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바다로
주말 아침에 눈을 뜨면 맨 먼저 “오늘은 싸우지 말자” 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오랜 생활방식이다. 싸움이래야 고작 토닥대고 삐짐의 수준이지만 서로 “대들지 마~” “무시하지 마~” 하고 맞대응을 하며 기선 제압에 나선다. 순하고 고분고분하던 아내가 어느 새 내 말에 콧방귀를 끼고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기에 미리 이렇게 다짐을 해 두어야 주말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토라지면 결국 아쉬운 것이 많은 내가 두 손을 드는 편이지만 결혼 초기에는 눈만 한번 부라려도 꼬리를 팍 내리던 아내가 세월 속에 배짱이 너무 늘어버린것 같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른 집 남자들은 모두 순한 양이 되어간다는데 유독 우리 집 남자는 그렇지 않다며 불만이 크다.
이번 주말은 죽고 못 사는 아내의 단짝 친구들인 오공주의 모임이 1박 2일 일정으로 영덕의 강구에서 있는 날이다. 비록 아내 친구들 모임의 들러리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 남자들이 더 기다리는 모임이기도하다. 서둘러 수영장을 다녀오고 시내까지 학원을 가는 아들 녀석의 운전기사 노릇을 하고서야 길을 나설 수 있었다.
겨울날씨 답지 않게 날씨가 포근했다. 양지쪽에 앉으면 금새 잠이 소록소록 쏟아질 것 같은 햇살이다. 벌써 봄이 오고 있는 것일까? 이런 날은 나들이를 떠나기에도 좋다. 준비한 반찬과 먹거리를 싣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모두가 모이려면 저녁나절쯤은 되어야 했지만 오미가미 먹거리와 볼거리를 함께 즐기기 위해서였다.
서울의 은경씨도 청주의 정주씨도 출발을 했다고 연락이 오고갔다. 아내는 모처럼 만에 만나는 친구들의 만남에 설렘이 많은가 보다. 영덕이 고향인 정민이네는 축산 항에 미리 주문한 대게와 문어를 가지러 앞서 떠났기에 오늘은 각자의 차량으로 목적지를 찾아가야 했다.
나들이를 가는 기분은 늘 설레임과 여유가 있어서 좋다. 아내와 함께 일찌감치 떠나는 여행은 급할 것이 없었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핸들을 잡았다. 오늘 점심은 지난번 포항 나들이 때에 보아둔 죽도시장 입구의 게장 집으로 정했다. 늘 애를 먹이는 동서와 같이 점심을 하려고 연락을 취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둘만의 점심이 되었다.
포항의 길거리는 대선의 열기가 남아 있어 아직도 온통 축제분위기다. 길거리는 포항이 낳은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현수막으로 덮여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포항의 먹거리가 모인 곳은 죽도시장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특별히 볼일도 없으면서 죽도시장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시장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서 좋다. 명물인 과메기가 걸리고 도루묵이 있고, 대게랑 칼치랑 문어가 있었다.
대게와 문어에 자꾸만 눈이 갔으나 오늘은 조금만 참기로 했다. 저녁나절이면 맛있는 대게랑 문어를 포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옥 씨가 좋아하는 과메기를 사서 맛집 서산돌게장 식당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어렵게 자리를 잡아 게장백반을 시켰다. 푸짐한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은 맛이 있었으나 생각보다 비린내가 많이 났다.
흥해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고향집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즐비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였다. 보경사 입구를 지나 한참을 가자 화진 휴게소 아래로 마침내 드넓은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리도록 맑은 파아란 바다로 첨벙 뛰어 들고 싶었다.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오는 바다는 바라보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했다.
차 한 잔을 하며 넓은바다를 앵글과 가슴에 담았다. 여기서부터는 도로가 해안을 따라 이어졌다. 하얀 갈매기가 여유로운 날개짓을 하는 바다에 온통 눈과 마음을 빼앗기며 천천히 강구로 향했다. 해안 길은 산길과 같은 정겨움이 있었다. 삼사해상공원을 구경하고 가느냐? 마느냐로 싱강이를 하다가 결국 핸들을 잡은 내 고집이 우세했다.
아내는 빨리 갈 마음에 내일 친구들과 함께 들르기로 했다고 둘러댔으나 거기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해상공원을 한 바퀴 돌며 내려다보는 강구의 포구는 겨울바다의 공허함이 있었다. 태진아 동생이 형의 노래를 목청껏 불러대는 삼사해상공원의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마침내 큰 도로를 버리고 강구대교를 건넜다. 주차 공간이 부족한 강구는 차량의 정체가 심했다. 외길에서 30여분을 꼬빡 갇혀 있다가 간신히 강구를 벗어났다. 강구는 온통 게판이었다. 대게 없는 강구는 생각할 수 없었다.
포구를 벗어나 5킬로쯤 바다를 끼고 해안을 따라 들어서자 멋진 민박집들이 나타났다. 우리가 묵을 숙소도 전망 좋고 깨끗한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눈앞의 하얀 집 간판이 바로 우리가 찾던 대경민박집이어서 너무 반가웠다.
탁 트인 바다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집은 전망이 좋았다. 정민이네랑 멀리 청주에서 온 정주씨 부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가 바쁘게 짐을 내려놓고는 곧장 바다로 향했다. 고깃배가 떠 있는 바다는 고요했다. 갈매기가 유영을 하는 바다는 바람까지 부드러웠다. 한 동안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가슴이 뻥 뚫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갈매기를 따라 바다를 날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술잔에 부어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에 서울의 은경씨 부부랑 현옥씨 부부가 도착했다. 한꺼번에 쏟아놓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이번 모임에는 한 동안 참석을 하지 못했던 도희씨도 함께해서 5년 만에 다섯 집 부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자기를 주장하기에 앞서 양보하고 남의 얘기를 들어주며 이해할 줄 알기에 늘 모임의 분위기가 좋았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해 늘 당황스러워하던 충청도 양반 도희씨가 어느새 웬만한 시골 사투리는 모두 소화를 시켜 금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대게가 나오고 문어가 썰어지고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 바다에는 어두움이 내리고 밤은 깊어만 갔다. 이야기는 오래 묵을수록 좋은 것인가 보다. 케케묵은 이야기에 요즘 이야기가 섞여서 오간다.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들이 모두 좋아보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모두들 남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기술이 대단해 보였다. 남편들이 밥도 스스로 찾아먹고 방 청소도 하고 가사 도우미 역할을 아주 잘 한다고 자랑들이 대단했다. 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람들의 너스레가 야속하기만 했다. 이 시대에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남자가 그리 흔치 않은가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두고 잠을 잘 수 없어 함께 파도소리가 들리는 밤바다로 나갔다. 해변의 밤공기는 가슴 깊숙하도록 시원했다. 어두움의 끝 수평선 너머에 깜박이는 고기잡이배의 등불이 흐느적댔다. 어린 시절 이맘때에 친구들과 어울려 밤이 깊도록 놀다가 무서움을 달래려고 짚단에 불을 밝히며 걷던 기억을 더듬었다. 깔깔대는 동심으로 그네를 타고 인근의 노래방에서 광란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술잔이 한 순배 오고 가서야 하나 둘 골아 떨어졌다.
각 지역에서 내노라 하는 코골이가 모두 모여서인지 집이 들썩대도록 코를 골았다. 가뜩이나 잠자리가 바뀌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코 고는 소리에 밤새 뜬눈으로 보내다시피 해야 했다. 다음에는 대게를 한 마리쯤 살려놓아야 할까 보다. 머리만 바닥에 대면 잠이 들고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단잠을 자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여명이 걷히는 해안의 새벽은 조용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어둠에 잠들었던 바다가 마침내 기지개를 켜고 새들을 깨웠다. 한참을 기다리자 둥근 해가 바다위로 힘차게 솟아올랐다. 장관이었다. 올 해 임용고사를 치르는 아들의 합격을 기원하며 부지런히 일출의 모습을 앵글에 담았다. 고깃배가 떠가고 갈매기가 나는 아침바다는 여린 낭만이 있었다.
언제 준비를 했는지 진수성찬의 아침상이 차려지고 멀리 서울서온 김치가 맛이 있어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사람이 많으니까 모든 것이 금방 해결되었다. 디저트로 커피를 찾다가 모두들 내가 탄 커피를 먹고 싶다고 우겨 마담 노릇을 톡톡히 하고 10시 반이되어서 일어섰다.
오늘 일정은 해맞이공원을 돌아보고 죽도시장에서 회로 점심을 먹은 후 헤어지기로 했다. 축산항이 있는 창포리 방향으로 조금 나아가자 네덜란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차가 돌아가고 대게의 발이 등대를 꽉 집고 있는 해맞이공원이었다. 내려다보이는 바다의 물빛이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 것 같은 파아란 바다와 어우러지는 등대가 예뻤다.
달팽이 속 같은 등대계단을 어지럽도록 올라 바라보는 쪽빛 동해바다는 어느 것이 물빛인지 어느 것이 하늘빛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풍차가 있는 곳을 돌아보려다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영덕을 지나 포항을 향해 달렸다. 죽도시장으로 향하며 휴일이라 차가 밀리고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회를 먹기가 곤란할 것 같아 손아래 동서를 찾았다.
수소문 끝에 자연산만을 고집한다는 횟집을 안내받아 맛있는 점심을 끝으로 일정을 마치고 아쉬운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축산항 인근에서 점심을 해결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멀리서 온 사람들을 더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이번 오공주의 모임은 친구들의 살아가는 얘기를 들으며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누라 말이 곧 법이 되어 살아야 할 날이 그리 많지 않음도 느꼈다.<2008. 1. 8. 싱거운 도까비>
첫댓글 잼있게 사는 자네모습이 눈에 선하구먼, 아직도 자네는 갱상도 똥고집으로 마눌을 잡고 사나? 난 완전 잡혀 넙죽 엎드러 산다네, 그 용기가 부러우이~~~ 자네얼굴을 보니 신수가 훤하구먼 ^^^^ 아랫도리에 힘 있을때 여행도 욜심히 댕기고,마눌도 가끔 엎어주고 하소 그렇게 덕을 쌓아 놓아야 애랫도리가 축 늘어졌을때도 밥얻어 먹울 수 있는기라 안그러나?ㅋㅋㅋ 살아가는 알콩달콩한 야그로 원기를 주어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할 수 있어 자네에게 고맙다는 인사 꾸벅~~~
포항의 죽도시장~~~다시한번 가고싶어져요^**^
사실~ 이 글을 올릴까 말까 망설였고........ 아침에 지워야 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리플을 달아놓아 이제는 지울 수도 없게 되어버렸네. ㅎ~ 어쨌든 내가 살아가는 너무 깊숙한 이야기를 해서 쪼깨~ 거시기 하이~~^^
칭구야..어찌 그리도 기행문을 잘쓰는공...시원한 바다랑 좋은 경치 사진 잘보앗네..간혹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려 보지만 자네 사진이 더 멋있구먼....연락해서 쐐주 한잔 하세나...
ㅎㅎ~~세상살이에서 뽀대나고 크고 멋이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때로는 진솔한 삶의 소리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으이~~언제 술잔을 기울일 시간을 한번 가져보세나^^
육종영(만경산)을 통해 자네가 권재일이란 것을 알았다네~~반갑다 찬구야~! 나는 신평촌놈 황무영이다..기억이 날려나? 종영이가 자네 칭찬을 하도 하길래 오늘 첨 자네 여행기를 읽어보았네...어찌 그리도 눈에 선하게 잘 표현하는가? 내가 직접 동해안을 여행하고 있는지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자네 혹시 직업이 작가? 아님 국어선생님? 몹시 궁금하네 그려~암튼 행복하게 살고 있는자네 모습을 보니 나도 또한 즐겁다네...새해에도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서울에서 황무영이가]
친구~ 반갑네 그려. 누구보다도 자네를 잘 기억하고 있다네. 아직도 학창시절의 추억과 자네 모습이 눈에 선하구먼~~ㅎㅎ 세월속에 옛 기억을 함께 더듬으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보세나. 감사하이~~ 그리고 난 작가도 국어선생도 아니라네 ㅎ~~ 그냥 무지랭이 단밀 촌놈일 뿐이라네. ^^*