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되자 람 고팔은 나에게 얼음사탕을 주면서 떠나라가 말했다.
나는 작별을 고하기가 정말 싫었기 때문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그가 웃으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인으로부터 나오는 평화의 진동이 내 존재 전체를 감쌌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열대의 밀림을 헤치고 수많은 논밭을 지난 뒤 마침내 타라케스와르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한번 사원으로 향했다. 두번째 순례였다. 이번에는 제단 앞에 몸을 완전히 굽혀 엄숙히 경배했다.
제단의 그 둥근 돌이 내 내면의 시야에서 점점 확대되더니 결국 우주의 원환이 되었고,
태 안에 또 태가 보였고, 영역 안에 또 영역이 보였다. 그러더니 모든 것이 신성으로 가득찼다. - 요가난다 자서전
저 위 사진의 돌(링감)이 바로 그 위의 자서전에 나오는 그 둥근 돌입니다.
전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요가난다가 몸을 완전히 굽혀 엄숙히 경배한 저 돌은 지금은 매우 보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사원 앞에 저렇게 사진을 찍어 팔고 있습니다.
내가 저 시커먼 돌에게 경배를 하면 힌두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아주 미개한 사람으로 쳐다봅니다.^^;;;
저 돌은 힌두교에서 아주아주 중요합니다. 인도의 모든 쉬바사원에 가면 저 돌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저 돌이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저 돌과 파괴의 신 쉬바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이 관계를 모르면 힌두교를 모르는 것이고
요가의 가장 중요한 원리도 모른다고 봐야 합니다.
위의 사진은 바라나시 갠지스 강에서 열리고 있는 행사 도중에 찍은 사진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식을 지켜봅니다.
이들이 들고 있는 불이 바로 쉬바의 돌(링감)입니다.
돌이 아니라 쉬바의 원리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사진에는 정확히 구별이 되지 않지만 불꽃이 활활 타고 있는
덮개에는 코브라가 불꽃을 감싸고 있습니다.
맨 위의 검은 돌 사진 위에 부채처럼 펼쳐져 있는 동판 같은 게 바로
코브라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쿤달리니를 상징합니다.
물라다라 차크라에 뱀이 세바퀴 반을 감싸고 있는 존재가 바로 쿤달리니죠.
이것이 깨어나면 불이 깨어나고 빛이 보이고 더욱 단련이 되면
람 고팔 성자처럼 마을 전체가 광휘에 휩싸일 정도가 됩니다.
람 고팔 성자가 살았던 집의 꼭대기에 있는 그림입니다.
삼지창을 배경으로 멋지게 폼을 잡고 앉아 있는 분이 바로 쉬바 신입니다.
인도인들이 사는 집에 가면 대부분 저 쉬바신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 왜 모든 것을 때려 부순다는 파괴의 신을 저렇게 섬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착한 신들이 많은데.... 저 신을 모시고 있으면 착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의 검은 돌을 모신 저 힌두교 사원에도 쉬바 신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그림 쉬바신의 상징은
내게도 쿤달리니를 열리게 해달라는 인도인들의 열망입니다.
쉬바신이 파괴의 신이라는 것은
쿤달리니가 열려 차크라를 통해 상승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기존의 욕심많고 자주 화를 내는 불안전한 존재에서
서서히 신과 가까운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에고로 가득찬 불완전한 존재를 쿤달리니가 상승하며 파괴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쉬바를 파괴의 신이라고 하는 것이죠.
처음에 요가난다는 저 사원의 돌을 무시하지만
람 고팔 성자를 만나고 난 뒤
기존의 에고가 파괴되고 몇겹으로 쌓인
자신의 본성을 보고
나아가 우주의 신과 합일하면서 영혼이 성장하게 됩니다.
어린 요가난다처럼,
자만심이 깨지지 않으면,
지금의 내가 늘 부족하며
끝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겸손이 없으면
성장의 기회는 영원힘 멈출 것임을, 나는 다시
다짐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사원으로 향했다. 두번째 순례였다.
이번에는 제단 앞에 몸을 완전히 굽혀 엄숙히 경배했다.
제단의 그 둥근 돌이 내 내면의 시야에서 점점 확대되더니 결국 우주의 원환이 되었고,
태 안에 또 태가 보였고, 영역 안에 또 영역이 보였다. 그러더니 모든 것이 신성으로 가득찼다. - 요가난다 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