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자유를 몸으로 실천했던 강의석씨가 다니던 대광고등학교 학교목사님이 학교를 그만두고, 목사직도 그만두고, 노점상으로 생계를 해결하면서 지낸다는 글을 인터넷검색중에 읽었고, 산들(류상태)라는 분이 운영하는 불거토피아란 까페를 방문해서 글을 읽고, 가입하고 인사글을 썼습니다.(아래 글)
최근 성토모의 분들이 신문방송에서 열심히 지대조세제를 홍보하고, 토지보유과세증액을 설명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지대를 설명하는 용어로 토지불로소득을 이야기 하는데, 정치경제학에서 보면 100% 정확한 용어가 아닙니다. 사회가 생산한 소득이라고 해야 좀더 정확하다고 해야할까.. 현실의 지대들 중 전부가 물거품이 아닙니다.
여튼,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해결해야하나 고민중인 저로서는 용기있게 살아가는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산들님의 삶이 반가웠습니다.
=========================================================================
[인사]헨리조지공부방 방장입니다. 토지 불로소득의 정의 등
글쓴이 : 빵장사 조회 : 0 스크랩 : 0 날짜 : 2005.05.13 07:45
안녕하세요.
불교 관련 까페들을 돌아다니다가, 산들(여기 운영자)님이 노점상 하는 글을 읽게되고, 불거토피아란 까페 명칭에 이끌려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실천하는 삶, 거짓없는 삶을 살아야하고, 그렇게 살고자 용기내어서 살아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반갑고, 저의 문제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라고 해야할까... 더 반가워서 가입도 하고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저는 헨리조지란 분의 사상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기독신자가 아니지만, 성토모를 알고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로소득거부(경제정의)를 성토모가 대천덕성공회신부님과 함께 지난 수십년간 외쳐왔고, 노무현 정부에서 헨리조지공부한 분이 청와대 참모가 되고..... 텔레비, 신문에 지대조세제가 소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또 토지사유재산제도란 실정법, 실제 제도가 존재하는 경우에 토지사용대가는 불로소득이 됩니다. 집을 한채 가지고 있어도 그 집이 사용하는 토지에 대한 경제적 가치는 개인의 입장에선 불로소득입니다. 여기 운영자이신 산들님의 서약서에 집한채만 가지기로 하고 더 큰 집으로 이사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던데.... 훌륭하지만, 이또한 불로소득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열채 가지나 한채 가지나 양의 차이일분, 토지로 부터 얻어지는 경제적 이익은 개인이 모두 가진다면 불로소득입니다.
제가 근본주의 같습니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보다 더 심한 근본적인 그런 기준을 제시하고 지금 이야기 하는것 같을 겁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자연적 법칙은 기냥 그런것입니다. 종교와 인종과 빈부, 성별,,,과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지대=토지의 사용대가= 토지로 부터의 경제적 이익의 본질은 사회가 생산한 가치입니다. 또는 생산물 중에서 사회의 몫입니다. 생산물=개인의 몫+ 사회의 몫. 사회의 몫이라 함은 쉽게 말해 사회유지비용입니다.
토지사유재산제도 하에서는 현실의 지대=토지임대료 중에서 정상적 지대외에 투기적 지대라고 거품같은 지대도 포함됩니다. 현실의 지대=정상적 지대+투기적 지대 입니다.
이중 투기적 지대는 거야말로 물거품같은 것이라서 개인의 입장에서도 사회의 입장에서도 불로소득입니다. 그런데 정상적 지대는 사회의 입장에서는 사회가 일한 정당한 소득입니다. 단지 개인이 가지면 부당한 불로소득이지만, 사회의 입장에서는 실제하는 소득인것이지요.
그러니까 불로소득 거부는 경제정의의 하나의 모습일 뿐입니다. 토지사유재산제도하에서는 더 정확히는 개인이 지대를 전부가지는 제도하에서만 지대는 개인의 입장에서만 불로소득입니다. 사회의 입장에서는 정상적 지대는 정당한 소득, 사회가 일한 소득입니다.
복잡합니까? 그래서 정치경제학이 있구요.헨리조지가 [진보와빈곤]이란 6백여쪽의 두툼한 책을 썼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말이 길어졌습니다. 이렇게 말들이 많으니까 실천이 더욱 중요하고, 여기 운영자분의 실천하는 삶이 더 반갑습니다. 저도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좀더 일치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겠다고 이 아침에 함더 다짐을 합니다.
2005.5.13. 가야산 자락에서 빵장사
추신: 조지스트인 손문이 지난행이(알기는 어렵고 행하기는 쉽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다들 지이행난이라고들 하는데 반어법이 아니라 진실로 지난행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지난행이는 다시 말해 아는 만큼 행한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잘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고요.
삶이 실천이 어려울 때라도 마음이 편하다면 행복을 이야기 할수 있게습니다. 사람은 과연 아는 만큼 실천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아는 만큼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