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이에 농민들은 생존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구책을 강구해야만 하였다. 즉, 농법을 개량하여 구체적으로 씨뿌리기 방법의 개선, 거름의 사용, 수리 시설의 개선, 농기구의 개량 등으로 나타났다. 먼저, 씨 뿌리는 방법의 개선은 논농사나 밭농사에서 모두 진행되었다. 논농사에서는 직파법이 이앙법(모내기)으로, 밭농사에서는 농종법이 견종법으로 개선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의 발달은 농촌 경제의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15세기의 벼농사에서는 논이나 밭을 막론하고 볍씨를 뿌린 땅에서 그대로 키우는 직파법이 일반적이었고, 못자리에 모를 길러서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은 남부 지방 일부에만 보급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 이르러서는 농민들은 수리 시설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이앙법을 실시하면 가뭄에 따른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앙법을 확대시켜 갔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하여 노동력을 적게 하고 수확량을 오히려 증대시켰다. 또, 이앙법은 논농사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여 농민의 소득 증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보급되었고, 더구나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다.
이앙법의 보급은 농촌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수리 시설의 발달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당시 정부는 저수지를 만들고 보수하기도 했으나, 가뭄의 피해를 우려하여 가급적 이앙법을 억제하였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앙법을 계속 확산시켜 갔다. 농민들은 주로 작은 규모의 보를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서 물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가 수천 개소에 이르렀다.1)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거름 주는 방법도 개선하였다. 토지를 계속 이용하여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지력의 유지가 필요하며,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여러 종류의 거름이 있었으나, 그 양이 부족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퇴비, 분뇨, 석회 등 거름의 종류를 다양하게 개발하였고, 거름의 양도 풍부해졌다. 거름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개선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기구도 개량되었다. 생산력의 정도는 농기구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18세기 이후 철제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농기구가 제작되었다. 쟁기, 써레, 쇠스랑, 호미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논농사에서는 소를 이용한 쟁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생산력이 보다 증대되었다.
한편, 18세기에는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곡물, 면화, 채소, 담배, 양초 등을 상품으로 재배하여 소득을 높여 갔다. 곡물 중에서는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주곡으로 자리잡으면서 그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면화는 경상도를 비롯한 삼남 지방과 황해도에서 집중적으로 재배되었다. 면화는 당시 서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옷감의 원료로서 그 수요가 많았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였으며, 그밖에 담배, 인삼, 생강 등도 인기 있는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
농업 경영의 변화
영농 기술의 발달은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경영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즉, 이앙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을 덜게 된 농민들은 1인당 경작 면적을 보다 넓혔다. 그리하여 부지런한 일부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여 광작(廣作)을 하였다.1)
농가의 경작 면적이 늘어나는 광작 농업이 발달하면서 농가의 소득은 당연히 늘어났다. 자작농의 경우는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 할 수 있어서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부 농민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한 광작 농업은, 한편으로는 다수의 농민을 농촌에서 떠나게 하였다.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 주고 일부 농토만 직영하던 지주들은,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영하였다. 이 때문에 소작 농민들은 소작지를 잃거나, 소작지를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일부의 농민들이 부농층으로 성장하고, 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에서 밀려나 임노동자가 되는 농민층의 분화 현상은 토지 소유의 집중으로 인해 유발되기도 하였다. 16세기 중엽 이후 직전법이 폐지되자, 양반 관료들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토지 소유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은 토지를 많이 가지고자 힘썼다. 17세기에는 정부의 개간 정책에 편승하여 토지를 확대하였다.
양반 관료의 토지 집적은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토지의 상품화 현상이 진전되면서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 상제의 비용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들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고, 양반 관료, 토호, 상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여 축적해 갔다.
그리하여 다수의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점차 농촌에서 유리되어 도시로 나가서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만이 생계 수단이 되었으므로 농촌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품팔이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하였다. 농민층의 몰락은 궁극적으로 농촌 사회를 파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지대의 변화
생산력의 증대와 토지 소유의 변화는 농업 경영 관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조선 후기에는 토지 집적이 심화되면서 지주 전호제가 지배적인 형태를 이루었다. 조선 전기에도 농토의 소유주인 지주가 그 농토를 전호, 즉 소작농에게 소작시키는 방식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지주 전호제가 일반화되어 가면서 경작자인 전호는 자신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자 힘썼으며, 그들이 부담하고 있던 소작료의 부담을 줄이고자 시도하였다.
종래 소작료의 납부 형태는 타조법(打租法)이 일반적이었는데, 그것은 소작인이 지주에게 수확의 반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밖에 전세와 종자, 그리고 농기구을 농민이 부담하게 되어 농민으로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작황에 따라 지주의 이익이 좌우되므로, 지주의 간섭이 심하여 농민의 자유로운 영농이 제약받고 있었다. 전호는 소작료 외에 지주가 요구하는 사적인 부담이나 노역을 감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소작료가 임의로 책정되기도 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항조 운동을 펴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18세기에 일부 지방에서는 도조법이 행해졌다. 도조법(賭租法)은 농사의 풍작과 흉작에 관계없이 해마다 일정한 소작료를 납부하는 것이다. 도조법에서는 대개 수확량의 약 3분의 1을 지주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작인에게는 타조법보다 다소 유리하였다.
한편, 18세기 말 이후로는 상품 화폐 경제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소작료의 납부 형태도 금납제로 이행되어 갔다. 이 같은 움직임들은 소작농의 농업 경영을 보다 자유롭게 해 주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부유한 평민층이 지주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경우에는 지주와 전호의 신분이 같았으므로 인신적 지배를 강요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비교적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생산 의욕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