받은 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는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 길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한다면 너희가 살뿐만 아니라 번성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그리고 좀 더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본문 2절과 3절의 말씀을 통해 좀 더 확증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 2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을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여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말씀을 보면 광야 40년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내리신 벌이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바로 앞에 있는 민수기 13장으로 가시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도록 12명의 정탐꾼을 보내는 일이 있는데, 그들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난 뒤 보고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25절부터 보시면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25-33) 그리고 민수기 14장에 넘어가시면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됩니다. 1절부터 보시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14:1-4) 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20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신 것은 결코 두려워 떨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가 얼마나 감사해야 할 내용인지를 미리 보고 알리시기 위함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보다는 그들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봄으로, 다시 말해 가나안 땅에 사는 백성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읍을 봄으로 약속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왔던 겁니다. 저들의 장대함과 저들이 살고 있는 성읍의 견고함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봤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고, 그것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 이후 과거 40년을 돌아보게 하실 때 벌로써, 진노로써 광야 40년이 있었던 것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벌로써, 진노로써 내린 광야 40년을 선하게 사용하셨는데, 바로 너희는 낮추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는 불순종 이면에 교만이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고, 그런 교만을 꺾기 위해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다고 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광야 4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는 동시에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기 위해 시험의 일종이기도 했다고 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상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결코 모르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표현으로는 네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자 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알고자 한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 교훈하고자 하시고 너희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바가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3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 편에서 알기 위한 것으로 광야 40년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알리기 위해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무엇을 알리기 위해서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는가? 단순하게 보자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무엇과 연결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느냐 하면 이 광야 40년을 만나와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나 사건은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소개합니다. 1절부터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1-4) 여기 보면 광야로 나오자마자 불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생활 처음부터 불평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불평의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먹을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불평에 대해 매일매일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4절을 보시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그리고 이런 말씀을 덧붙여 하십니다. “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왜 갑자기 율법이 나오고, 시험이 나오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단순하지 않다는 겁니다. 단순히 먹는 문제만 가지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매일매일 먹을 것을 줄 테니 그것을 통해 과연 너희가 나를 제대로 섬기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확인해 보자고 하시는 겁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이스라엘의 불평은 먹을 게 없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먹을 것을 줄 터이니 과연 너희가 나를 잘 섬기는지 보자고 하시는 그런 시험의 내용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본 출애굽기의 내용은 출애굽하고 난 뒤 2월 15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생활을 하게 된 배경이 되는 12정탐꾼 중 10명을 가나안 땅에 대해 악평한 사건은 민수기 13장입니다. 일반적으로 출애굽기 16장에서 민수기 13장의 거리는 보통 한 달이 못 되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1장 2절에서는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길을 가면서 그들은 먹을 것을 주시면 더 이상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처럼 하고 있으나, 민수기 11장으로 가시면 더 이상 만나를 먹지 못하겠다는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11:4) 먹을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은 만나를 먹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고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민11:5-6)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질을 따지더란 겁니다. 물론 질로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질로 해결해 주면 또 다른 것으로 따지는 것이 인간임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광야 생활의 목적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의 죄성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결코 이 세상 것에 대해 만족함이 없다는 것! 외적인 것을 채워줘도 외적인 것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죄성이 있는 한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우리 안에는 끊임없는 탐욕이 있어서 결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 계명이 탐심에 대한 것으로 탐내지 말라는 것은 역으로 우리 안에 탐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다. 너희의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고, 그런 의미에서 떡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먹고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으로 가시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 보면 우리가 싸우는 성격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1절부터 보시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1-11) 여기 보면 마귀가 돌로 떡을 만들어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 자신에게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사실 이것은 주님께만 있었던 시험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는 음성으로 있습니다. 물론 돌로 떡을 만들어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은 하지 않을지라도 마귀의 유혹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그만두도록 만드는 시험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하는 그런 시험을 마귀는 끊임없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시험을 거절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도록 말씀하심으로 모든 유혹의 내용을 대적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런 시험을 통해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리시는 동시에, 말씀만이 성도의 유일한 무기임을 알리셨습니다. 만약 혈과 육에 관한 시험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단련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서 떡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몸을 좀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이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즉 이 시험은 혈과 육에 대한 시험이 아니었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하셨던 겁니다. 혈과 육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 역시 창이나 칼과 같은 것을 들고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무기로 싸우셨습니다. 심지어 마귀는 예수님을 말씀으로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너도 한번 해 봐라. 이때 예수님은 말씀에 대하여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귀의 말씀 인용은 잘못된 인용이지만 거기에 대하여 참된 것으로 알리시면서 시험을 물리치셨던 겁니다.
우리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우리의 싸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독도를 지금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과의 싸움이 우리의 싸움이 아닙니다. 어느 정권이나 권력을 잡으면 온갖 부정과 부패로 얼룩지게 되는데, 그런 정권과의 싸움이 우리의 싸움이 아닙니다. 소위 지역 갈등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특정 지역과의 싸움이 우리의 싸움도 아니며, 소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싸움도 아닙니다. 물론 방금 말한 내용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 땅을 지켜내는 것,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 좀 더 깨끗해지는 것 등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정작 중요한 싸움은 그런 싸움이 아니라 죄와의 싸움, 그 죄도 우리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하자면 먹고 마시는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튀어 나오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 우리가 무장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신명기 8장 3절 후반부에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 떡이 있건 없건 혹은 떡이 많건 적건 그 모든 것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장발장 이야기처럼 먹을 것이 없음으로 죄를 짓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죄가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짓는 것인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죄책과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런 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중생하게 되지만, 중생했다고 해서 부패한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본성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외적으로 것의 유무로 죄가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지난주 살핀 하박국 3장의 말씀은 결코 우리 인생에서 소망할 수 없는 그런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다면 외적인 것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죄성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죄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 길은 오직 하나님 말씀 외에는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생애 가운데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떡이요, 말씀되신 그만이 참된 음료와 참된 양식임을 알리신 것(요6:35,48,55)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잡히시던 밤에 상만찬을 통해서도 동일한 뜻을 전하셨으며(마26:26-29), 부활하시고 난 뒤 제자들을 만나 물고기 한 마리와 떡 한 개를 나눠 먹는 일 속에서도 동일한 뜻을 암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요21:1-13).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시기까지 합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말씀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도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함이며, 살려내고 난 뒤에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먹고 마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모서 8장 11절을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 목적은 단순히 육적인 것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은 우리를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엡1:4). 이 일을 위하여 죄와 싸워야 하는데,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워야 한 존재가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히12:4). 이런 싸움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떡을 위해 살고 있다는 반증과도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있고, 육체를 입고 있어서 육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의식주를 걱정하게 되고, 물질로 인하여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의식주나 물질 문제 때문에 인생의 여러 가지 일들이 결정하게 되고, 그것이 쌓여서 자신을 속이기라도 하듯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목을 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벌로 허락하셨지만 그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되 교훈하기 위해서 그 길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벌을 받으면서 배우도록 하기 위해 광야 40년을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 이면에 우리의 교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우리를 낮추시고자 한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인생임을 알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자신의 말씀으로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교훈하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