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 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마흔 넘은 여자들이 오동나무 그늘 아래 들어앉아 보기 민망할 만큼 펑퍼짐해진 엉덩이를 드러내고 오줌을 누는 장면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속의 그림이 흉하지 않고 재미있다. 마치 조선의 화원(畵員) 혜원(蕙園)의 풍속화 같다.
여자들의 오줌 누는 풍경을 굽어본 게 오동나무였다는 건 기가 막히게 절묘하다. 오동나무만큼 이 땅의 여자들을 위한 나무가 또 있을런가 해서다.
울림 좋은 장구통이나 거문고통으로 쓰려고 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동나무는 애지중지 키운 딸자식 시집보낼 때, 좋은 장롱 한 채 만들자고 심는 나무였다. 잘 키워 남의 집에 보낼 때 번듯한 장롱 한 채 지어주려는 아비들의 정성을 가득 담아 키우는 나무가 오동나무다.
여자들을 위해 생명을 얻고, 다시 여자들을 위해 기꺼이 제 생명을 내놓는 오동나무다.
오동나무 가운데 4백 년 넘게 마을 어귀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가 있다. 경북 청송 홍원리 개오동나무다. 이 오동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정자나무처럼 늠름하게 컸다.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될 만큼 크고 아름다운 나무다. 오동나무는 어느 곳에서나 마을 사람들에게 무척 친한 나무가 됐고, 오동나무 아래에서는 누구나 편안하게 사람살이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오동나무 아래는 여자가 잘 어울린다.
고요한 마을 홍원리 개오동나무에 가면 이 땅에서 자란 이 땅의 딸들이 이 땅에서 늙어, 나무 아래 주저앉아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을 어귀, 하루에 두어 차례 버스가 오가는 자리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기다림의 한 세월을 보낸 노파들에게 오동나무는 떨어질 수 없는 벗이다. 저 노파들도 그들의 아비가 지어준 오동나무 장롱을 갖고 혼례를 치렀을까, 궁금하다.
* 오동나무 : 딸아이가 시집갈 나이쯤인 스무 해 정도 되면 베어내 쓸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자란다. 잘 자라면 20m까지 자란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따뜻한 지방에서 자란다. 잎사귀가 길이 20cm, 너비 30cm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자라는 나무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잎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 고규홍, 『나무가 말하였네』, 마음산책, 2008, 114~117쪽
[작가와 문학사이] 김선우 - 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거름을 줘야 한다.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신형철 문학평론가/ 경향신문 2007.03.19 ‘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시전문 계간지 <애지>에 발표된 김선우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여성적 건강함을 내재한 시를 찾기 어려운 작금의 시단에서 여성인 한 시인이 보여주는 이 시는 사뭇 푸풋하기 이를 데 없다. 시 한 편을 이루고 있는 에피소드는 에피소드를 넘어서 오줌 누는 소리마저도 수치심으로 자제하게 만들었던 사회 통념을 통쾌하게 부정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한 부분으로 되돌아온 여성 원래의 활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니 여자들이 엉덩이를 내리고 오줌을 누는 소리를 듣는 오동나무인들 어찌 흐뭇해하지 않을 수 있으랴.
참 좋다.
상쾌하다.
하종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