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일주일 남은 토요일 오후.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힐끔 쳐다보니 근무처에서 오는 것이다. 시설책임을 맡은 나는 늘 좌불안석이다. 전화를 받기도 전 긴장하여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불이라도 난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들려오는 첫마디가 일이 생겼다 한다. 그런데 일이라는 것이 늘 생기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내 근무처는 이중 철조망에 청원경찰들이 물샐 틈 없이 밤낮으로 지켜 외부침입자가 들어와 절도행각을 벌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절도라니. 청소 일을 하는 친구가 공사를 하러 온 업체의 컨테이너에 뜯고 들어가 전기 케이블을 나르다가 업체 측한테 들켰다 한다. 청소 일이라 하면 직원이 아닌 용역업체가 대행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내 소관이다.
나는 아내와 같이 있는 피의자를 만났다. 당장이라도 경찰서에 알릴 것으로 생각하였는지 그의 아내의 눈빛이 초조하다. 벌벌 떠는그들이 왠지 모르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막상 그와 대면을 하니 무엇을 물을 것인가 망설이게 된다. 이미 벌어진 잘못을 왜 그러했느냐 다그친다는 것도 그렇고 다 아는 사실을 어찌 한 것이냐 다시 따져 묻기도 그러하다. 언뜻 말끝에 애가 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7살짜리 아이의 나이를 말하면서 고개를 더 숙였다. 그전에도 이런 짓을 여러 번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물증이라도 있을까하여 동료들하고 그의 집을 찾았다. 들어서려니 들어설 수도 없는 옹색한 그런 집이다. 괜히 갔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노는 토요일 일부러 들어와 문을 뜯은 것이라면 계획적으로 저지른 범죄이다. 우발적인 충동에 따른 범죄라 할 수도 없으므로 참작은커녕 여죄가 더 있을 것으로 외려 추정할 수도 있다. 나는 그가 7년 전 유사한 전과 기록이 있다는 사실과 그의 통장엔 단돈 7천원이 있다는 사실도 마저 알게 되었다. 그런 그에 대해 보고를 어찌 할 것인가. 사고로 처한 입장은 제각기이다. 그가 소속한 용역회사는 피해를 당한 업체와 협의를 해서 종결할 것이니 상부에 보고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범인을 잡은 회사는 그 동안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하며 합의금으로 많은 돈을 요구한다.
나는 그들이 원만히 합의할 것이라 믿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보고를 소홀히 하여서 자칫 일이 불거지기라도 하면 큰 낭패가 되고 말 것이다. 보고내용도 문제다. 미수에 그친 경미한 절도로 보고를 하느냐 아니면 과거 경력이 있는 친구로 더 튼 여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느냐에 따라 윗사람의 판단은 달라진다. 상부의 성격으로 보아 전력이 있다하면 필시 그를 고발조치하라고 할 것이다. 나는 생각 끝에 윗사람에게는 송구하게도 그의 과거 사실에 대한 사항은 일부러 빼고 보고를 하였다. 일은 다행스럽게도 커지지 않고 업체들끼리는 5백만 원 정도 선에서 합의를 보고 윗사람 또한 업체에게 경고조치를 하는 선에서 끝나는 것으로 지시를 하였다.
난 내가 한 행위를 지금도 곰곰이 생각한다. 어쩌면 그를 제대로 교화시키기 위해선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모른다. 그 나쁜 손버릇은 쉽게 고쳐진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득 서슬 퍼런 법의 집행을 다루는 판검사의 고뇌가 어떨 것인지 알 것같이 느껴진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하는 말. 예전엔 그 말이 법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재판관이 아픈 마음에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공정하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나같이 감정에 치우치는 사람은 엄준한 법을 논하기엔 애당초 틀린 것이다.
그런데 업체는 합의금 5백 만 원을 어떻게 마련한 것일까. 용역회사라는 것이 열약하기 그지없어 이를 감당하기가 쉽지가 않아 더더욱 궁금하였다. 나는 회사 사장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다. “같이 그 친구 집에 가봤잖아요. 쌀이라도 팔아 줘야 할 형편인데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우리들 봉급에서 일부 떼기로 해서 갚기로 했습니다. 저 꼴로 끝이 났으니 실업수당도 못타고 쫄쫄 굶게 생겨서 어쩔 수없이 쌀 한가마니 팔아줬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손해를 입고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에게 쌀 값을 보내 줄 생각을 하다니.
삶의 가치는 삶의 진실을 실천하는 마음에 있다. 나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따스한 온정이 내 곁에 있다는 것에 행복하였다. 나를 돌아다 보게 한다. 나란 위인은 아마도 아픈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 언제쯤인가는 그의 죄를 면하게 한 판사라도 된 것인 양 고발하지 아니 한 것에 기대어 넓은 자비라도 베푼 것인 양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다행스런 충족감에 젖어서는 늘 흡족하게 생각하면서도 그에 대해 한 때 갖았던 아쉬움은 쉽게 잊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그와의 인연은 아주 운 나쁜 악연이라 여기며 그를 우연히 본다하여도 모른 척 할 지 모른다. 그러면서 세상 이치는 다 그러한 것이라고 위안삼아 또 말을 할 것이다.
비단 법으로써 경계를 그은 죄는 아니라하여도 인간의 도리로서 합당하지 않은 무수한 죄를 지으면서도 뭣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내가 아닐까. 온정이 필요한 그에게 정작 따스한 손을 내민 것은 손해를 잔뜩 입은 역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용역 직들이었다. 묘하게 명절 날 나오는 뉴스가 ‘극심한 생계형 절도 ’ 란 제목하의 뉴스이다. 경기침체 장기화로 사회 양극화 현상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사회 안전망 구축이 절실히 필요한 이 때 쌓인 냉대와 벽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오늘 새삼스럽다. 우리는 모두 죄와 벌 그 굴레에 갇혀 살다 묻히고 말 존재들이다. 낮게 드리워 전하는 말 ‘우리는 모두 소중한 사람이다.’ 란 말이 희뿌연 하늘아래 찬바람 되어 따사로운 명절날 어설피 흩어지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2007 2 20)
**나는 생각 끝에 그에게 작은 선물을 보냈는데 오늘 그의 아내로부터 고맙다는 눈물의 전화를 받았다. 그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아내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전화를 끊자 왜 내가 또 눈물이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왠지 마음이 훈훈하여 사는 맛이 달다.(2007 3월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