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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60년대, 우리 시대 염불 도인 하담 스님과 법산 스님 이야기
무여 스님(축서사), 「행복으로 가는 길」 『축서사보』
이 이야기는 50~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더벅머리 총각이 행복을 찾아 나섰다. 성은 한韓씨요, 이름은 복동福童. ‘복동’이라는 이름은 ‘복’이라는 말과 인연이 깊은지, 어릴 때부터 ‘우리 복덩이, 우리 복덩이’라고 했던 것이 복동으로 변했다.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인가?‘ 심사숙고深思熟考 하다가 어떨 때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하고, 어떨 때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였으며, 또 어떨 때는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잘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을 직접 보고 장래 문제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어디로 갈까, 누구를 찾을까, 궁리 끝에 행복은 사랑에서 올 것 같아서 주위에서 행복하다고 소문이 난 친구 집을 찾기로 하였다.
그 친구는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대학까지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가졌다. 특히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은 고향의 예쁜 처녀와 결혼하여 잉꼬부부라고 할 정도로 금실이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슬하에는 예쁘고 똑똑한 아들, 딸 남매까지 둔 친구로서 누가 봐도 복이 많다는 친구였다. 그 친구 집에 가면 행복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잔뜩 기대에 차서 갔다. 대문을 막 들어서는데, ’우당탕탕!‘ 살림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에 그 점잖은 친구의 입에서 막말이 터져 나오더니, 부인도 질세라 쌍소리를 하니 아이들은 죽을 것 같은 소리로 마구 얼어댔다.
행복을 찾으러 갔던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내 친구 아무개는 아니겠지’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친구 집이고, 친구의 목소리가 틀림없는 줄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도망치듯 나오고 말았다. 너무 충격이 심하여 온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가 어려웠다.
친구 집에서 크게 실망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비틀거리며 네거리까지 나왔다. 어디로 갈까,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가장 믿었던, 가장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에게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가 볼 곳이 막연했다. 얼마를 생각하다가 고을에서 제일 갑부인 변 부자댁을 찾기로 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갑부로서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무슨 일이든지 자신만만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굽힘이 없이 큰소리 떵떵 치는 의지와 노력의 사나이 변 씨에게 가면 남다른 행복을 느낄 것 같았다.
사랑채에서 변 부자를 찾으니, 변 부자는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하나밖에 없는 변 부자의 동생이었다. 변 부자는 3천석 꾼인데, 30석도 못하는 가난뱅이 동생한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 두 마지기를 돌려주지 않는다고 볼 것 없이 나무라고 있었다. 그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만 정이 뚝 떨어졌다. 허탈한 기분으로 그 집도 나오고 말았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변 부자 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디로 가 볼까 고민하다가 당대의 이름있는 정치가댁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문지기에게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 말이 불손하고 거칠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쌀쌀하여 마치 범죄 집단 같은 곳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간신히 부인을 만나니 상전이 하인을 대하듯이 거만하고 딱딱하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왕 어렵게 들어간 집안이라 ‘행복한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행복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말입니까? 그 양반은 행복을 「행」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부인을 보니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거만하고 딱딱하고 험구이니 그런 여자의 남편이라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봉건주의 시대 권문세도가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정작 정치가는 만나지도 않고 괴로운 심정으로 솟을 대문집을 나오고 말았다.
정녕 행복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이제는 행복이라는 말도 싫어졌고, 행복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마음도 없어졌다. 비틀거리며 산속으로 올라가다가 길섶의 잔디 위에 쓰러졌다. 어느덧 밤이 되어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났다. 문득 전 반짝이는 별들처럼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다. 순간, 자살을 결심하였다. 굳이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자살을 결심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멀리 동쪽 하늘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여러 날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피로가 겹쳐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뜨니 다음날 한낮이 지나서였다. 따듯한 양지바른 곳에서 실컷 자고 나니 지쳤던 몸도 완전히 풀리고, 행복을 찾겠다는 마음도 자살하겠다는 마음도 다 쉬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볍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순간 ’이것이 행복이 아닌가‘ 하고 쾌재를 불렀다. 이 이상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그는 드디어 행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그는 행복한 순간을 자세히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는 드디어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구나. 텅 빈 듯한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마음에서 온다’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몇 시간을 누워있었다. 여전히 아무 생각도 없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목탁 소리가 들려 왔다. 목탁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그는 목탁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목탁 치는 스님은 미치광이 같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 극장 선전원들이 사방에 영화 포스터를 붙인 통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다니면서 선전했던 모습처럼 앞에도 나무아미타불, 뒤에도 나무아미타불, 옆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주렁주렁 써서 붙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쓴 깃대를 등에 지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목탁을 쳤다.
그 스님은 하루종일 그렇게 서울의 골목을 다니다가 해가 지니 삼각산 도선사道詵寺로 가는 중이었다. 스님은 그렇게 5년간이나 목탁을 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다녔다. 스님께서 그렇게 요란하게 써 붙이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시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귀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여도 그만큼 업장이 소멸하고 공덕이 쌓인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때로는 염불로 업장을 참회하는 참회법도 가르쳐 주는 거리의 보살이요 선지식이었다. 이 스님이 하담荷潭 스님이다. 스님의 세속 인연은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성이 황黃 씨고 19세에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은사 스님께서 “너는 경전도 보지 말고 참선에도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아미타불만 일념으로 염해라”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오직 아미타불만 했다.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새벽에 눈 뜨자마자 밤에 잘 때까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아미타불만 염하고 아미타불에 빠졌다. 처음에는 잘 안되더니 그렇게 지극하게 하여 3, 4개월이 지나니 자신이 생기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쯤 지나니 더 잘 돼서 1, 2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장안사 극락전에 서울의 어느 신심 있는 보살이 3 · 7일간 기도를 왔다. 주지 스님이 찾는다기에 주지실로 갔더니, “하담 수좌, 자네가 기도해 주게” 하였다. 하담 스님은 주지 스님의 말씀이 고맙기도 하고 처음으로 하는 사중 기도라 열심히 하였다. 공양하고 화장실 가고 극히 필요한 용무 보는 일 이외에는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고, 기도에 아예 몸뚱이를 바쳤다.
염불이 점점 잘 되는 것 같더니 몇 시간씩 일념에 들기도 하다가, 기도를 마칠 무렵에는 하루 반가량을 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도 계속 열심히 하다가 입산한 지 3년만인 어느 날, 아미타불의 무량한 광명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그 무량한 빛과 오묘한 진리를 체험하는 순간 그 기분을 억제치 못하여 하루종일 금강산을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며칠을 미친 사람처럼 다니다가 이 기쁨을 나만 누릴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중생에게 아미타불 네 글자를 보여주고, 귀에 넣어 줌으로써 세세생생 지은 업장을 녹여 주고 죄업을 소멸시켜 주어 일체중생이 왕생극락하리라’ 하는 큰 서원을 세우고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갔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서울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목탁을 치면서 올라오는 하담 스님을 보게 되었다. 스님을 보는 순간 환희심이 나고 존경심이 났다. 얼마를 따라가다가 자기도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친근감이 났다. 도선사에 도착하여 하담 스님을 따라 밤새도록 정근을 했다. 다음 날 아침인데도 전혀 피로한 줄 모르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일주일이 지나니 몸은 가볍고 점점 기분은 더 좋았다. 그는 염불이 잘 될수록 하담 스님이 장안사에서 아미타불에 빠지듯이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념에 들었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염불을 할수록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 있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더 진하게 느끼며 미친 듯이 아미타불만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아미타불에 빠져 석불石佛만 보고 정근하고 있는데, 서울역에서 목탁을 치고 다니는 하담 스님이 보였다. 이상해서 옆을 보고 뒤를 돌아보아도 하담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 하담 스님이 내려갔는지도 모르고 염불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도 신기해서 하담 스님을 계속 주시했다. 하담 스님은 서울역 앞에서 얼마간 목탁을 치면서 다니더니 여러 사람에게 설법을 하였다. 뒤에 남대문을 거쳐서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청담淸潭 스님께서 외출하고 들어오셨기에 경계를 자상하게 이야기했더니, “그간 애썼다. 참으로 좋은 경험을 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럴 수도 있다. 천안통天眼通이 열렸다” 하면서 “보이더라도 일체 신경을 쓰지 말고 아미타불 일념에만 빠져라” 하였다.
그 이후 예사롭게 서울 시내가 보이고 인천 앞바다까지 보였다. 그때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아도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것 같았다. 도선사에서 3개월쯤 기도를 하던 어느 날 하담 스님이 나타났다. 그는 하담 스님에게 묻지도 않고 사방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주렁주렁 매단 옷을 입고 따라나섰다. 그는 하담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목청껏 불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는 가는 곳마다 아미타불을 느끼면서 목이 터져라 서울 시민을 위하여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불렀다.
두 스님이 아미타불을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우 모여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멸시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구경거리처럼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상가 앞을 지나면 탁발하려고 온 줄 알고 돈이나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어떤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서는 시장 상인이나 시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수십 명씩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시장 주변에 거지가 많았는데, 시장을 돌면서 돈이나 물건이 생기면 다 나누어 주곤 하였다.
스님은 정근하며 가다가 농번기에는 일손이 없는 농촌에 모도 심어주고 보리를 베어 주기도 하였고, 어느 곳에서는 하루종일 타작을 해 주기도 하였다. 공사판을 지나다가 막노동꾼과 같이 힘든 일을 해 주기도 했고, 어떤 읍에서는 우는 아이를 봐주기도 하였고, 환자가 있으면 간호도 해 주고, 지나다가 노인정을 보면 절대로 무심히 지나가지 않았다. 어떤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하담 스님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보살행을 하고 또 거리를 다니면서 거리의 포교사가 되고 아미타불의 전달자가 되었다. 또한 스님은 자비하고 남에게 공경심이 대단하여 누구든지 부처님처럼 대하고 부처님처럼 모시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스님에게는 이 사람도 부처님, 저 사람도 부처님,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부처님처럼 대하여 스님에게는 가는 곳마다 부처님 세계요, 극락정토였다. 그래서 스님과 한 번만 대화하거나 사귀면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다니다가 아미타불 일념에 들면 걸어가던 길이든, 절이든 세속의 사람의 집이든 몇 시간씩 정근을 하다가 가곤 하였다. 어느 해는 충청도 계룡산 근처를 지나다가 사흘이나 묵으면서 정근을 하니 신도안에 가던 이교도들이 몰려와 공양을 듬뿍 내서 인근 주민을 포식시킨 적도 있다.
어느 해 충정도 천안을 지나가다가 하담 스님이 문득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도 수계를 해야지?” “네, 저도 받고 싶습니다” 하니 길가의 큰 능수버들 아래 정좌하더니 “나에게 삼배를 하게” 하여 삼배를 드렸더니 “불법을 잘 호지하게. 자네가 체험한 것이 정법일세. 그것을 호지 하는 것이 계일세” 하였다. 그러면서 “오늘부터 법산法山이라 하겠네” 하여 법산 스님이 되었다.
하담 스님은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아미타불 정근을 하여 극락정토를 발원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아미타불 인연을 맺어 주고 갖가지 보살행으로 선근공덕을 쌓다가 말년에는 부산 범어사에 정착하였다. 법산 스님도 줄곧 함께 수행하였다. 두 스님은 대중 생활을 하지 않고 공양은 행자나 일꾼들과 같이하고 잠은 부목 방에서 잤다. 아침 공양을 하고 주변 도량 청소가 끝나면 어김없이 부산 시내로 내려가 아미타불 정근을 하며 다니다가 저녁에는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담 스님은 총무 스님에게 말했다.
“내가 석 달 후에 가야 되겠소”
총무 스님은 무심히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다. 가야 되겠다는 말도,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말인지, 돌아가신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가신다고 한 날 일주일 전에 총무 스님을 방으로 불렀다. 때가 묻어 새카만 주머니에 꼬깃꼬깃 모은 10원짜리와 100원짜리 돈 6만 원을 주면서,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네. 경책 한 권도, 농짝 하나도 없네. 못난 중이라 옛 어른들처럼 땅 한 마지기도 부처님께 바치지 못하겠네. 적은 액수지만 사중에 보태쓰게”
하고는 또 양말 속에 넣어 두었던 3만 원을 주면서 화장비로 써 달라고 하였다.
하담 스님은 가시기 하루 전날 손수 향나무를 달인 물로 목욕을 하고, 미리 마련한 수의로 갈아입은 후, 깨끗한 장소에서 그간 입었던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태운 후, 실로 남은 것이라고는 수건 하나, 양말 한 켤레도 없이 오직 수의와 가사 장삼뿐이었다.
3개월 전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볍게 들었던 총무 스님은 하담 스님의 거동이 이상하게 느껴져 학인 승려 두 명으로 하여금 곁을 지키도록 하였다. 예언한 날 10시가 되자 하담 스님이 조용히 말하였다.
“이제 내가 가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그때 곁에 있던 젊은 스님이 말했다.
“스님, 10시는 부처님께 마지 올릴 시간입니다.”
“허, 듣고 보니 그 말도 옳구려.”
앉은 채로 열반涅槃에 들고자 했던 스님은 젊은 스님들의 부축을 받아 법당으로 올라갔다. 법당 옆에 단정히 앉아 사시 마지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
“이제는 가야겠구나. 나를 좀 눕혀다오.”
시내에서 정근하다가 황급히 올라온 법산 스님과 젊은 스님의 부축으로 반듯이 누운 하담 스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발원하면서 가셨다.
“원컨대 법계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법계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
하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범어사 스님들은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졌다. 특히 범어사 총무 스님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아이구, 아이구, 진짜 도인 스님! 선지식을 옆에 두고 눈 어둡고 귀 멀어 몰라보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장례는 스님의 삶처럼 간소하면서 여법하게 치러졌다. 법산 스님은 은사 스님이 남긴 한 줌의 재를 금정산金井山에 뿌리고 부산을 떠났다. 스님은 은사 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고 더욱 신심을 내고 발심하였다. 그 이후로는 더 큰 소리로 더 간절하게 염불하였다. 그렇게 전국을 3년가량 다니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강원도 명주군의 어느 외딴 토굴이었다.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는 지금까지의 거리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거의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처음 몇 년간은 땔감을 구하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던가,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하기 위하여 외출도 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는 누군가 땔감이 없으면 땔감을,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조달하여 주었다. 그는 하루종일 아미타불에 빠졌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로 눈을 뜨면 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달이 가고 해가 지나서 10여 년간 아미타불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그간 어떨 때는 너무 좋아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였으며, 어떨 때는 남모를 소리를 내며 즐기기도 하였으며, 어떨 때는 법열에 자신을 억제하기 어려워 동해안을 질주하기도 하였으며, 어떨 때는 뒷산 상봉인 오대산五台山 삼왕봉三王峰을 올라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으며, 어떨 때는 밤중에 방광放光하여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또 어느 해는 강원도 산골에 앉아서 서울을 보며 정부의 나라 걱정을 하기도 하였고, 어느 여름에는 큰비가 올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킨 일도 있고, 언젠가는 동해안으로 상륙한 공비들 2명을 자수시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살아 있는 아미타불’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도인 스님’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앞날을 내다보는 ‘신비한 스님’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30년 가까이 부른 아미타불 속에서 진정한 희열을 느끼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참 행복을 느끼다가 갔다. 그는 열반에 들 때도 아미타불 일념에 들어 법열을 느끼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상태로 갔다.
이상 하담 스님과 법산 스님의 이야기는 무여 스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축서사보, 갑신년 신년법어>
卍 보정의 꼬리말
이 이야기는 축서사鷲捿寺에서 발행하는 『축서사보』에 실린 2004년 무여 스님 신년 법어 「행복으로 가는 길」의 일부이다. 2004년 신년 법어에서 50~60년 전 이야기라고 했다. 이 이야기에서 대강이라고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 청담 스님이 도선사 주지로 머문 때가 1961년부터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1960년대 이후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룡 스님 수행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60년경, 교계에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노스님 한 분이 부산 범어사에서 열반에 드셨다. 스님의 성은 황씨黃氏요, 법명은 하담荷潭으로, 19세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하여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불렀습니다. 스님은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만을 외웠고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나무아미타불’ …… 아미타경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년이 넘자 대화를 나눌 때도 ‘나무아미타불’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잠을 잘 때도 ‘나무아미타불’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담 스님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아미타불이 무량한 광명을 보고 견성을 하였고, 무량한 빛과 무량한 진리를 체득한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금강산에서 하산했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이 거룩한 단어 하나를 귀에 넣어 줌으로 해서 중생들의 업장을 녹이고 죄업을 소멸시켜 주고자 서울로 온 것입니다.
유명하지 않은 스님이라 비문도 없고 정확한 기록도 없어 전설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1지보살이나 가능한 불퇴전을 이루어 극락에 간 성인이었다. 하담 스님이 입적한 때는 1960년대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유일한 제자 법산 스님은 염불한 지 30년 지나 극락 가셨다고 하니 1990년대라고 볼 수 있다.
두 스님이 샌드위치 간판에 ‘나모아미따불’ 붙이고 염불하며 서울을 누볐던 사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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